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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도토리 Mar 23. 2022

디테일의 힘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처음 입사하고 맞이한 직속 사수는 어마어마한 능력자였다. 사원 말년 차였던 그 선배가 보고서를 척척 만드는 모습을 보며, 나도 언젠간 저렇게 될 수 있겠지라는 꿈을 키워나갔다. 내가 과장이 되었을 때 한 번 더 그분을 팀장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역시나 그는 변함없이 윗선의 사랑을 듬뿍 받는 존재였다. 지금은 그분이 다른 회사로 스카우트되어 자주 연락을 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회사보다 훨씬 규모가 큰 그곳에서도 혼자 많은 일을 이끌어나가며 인정받고 있다 한다. 역시 능력이 출중하면 일이 많아지는 법. 나는 그런 걱정은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분을 처음 사수로 만났을 때, 나름 팀이 한가한 시점이었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넋이 나간 내가 불쌍해서였는지 나를 옆에 앉혀두고 꼼꼼한 1:1 교습을 시켜주셨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들어 후배들을 여러 명 받아보고 나니 그게 얼마나 귀찮고 조심스러운 일인지 몸소 체감되었다. 후배에게 적당한 선을 지켜가며 나의 지식을 전파해주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과하게 설명하자니 꼰대 혹은 잔소리꾼으로 비추어질까 두렵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자니 너무 후배를 방치하는 거 아닌가 싶은 우려가 든다. 나는 아직도 선배 노릇을 하기 어려운데, 고작 사원 말년 차였던 그분은 어떻게 척척 잘 해내셨는지, 이게 역량의 차이인가 싶으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커진다.


 그때 사수의 옆에 앉아 말 그대로 어깨너머 배운 아주 소소한 팁들은 이상하게 회사생활을 하면서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갔던 사회 초년생의 초인적인 집중력 때문일지, 아직 아는 게 많지 않아 백지상태였던 머리가 놀라운 흡수력을 발휘한 탓인지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회사 생활을 하는데 소소한 자산이 되었다. 정작 후배들에게는 내가 배운 것들을 많이 알려주지 못했는데, 일을 하다 보니 결국 각자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일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점점 커진 것도 있으며, 한 편으로는 이러한 조언들이 잔소리로 들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말을 아끼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몇 가지만 풀어내 보고자 한다. 알면 도움 되지만 몰라도 일하는데 전혀 상관없는 디테일들. 하지만 결과물의 퀄리티를 높이기에는 투입 에너지 대비 아웃풋이 좋은 그런 손쉬운 사소함 들이다.



엑셀 문서 저장은 항상 A1에


 처음 내가 맡은 업무는 일일 실적 관리업무였다. 영업 부서였던 만큼 매일매일 실적을 뽑아 엑셀로 정리한 뒤 전체 실에 파일을 돌리는 그런 업무였다.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인수인계 과정이었지만 설명이 다 끝난 뒤 마지막으로 사수가 강조했던 내용이 있었다.


‘저장할 때 A1칸을 선택한 다음에 저장하도록 해’


 엑셀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만들어진 엑셀 파일을 열 때는 마지막으로 저장한 그 상태 그대로 열리게 되어있다. 그래서 문서를 저장할 때 내가 시트의 가장 좌상단인 A1을 선택한 뒤 문서를 타인에게 보내게 되면, 타인이 문서를 열 때 A1시트가 선택된 문서를 볼 수 있게 된다. 애매하게 H13이라든지 때로는 D3:K18과 같이 넓은 영역을 선택한 채 보내면 뭔가 만들다 만 문서를 받아본 느낌이다. A1영역을 선택한 채 저장을 하면 문서가 왠지 모르게 깔끔해 보인다. 여러 시트로 이루어진 문서는 각 시트 모두 A1이 선택되게 문서를 저장해 보자. 후다닥 만든 느낌이 아니라 차분하게 만든 뒤 검토까지 마친 문서 같은 느낌이다. 이는 말 그대로 느낌이기 때문에 못 만든 문서를 잘 만든 문서로 탈바꿈시키지는 못한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엑셀 시트 관리 잘하기


 문서를 만들다 보면 여러 시트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보고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엑셀 시트를 관리하는 방법은 상이한데, 실무자끼리 주고받는 문서일 경우는 (내가 배운 대로라면) 최대한 정보를 많이 전달하는 것이 좋다. 문서를 만들다가 실수가 발생한 경우에도 쉽게 실수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고, 불필요한 질문들을 미연에 방지한다. 나의 경우는 메인 시트와 데이터 및 기타 시트를 구분하라고 배웠다. 그래서 메인 시트와 데이터 시트  사이에 빈 시트를 하나 만들고 해당 시트의 제목을 ‘data——>’와 같은 식으로 설정한다. 시트의 탭 색을 변경하면 더욱 좋다. 그렇게 해서 메인 시트 작성에 들어간 데이터나 산출 로직 등은 데이터 시트 쪽에 모아 놓는다. 이럴 경우 다른 실무자들이 내가 만든 보고서가 어떠한 근거로 만들었는지를 바로 파악할 수 있으며, 개별적으로 변경이나 수정을 하더라도 논리 근거가 틀어지지 않게 된다. 물론 보고자가 윗선으로 올라갈수록 데이터 시트와 같이 핵심 시트가 아닌 시트는 모두 지워버리고 메인 페이지만 값 복사를 하여 보고하는 것이 좋다. 혹은 데이터 시트는 숨김 처리를 하는 방법도 깔끔하다.


천 단위 기호


 회사에 다니기 전에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는데 일을 시작한 이후에 엄청나게 거슬리게 된 것이 있다. 바로 천 단위 숫자 구분점이다. 예전에는 1000000이라고 쓰여있어도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얼른 점을 찍어 1,000,000로 만들어주고 싶다. 입사 후 처음으로 전체 메일을 보내게 되었는데, 구분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나는 구분점을 찍히지 않은 숫자를 메일 본문에 적어 약 300명이 넘는 실 전체 인원에게 보내고 말았다. 메일을 보냈다고 뿌듯한 얼굴로 사수에게 말하자 사수는 메일을 한번 훑어보자마자 바로 나에게 말했다.


‘메일 회수해’


 영문도 모른 채 부랴부랴 메일을 회수하자 사수는 천 단위 기호부터 추가하기 시작했다. ‘이건 기본이니까 다시는 실수하지 마.’ 항상 자상했던 사수의 그런 단호한 표정은 처음이었다. 그 뒤로는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 엑셀 작업을 할 때도 숫자는 항상 ‘,’가 표시되도록 형식을 변경하여 사용한다. 우리 회사의 경우 50천 원, 345천 원과 같이 구분점 단위 기준으로 한글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은 개별 회사의 스타일에 맞추면 될 것 같다. 어쨌든 결론은 구분점을 잘 찍자이다. 너무나 쉽고 당연한 건이라 길게 당부하기가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나 같이 잘 모르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주절주절 적어보았다.



조사 빼기


 마지막으로는 메일을 쓰거나 보고서를 쓸 때의 팁이다. 나의 사수는 메일을 다 쓰고 나서 백스페이스에 손가락을 올려 메일 전체를 처음부터 읽곤 했다. 읽으면서 없어도 되는 조사나 불필요한 단어들은 가차 없이 제거했다. 메일을 쓰다 보면 상대에게 자세히 설명하고자 하는 마음에 구구절절 문장을 쓰게 된다. 하지만 메일을 읽는 사람은 우리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지 않는다. 바쁜 업무 중간에 새로운 메일이 오면 눈알을 빠르게 굴려 키워드 위주로 메일을 읽게 된다. 이렇다 보니 메일에는 중요한 내용만 담겨있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번 메일을 쓸 때는 빼고도 말이 되는 단어는 다 빼보자. 생각보다 많은 단어를 삭제하더라도 메일의 내용이 그대로임에 놀랄지 모른다. 나는 오늘도 모니터 앞에서 백스페이스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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