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뇌는 너무나 게을러서 새로 맞닥뜨리는 무언가를 판단할 때 큰 노력을 투입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첫인상이 짧은 시간 안에 결정되는 이유이다. 뇌 과학자 Paul J.Whalen에 따르면 뇌를 구성하고 있는 편도체는 0.1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에 타인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을 결정짓는다. 0.1 초라니 딱히 호감형 인상을 가지지 못한 내게는 조금 가혹한 평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더욱 냉혹한 사실은 이렇게 한번 결정된 이미지가 큰 사건 없이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머릿속의 편도체가 그렇다는 데 뭐 어떻게 바꿔볼 요량도 없고 우선은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여 보자.
편도체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최초 정보에 머무르게 되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때가 있다. 엄마는 동창회만 다녀오면 매번 똑같은 이야기를 하곤 한다. 어쩜 다들 얼굴이 고등학교 때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래? 하고 핸드폰 속의 담긴 엄마 친구들의 사진을 보면 내 눈에는 길에서 마주치는 아주머니들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이 주름진, 중년을 지나 노년에 향하는 여성들이 보일 뿐이다. 사실 남 말할 것이 아닌 게 나도 아직까지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이대로 우리가 교복을 입고 교문을 지나 교실로 들어가면 고등학생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물론 과장이 반 정도는 섞인 생각이지만 정말로 슬슬 주름이 져가는 내 친구들의 눈가에서도 난 소녀 시절 그들의 얼굴이 그대로 떠오른다. 남들이 보기에는 주책이겠지만, 친구들을 만나면 그동안의 시간의 흐름은 잊은 채 과거 친구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 지금의 얼굴에 덧씌워지게 된다. 이도 어쩌면 예전 그 친구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이미지가 십여 년이 지나가는 지금에도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개인에 대한 이미지가 빠른 순간에 결정되고, 한번 결정된 이미지는 쉽게 고착되어 여간해선 바뀌기 힘들다면 회사에서는 어떨까? 회사에서 어떤 사람이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에 대한 판단 역시 0.1초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빠른 시간 안에 결정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판단의 영역이 일을 실제로 잘하는지의 여부가 아닌 일을 잘하는 것 같아 보이는지 아닌지라는 부분이다. 결국은 저 사람이 실제로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보다 일을 얼마나 잘할 것 같은지에 대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소년만화에서처럼 처음에는 별 볼 일 없는 최약체 취급을 받던 주인공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며 마침내 정상에 서는 스토리는 회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나는 일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적당한 수준의 인상을 입사 초기에 심어 준다면 이후에는 좀 더 편하게 80%의 힘만 주고도 회사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자. 우리의 미션은 회사에서 제일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인재가 되고 싶다면 다른 더 도움 되는 글들이 많을 것이다. 김 빠지겠지만 이 글은 그 정도의 소소한 성취를 위해 쓰인 글이다.
특히 입사 초기에는 나에 대한 평가 권한이 있는 보직자들에게 가능한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날마다 함께하는 옆자리 동료의 경우 한 번의 말실수나 업무적 미흡함이 발생하더라도 만회할 기회가 없지 않다. 아무리 사람의 첫인상이 중하다 하여도, 매일 부대끼며 소소한 나름의 역사가 쌓이고 하다 보면 서로의 숨겨진 장점을 찾게 되고 급기야 끈끈한 정도 들 수 있다. 하지만 첫 임원 보고에서 실수를 했다면? 그가 사람을 길게 보고 다양한 모습으로 나를 평가해 주는 인자하고 지덕을 갖춘 리더라면 참으로 바람직하겠지만, 많은 경우 그는 앞으로 나를 실수를 했던, 실수를 하는, 실수를 할 사람으로 볼 가능성이 높다. 만회하고자 해도 그럴 기회가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다.
처음 발령받은 팀이 공중분해되었던 때가 있었다. 정들었던 팀원들과 떨어져 낯선 조직에 덩그러니 놓였다. 어쩔 줄 몰라하던 나에게 가장 예전 팀의 일 잘하는 선배가 해준 조언은 단 하나였다. ‘한 달만 집에 늦게 들어가.’ 저 조언을 들은 것이 벌써 10년 전이니 지금 듣기에는 사실 꼰대스러움을 숨길 수 없는 이야기 같다. 요즘 같은 시대에 회사와 계약된 시간을 초과하여 내 개인 시간을 회사 업무에 추가로 투자하라는 것이 바람직한 조언 인지도 잘 모르겠다. 저 말을 조금 요즘식으로 풀어보자. 나에 대한 첫인상이 수립되는 시기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능력을 보여주는 게 좋겠다 정도로 재정의 할 수 있겠다.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나는 한 달간 집에 늦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다만 그 한 달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하고자 했다. 급히 떨어진 일에 대해 빠르게 피드백을 남겼다. 팀장이 퇴근한 이후에 그날 시킨 일에 대한 메일을 슬며시 보내 놓고 집에 들어가기도 했다.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의외로 투입 대비 결과가 좋았다. 금세 기존의 팀원들 사이에 무사히 섞일 수 있었다. 새로운 조직에 합류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 팀 입장에서는 새로운 직원(나)을 맞이하는 일과 같다. 내가 그들이 낯설듯이 그들도 내가 낯설었을 것이며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나를 파악하고 판단하고 싶을 것이다. 이때 빠르게 나를 판단할 수 있는 (실제와 다른)과대 포장된 재료들을 제공하면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결론은 조직생활을 하다 누군가가 내 첫인상을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 처한다면 첫 보고, 첫 메일에 내 노력의 120%를 투입하자는 것이다. 특히 초반에 시킨 1~2개의 업무에는 최대한 인풋을 많이 투입하자. 정말 싫어하는 종류의 조언이긴 하지만 필요하다면 보여주기 식 야근도 이때 집중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힘들겠지만 나중에 80%로 힘을 줄이기 위한 씨 뿌리기라고 생각해보자.
다음으로 팀원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실 회사에서 정말 괴로운 일은 일이 아닌 사람에게서 나온다. 그만큼 회사에서는 무난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별 탈 없이 어울려 지내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 그러니 새로운 조직의 새로운 이들과 만나게 되었을 때 그 낯섦과 긴장감 그리고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을 때 무난한 첫인상을 남기는 안전한 방법은 초반에 크게 튀지 않고 그들 안으로 섞여 들어가기이다. 이 부분도 상당히 말하기 우려스러웠던 부분 중 하나다. 과연 ‘사람들과 잘 부대끼면서 지내라’라는 개인에게 영양가 있는 조언일까? 선진화된 기업환경에서는 개인의 역량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져야 마땅하며 불필요한 사내 인간관계를 강요하는 것은 뒤쳐진 조언일 것이다. 나 또한 단체생활을 그 누구보다도 어색해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조언을 하는 것이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허나, 당장의 대한민국 회사에서는 어느 정도 영양가가 있다고 판단하여 글을 계속 이어나간다. 일부 깨어있는 기업들은 개인의 개성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인정하겠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회사는 조직에 잘 스며드는 ‘무난한’ 개인을 선호한다. 그리고 인간의 특성상 개성을 표출하고자 하는 직원은 그들의 (눈에 띄는) 개성을 상쇄할만한 역량을 기대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나는 조용히 스며드는 쪽을 선택했다.
내가 생각하는 ‘튀지 않고 부대끼면서 지내기’의 기본은 밥을 같이 먹는 것이다. 한약을 먹고 있어서 피해야 하는 음식이 많더라도, 다이어트 중이라 따로 샐러드를 먹고 싶더라도, 회사 사람들과 함께 있는 일이 너무나 어색해서 점심시간이나마 혼자 숨통을 트이고 싶다고 하더라도 우선 초반에는 밥을 같이 먹어보자. 밥을 먹으면서 식사 멤버 NPC가 되는 것이다. 적당히 맞장구를 치고, 적당히 나에 대한 정보를 흘려가면서 나의 무해함, 평범함, 조직 속의 일원이 되어 잘 섞일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소리 없이 어필해보자. 그들도 나라는 존재가 익숙해진 뒤에는 의외로 도시락을 싸 오든 약속을 잡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다. 사람 속에서 부대끼는 일이 힘들고 낯설더라도 3개월만 눈 딱 감고 물 흐르듯이 지내보자. 평범한 회사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운이 좋다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좋은 동료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