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흔히 쓰이는 식상한 이 표현을 직접 피부로 한번 느껴보고 싶다면 11월에 우리 회사에 방문해보시길 추천한다. 서로의 숨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극도의 긴장감을 절절히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숨 막히는 긴장의 원인은 바로 이때가 우리 회사의 평가 시즌이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의 경우 성과급의 비중이 매우 높은 기형적인 급여 기준으로 인해 심하면 과, 차장 세후 연봉이 3천 이상까지 차이 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말이 다가오면 서로가 서로에게 날을 곤두세우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 분위기가 형성된다.
모든 평가가 어느 정도 불공정한 면은 있겠다마는 조직에서의 평가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특히나 제한적이다. 묵묵히 일만 잘하더라도 이를 잘 알아주는 상사를 만나면 참 좋겠지만, 실제 평가는 너무나 많은 변수가 영향을 미치는 풀기 힘든 10차 방정식과 같다. 조직의 평가, 팀 동료들의 역량, 팀장의 평가 스타일, 그 외에 조직 내의 설명하기 힘든 다이내믹이 뒤섞여 작년과 동일하게 일하고도 몇천이나 적은 돈이 손에 쥐어지는 할 말이 없는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
평가가 반드시 업무 성과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이 불공정한 특성은 바꿔 말하면 업무 능력이 엄청나지 않아도 적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틈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열 몇 번의 평가를 받는 동안 기대 이상의 좋은 평가를 받았던 해도 있었고, 객관적으로 만족스럽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평가도 몇 번 받아보았지만 그래도 나의 자존감을 무너뜨릴 만큼 심각한 불만을 가질 정도의 평가는 없었다. 대부분 내가 그해에 한 업무의 수준에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평가였다. 어떻게든 꼴찌는 면해온 아슬아슬한 십여 년이었다. 소위 말하는 사내 정치와 라인 타기에 젬병인 나의 피 땀 눈물이 담긴 결과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동안 이 빡센 회사에서 평가를 받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체득해버린 평가를 망치지 않는 노하우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리 회사의 평가 시즌은 11월 말이다. 누구나 알겠지만 오래된 일들은 머리에서 점점 흐려져 간다. 1월에 방영한 드라마와 12월에 방영한 드라마 중 후자가 연말 연기대상에서 수상에 유리하다는 점은 그간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연기/가요/연예 대상을 시청한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습득된 상식과도 같다. 물론 1월에 큰 업무가 떨어진다고 해서 ‘저는 연말에 힘을 쏟아야 하니 이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태도로 눈에 띄게 뒤로 빠져있으라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상반기를 널널하게 보냈든 빡세게 보냈든 간에, 장마와 폭염이 지나고 여름휴가를 마치고 나면 슬슬 자기평가서에 쓸 먹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광 팔기 좋아 보이는 아이템에 어떻게든 발을 담가야 하는 시점이다. 아무리 봐도 일이 애매하다 싶으면 후진 아이템이라도 몇 개 더 추가해 업무의 양이라도 많아 보이게 하는 눈물 어린 노력도 해보자. 또한 급한 일이 없다면 10월부터는 휴가를 자제하고 엉덩이 무겁게 자리를 지키며 급히 떨어지는 업무를 받아먹는 것도 상황이 절박했던 시절에 내가 사용했던 방법 중 하나였다.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은 회사와 같이 공적인 영역에서도 생각보다 잘 통용되곤 한다. 우리 회사는 평가가 빡센 만큼 진급률 또한 너무나 낮다. 만년 과장, 만년 대리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이에 불만을 품고 회사를 떠난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들었던 이들도 한둘이 아니다. 평가 결과가 뜨면 그 해 누락자들은 조용히 컴퓨터를 끄고 말없이 일주일 정도 휴가라는 명목의 칩거를 하는데 부서장을 비롯한 그 누구도 이를 말리지 못한다. 다만 내 미래의 모습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기도를 할 뿐이다.
대리에서 과장으로 진급할 때, 갑자기 부서 이동이 정해졌다. 윗선에서 강제한 급작스럽고 원치 않는 인사이동이었다. 새로 발령 난 팀은 외부에서 이제 막 온 팀장이 이끄는 팀이었다. 훨씬 더 선진적인 회사에서 넘어온 그는 당연하게도 우리 회사의 혹독한 평가/승진 체계를 낯설어했다. 평가 경험이 많이 쌓인 관대한 부서장들은 직원이 진급 연차가 되면 일부러 큰 프로젝트를 맡기거나 해서 고성과를 줄 명목을 만들어주었다. 허나 이제 막 회사에 적응해가는 새로운 팀장에게 이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더욱이 같은 팀에는 나와 같은 진급 대상자가 세 명이나 있었고, 그들은 팀장과 함께 우리 회사로 이직한 이들이었다.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그들의 관계망에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진급하기엔 최악의 환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해에 꼭 진급을 하고 싶었다.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내가 무슨 몇 년 일찍 과장을 달고 싶어 한 것도 아니고, 과장이 되어야 할 시점에 과장을 시켜달라는 게 과한 욕심이란 말인가? 나 혼자만 진급을 못 한 채 동기들 사이에서 대리 딱지를 달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같은 시간 일 하고 더 많은 돈을 받고 싶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한몫 거들었다.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을 특히 회사에서의 아쉬운 소리는 더더욱 싫어하는 나였지만 이때는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큰일 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팀을 옮긴 직후 팀장과의 면담을 요청해 나의 생각을 꽤나 솔직하게 전달했다. 나답지 않은 적극적인 시도였다. 나는 올해 과장 진급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어려운 일도 다 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최대한 나를 많이 부려 먹으셨으면 좋겠다고 말을 했다. 어떤 스타일인지 파악도 되지 않은 이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꽤 위험한 도박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과장이 되었다. 업무 불만족으로 팀장에게 반년 내내 들이받은 또 다른 경쟁자 한 명은 그다음 해 팀을 바꾸고 나서야 과장이 되었다. 진급을 앞에 두고 팀장에게 싫은 소리를 한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나는 절대 하지 못할 용기 있는 행동이다. 물론 1년 늦게 과장이 된다고 해서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1년 늦게 되어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때는 하자. 생각보다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는, 그러나 말을 꺼내면 의외로 수월하게 해결되는 일이 꽤 많으니 말이다. 우는소리를 하는 나의 입속에 떡이 들어올지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 싶은 마음이 든다면 떡을 맛있게 먹고 눈물을 닦으며 날려버리자.
평가 혹은 연봉 인상 시즌이 되면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내가 올 한 해 한 업무 성과를 정리하는 것이다. 매일같이 오지 않는 주말만을 기다리며 회사에서 처박혀 일 년을 보낸 것 같은데, 모니터 앞에 앉아 지난 일 년을 돌아보자니 그동안 뭘 한 건지 뭐라 쓸 말이 없을 때가 많다. 영업이나 마케팅과 같이 비교적 가시적인 성과가 도출되는 업무는 그나마 조금 수월할 수 있겠으나 (이마저도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하는 기획 및 신사업 업무의 경우는 구체적인 자기평가를 적어내기가 상당히 어렵다. 당장 내가 올해 상반기에 한 일을 생각해봐도 수시로 진행했던 리서치 업무, 정기 임원 회의자료 취합 및 요약, 본부 업무소개서 작성, 소소한 서비스 기획 등이니 평가서에 적기에는 뭔가 빛이 나지 않는 느낌이다.
나처럼 애매한 기획업무를 맡고 있다고 하더라도 연말 자기평가서에는 이를 그대로 적는 대신 최대한 수치화 및 정량화를 해보자. 임원 간 정례회의를 몇 회나 지연이나 이슈 없이 완료하였는지, 몇 개의 제안서를 작성하였는지 그 제안서가 어떤 어떤 곳에 사용되었는지로 등으로 말이다. 단순히 ‘신사업 제안서 작성 업무 수행’보다는 ‘총 5개 업체 대상 제안서 작성 및 7회 시연 수행. 1개 업체 계약 완료 및 1개 업체 실사 진행 중’이라고 쓰는 것이다. 실제 영업 및 계약 실무 단계에서 내가 한 일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만든 제안서로 고객사를 유치하였으니 어떻게든 계약도 나의 공으로 돌리는 것이다. 평가하는 입장에서도 객관적인 숫자 지표가 있을 때 혹시 있을지 모르는 평가 결과에 대한 외부 감사 걱정 없이 더 마음 편히 좋은 평가를 줄 수 있다.
또 올해의 평가 시즌이 다가온다. 평가 결과를 열어보는 그 숨 막히는 정적의 시간이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매년 새롭다. 어떻게든 나를 어필해야 한다는 압박과 지난 일 년을 점수로 환산한다는 사실은 시간이 지나도 나를 불편하게 만들곤 한다. 지난 몇 년간 울고 웃었던 나의 똥꼬쇼를 이렇게 노하우라는 말로 포장해서 전달해보지만 나는 아직도 평가가 무섭다. 하지만 도망갈 퇴로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이 제도 내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왕 살아남을 거라면 잘 살아남고 싶다. 꼴찌는 하지 말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