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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도토리 Jun 07. 2022

일하는 여자들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일하는 여성이라는 프레임


 한 달 간의 신입사원 연수를 마치고 멘토로 선정된 대리를 따라 팀장에게 인사를 간 입사 첫날이었다. 안녕하세요. 윤도토리입니다라는 인사 뒤에 온 말은 비수가 되어 나에게 꽂혔다. 


'여자 뽑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지. 열심히 해봐.'


 옛날에나 저랬지 요새 누가 저렇게 말하냐고? 예전에 비해서는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분명히 많은 회사에서 일하는 여성에 대한 비선호가 남아있다. (일하지 않는 여성에 대해서는 또 그 나름대로의 비선호가 팽배하고 있으니 정말 어쩌란 말이냐 싶기도 하다.) 나에게 저런 말을 투척한 팀장은 그 뒤로도 다양한 방식으로 나를 힘들게 했다. 다른 좋은 동료와 선배들이 아니었다면 팀에서 일하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입사 첫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여성이라는 '저품질'의 꼬리표가 순식간에 달려버렸다. 운이 좋게도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성별로 인한 큰 차별을 받지 않고 지내왔던 나에게는 내 여성이라는 특성이 순식간에 '꼬리표'가 되어버린 것에 적지 않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명확하게 청자의 성별을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여성이라는 성별 안에서 일해온 만큼 회사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여성이라는 프레임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번에는 회사에서 여성으로 일하는 법, 아니 여성으로서 생존하는 법에 대해 조금 더 집중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회사에 몸담고 있다 보니 아직까지도 남성 상사, 남성 임원과 함께 일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다행히도 점점 동료 선배들이 약진해준 덕분에 최근 들어서는 여성 상사 및 여성 동료들과 일할 기회가 늘어났지만 아직까지도 그 비중은 낮은 편이다.


 남성들이 리드하는 기업이 대다수인 국내 기업 구조에서 여성은 어쩔  없이 마이너리티다. 아무리 여성 인권이 좋아지고, 여성 신입사원이 늘어났다고 해서 기존에 뿌리 깊은 남성 위주의 조직문화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이번 신입 공채에 여성과 남성의 비율이 5:5 되었다고 해서   회사는 여성이  하기 좋은 회사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남성들이 주요 요직을 꿰차고 있는 환경에서 올해 신입사원의 성비가 맞춰졌다고 해서 기존의 남성 위주 문화가 단숨에 바뀌기는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아직까지도 담배 타임, 늦게까지 이어지는 회식  노래방 문화, 형님 동생 기반의 사적인 이너서클이 당연시된다. 여자도 담배 피우고 노래방 가서 사회생활할  있지 않냐는 반문에는 사실 답을  말해줘야 하나 싶다. 대한민국에서 담배 피우는 남자와 담배 피우는 여자에 대한 시선이 동일해졌을 , 술에 취해 자행되는 크고 작은 성추행 등이 없어지는 그런 날이  때까지는 그런 질문은 접어두길 바란다.



 그러므로 당장은 남성이 만들어놓은 회사 문화에 발을 담근 채 소심한 노력을 해나갈 수밖에 없다. 마이너리티로서 가장 피곤한 점은 무엇을 하든 언제나 몸가짐을 주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이너리티에게 평가는 항상 가혹하며, 특히 그 마이너리티의 대상이 여성일 경우에 그 강도는 심해진다. 회사에서 살갑게 대하면 발랑 까졌다, 차갑게 대하면 다가가기 힘들어서 같이 일을 못 하겠다는 평을 듣는다. 칼퇴근을 하면 여자는 저래서 안 된다는 평을 듣고 야근을 하면 역시 기가 세서 욕심도 많다고 이야기한다. 회의에서 의견을 강하게 이야기하면 드세다고 하고, 의견을 내세우지 않으면 소극적이라고 한다. 회식에 열심히 참여하면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고 회식을 꺼리면 이기적인 사람이다. 오래 근속한 직원은 독하다고 평가하고 일찍 퇴사하는 직원은 책임감이 없다고 한다. 기혼 직원은 가정에 무심하다는 평을 비혼 직원은 독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양극단의 평가 잣대에서 여성은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해야만 한다. 그 중간 정도로 처신을 잘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동일한 상황에서 남녀가 겪는 시선을 비교해보자. 회사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소위 기 세고 독한 여성 직원을 만나왔는가?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기 세고 독하다고 평가받는 남성 직원을 만난 적이 없다. 대부분 그들은 열정이 있는 워커홀릭이라 불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반례를 경험하더라도 마이너리티에 속하는 대상이 잘못을 저지르면 ‘음 거봐 그럴 줄 알았어~.’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닮고 싶은 능력 있는 동료나 상사를 만나온 만큼, 아 저건 좀 심한데… 싶은 평균 이하의 구성원들도 꽤 만났다. 성별은 여성인 경우도 있었고 남성인 경우도 있었다. 직원 비율상 남성인 경우가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남성이 저성과를 낸다면 ‘쟤는 안 되겠네.’로 끝나지만 여성일 일을 못 하면 ‘여자는 저렇다니까.’라는 프레임에 갇혀버리게 된다. 개인이 잘 짜인 프레임을 깨고 나오기는 정말 어렵다.


 이 말은 결국 우리의 목표인 평균 정도로 일하기가 여성에게는 더 험난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남성의 경우 어느 정도 집단 내에서 묻혀서 지내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 물론 심하게 깽판을 치거나, 개인의 능력이 철저하게 떨어지는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겠지만, 무난하게 일하는 직원이 무난한 평가를 받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다. 망치지만 않으면 평균 속에 숨어서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은 평균과 조금만 멀어지더라도 곧바로 화살이 날아온다. 그리고 그 화살은 개인을 넘어 여성 전체에게 꽂히게 된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어떻게든 평균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눈에 띄지 않고 무탈하게 회사에 다닐 수 있다. 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달릴 게 안 달렸다고 몇 배의 노력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억울해서 그러긴 싫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씨줄과 날줄


 나처럼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드물다. 사람 많은 환경을 극도로 싫어해 한 번도 대형 콘서트나 축제를 자발적으로 간 적이 없다. 회사에서도 사실 혼자 있는 게 편하다. 가끔 팀 동료들의 개인 일정이 겹쳐 혼자 점심을 먹을 기회가 생기면 오랜만에 느끼는 낯선 자유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각자도생은 위험부담이 크다. 일을 잘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일을 시킨 의도와 목적을 파악한 후에 그에 맞게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다. 큰 그림을 보고 내가 맡은 업무의 씨줄과 날줄 모두를 파악하면 자연스레 업무의 깊이가 생기게 된다. A라는 업무를 맡았다고 생각해보자. A라는 업무에 대해서 깊게 파악하는 행위는 업무의 날줄을 만드는 일이다. 여기에 덧붙여 A라는 업무가 어떤 큰 맥락에서 도출되었는지, 이와 관련해서 옆 팀, 옆 실, 옆 본부는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지, 내가 맡은 A라는 업무는 그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업무의 씨줄을 만드는 것과 같다. 임원은 그런 큰 씨줄 날줄 모두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들은 큰 그림을 보기에 매우 유리할 수밖에 없다. 매일매일 여러 팀들이 정리된 보고서를 갖다 바치니 말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우리는 조직에서 전체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을 시키는 임원은 우리에게도 그런 배경을 가지고 일할 것을 무의식 중에 요구한다. 팀장급쯤 되면 이런저런 회의에 불려 들어가 옆 팀에서 진행하는 일이라든지, 다른 실에서 요사이 추진하고자 하는 업무에 대해서 어느 정도 돌아가는 형국은 파악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일개 직원인 나에게까지 그러한 고급 정보들이 떨어질 리 없다. 슬픈 현실이다.


 정보의 공유라는 부분에 있어서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불리한 측면이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담배 타임, 퇴근  술자리는 남성 위주로 돌아가곤 한다. 또한 대부분의 임원과 조직장이 남성이다 보니 대부분의 고급 정보들은 남성 직원으로 흘러 들어갈 확률이 높다. 나는  정보를 얻기 위해 담배를 배우거나 원치 않는 술자리를 자발적으로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라는 곳이 내가 원하는 일만 골라서   있는 곳은 아니라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은 최대한 최소화하고 싶다. 나는 대신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담배 타임과 노래방을 대체하기 위한 소소한 모임 아닌 모임을 만들기로 했다. 우리는 가끔 점심을 먹거나 커피를 마신다. 두어 달  번은 칼퇴를 하고 회사 인근에서 부담 없이 짧은 저녁식사를 하기도 한다.  정도는 혼자를 좋아하는 나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았다. 사실 여성모임을 부담스러워하는 여성도 많다.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여성이 아직까지는   개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럴 뿐이다. 그런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까지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다. 여성 모임에 대한 반응 또한 다양하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핀잔을 남기는 이들도 나에게 공감을 해주는 이들도 있다. 공감을 해주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과 함께 시작하면 된다. 연대의 필요성에 공감을 해주는 사람들끼리 모여 심플하게  한 끼 먹는 것이면 충분하다.  대단한 업무정보의 공유가 없어도 좋다. 최근에 하고 있는 업무, 주워들은 인사이동 소식, 후배를 맞이한 고충, 새로  임원의 업무 스타일, 회사의 가십까지... 소소한 정보가 씨줄과 날줄로 얽혀 나에게  자산이 된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입니다.


 이 부분은 이 글의 핵심 주제와 닮아있는 부분이다. 회사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회사를 무기력하게 다니라는 뜻은 아니다. 생각보다 회사에 전력을 쏟지 않아도 회사에서 무탈하게 인정받을 수 있으니 너무 쫄지 말라는 의도를 담은 것인데 내 뜻이 잘 전달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예전의 나도 그랬지만 아직도 일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업무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항상 자기 검열을 해야 하는 그런 사회구조에서 성장해온 탓일 수 있겠다. 내가 이 월급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고, 일머리도 없는 것 같고 회사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불안한 마음이 들 때도 많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기를. 회사는 나의 시간에 대해 돈을 지불한 것이고 내가 아침에 회사에 도착하여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기본적인 도리는 다한 것이다. 그리고 일머리 걱정은 더더욱 할 필요가 없다. 일머리가 정말 없는 사람은 이런 글을 검색해서 읽어보지도 않는다. 일머리가 정말 없다면 일머리가 없다는 사실조차 알 수가 없다. 내가 일을 못하는 것 같은데…라고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일을 그렇게 못하지 않는다는 것, 혹은 개선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내 역량이 부족한 것 같고 나를 자책하게 된다는 것은 내 결과물에 대해서 내 나름의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책임감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세상에는 물론 일을 못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내가 거기에 해당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지 말자. 생각보다 나는 일을 이미 잘하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대답은 열심히 


 가장 쉬운 방법이다. 상사가 특정 업무를 지시하였을  바로 업무를 인식했다는 신호를 보내자. 특히 업무를 메일로 시켰을  이런 피드백을 잊기가 쉽다. 메일을 읽은 것으로 피드백을 완성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읽었다는 행위는 소통이 결핍된 나만의 개인적인 행위이다. 메일로  요청사항에는 ‘ 알겠습니다’라는 간단한 답장이라도 바로 보내도록 하자. 응답을 했다면 다음으로 남은 일은 납기에 맞추어 일을 하는 것이다. 누차 말하지만 일을 잘하는 방법은 나도  모른다. 강산이   변하고  번째로 변해가는 동안 일을 해왔지만, 아직도 일을 잘하는 방법은 모르겠다. 일을 잘한다는 것에는 주관적인 요소가 많이 반영되어있으니 굳이 일을 잘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으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도 일을 마무리해서 납기를 지키자는 것이다. 응답을 하고 납기를 지키면  이상은 성공한 것이다. 굳이 최고의 결과물을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  보고서가 우연히 정답에 가까웠다면 운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다시 피드백을 받고 수정을 하면 된다. 일을 받으면 확인을 하고, 납기를 지키자. 고작  정도냐라고 하지만  정도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에겐 감사한 일이다.




 이 정도만 하면 어디 가서 저 사람이랑 일 못하겠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역량에 따라 일 잘하는 사람으로 브랜딩도 가능하며, 만일 업무 능력이 객관적으로 조금 떨어지는 사람이라도 회사의 골칫덩이 취급은 받지 않을 것이다. 우선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여기서 조금의 에너지가 능력치가 남았다면 플러스알파의 노력을 하면 된다. 야근을 하거나, 상사와 개인적인 연대를 강화하거나, 발표 기회를 많이 만들거나 하는 것은 부가적인 노력들이다. 하면 참 좋겠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다. 나도 개인적으로 나의 업무 스타일 중에 아쉬운 부분이 있어서 올해 들어 이를 고쳐보려고 하고 있다. 아직 효과가 신통치 않아 좌절 중이기는 하지만, 급하지 않으니 아주 천천히 도전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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