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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도토리 Jul 14. 2022

회사에서의 (사적인) 인간관계

혼자 있고 싶습니다.


 사실 회사에서 적당히 지내기엔 혼자인 편이 편한 것 같다. 조용히 출근해서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혼자 점심을 먹은 뒤 오후 근무를 마치고 조용히 가방을 싸서 퇴근하는 삶, 제법 단조롭지만 참으로 평화롭다. 추가적인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감 없이 보내는 하루는 얼마나 이상적인가. 하지만 이러한 평화는 회사도 평화로운 상태여야 한다는 불가능한 가정을 전제로 할 때 지속 가능하다. 조용히 일만 하고 싶은 나를 가만두지 않고 이리저리 흔들어놓는 회사라는 존재 때문에 우리는 굳이 불필요한 애를 써가며 나의 헛헛한 마음을 공유할 이를 찾아 헤맨다. 때로는 나의 힘듦을 이해하고 함께 욕해주는 누군가가 있는 것만으로 너무나 힘든 일이 적당히 짜증 나는 일 정도로 바뀌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짜증 날 일이 많은 회사생활에서 나의 힘듦을 이해하고 공감해 줄 존재가 있다면 매일 아침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몇 그람 정도 가벼워질 것 같다.



  동료가 돼라


 힘듦을 공유할 적당할 동료를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선 사교성 부족이라는 (다분히 개인적인) 첫 번째 허들이 있다. 팀 자체가 조용하고 개인적인 분위기라면 나의 부족한 사교 능력으로는 속내를 털어놓기는커녕 간단히 차 한잔할 동료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어찌어찌 사람들과 어느 정도 말을 트기 시작했다 해도 두 번째 허들이 남아있다. 나의 일상을 공유할 상대를 고르자면 기본적으로 상호 간 어느 수준의 호감을 전제로 한 교감이 필요하다. 아무리 회사라는 매우 거대한 공통점을 가진 사이라 하더라도 일정 부분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생활 성향이 유사해야만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정말 운이 좋게 말이 통한다 싶은 동료를 만나더라도 마지막 허들이 남아있다. 내가 한 말이 순식간에 회사 전체에 퍼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상대가 무거운 입을 가진 사람임을 확인해야 한다. 회사 친구 사귀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그냥 조용히 혼자 밥 먹고 혼자 힘들어하며 혼자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또 하나 간과해서는  되는 문제 하나는 회사에서의 사적인 인간관계는 최대한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마음에 들고 공통점이 많은 상대 같아 보여도 급속도로 다가가서는  된다. 회사는 근본적으로 일을 하는 공간이다. 특히 이동 주기가 매우  특성을  공간이다. 학창 시절 같은 반에서  친구와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어떻게든 빨리  해가 끝나  학년이 되어 반이 바뀌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시간이 흘러 반이 바뀐 후에도 급식실이나 체육관에서 마주치면 종일 마음이 불편하다. 눈이라도 마주친 날에는 황급히 시선을 피해 구석으로 숨어버리고 싶을지 모른다. 문제는 회사에서는 아무도 반을 바꿔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원한다고 팀을 쉽게 바꿀 수도 없고 이직은 더더욱 깊게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다. 누구와 사이가  좋아졌다고 회사를 그만두기에는 회사가 주는 무게감이라는  만만치 않다. 당장 이번  월세도 걱정된다. 많은 이들이 섣부른 사내 연애를 두 손 두발 들고 말리는 이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회사의 어긋난 인간관계는 신발 속의 모래처럼 나를 계속 불편하게 만든다. 괜히 너무 가까워졌다 틀어지는 관계보다는 처음부터 사무적이고 거리를 두는 편이 나아 보인다.




싫음을 공유하는 은밀한 즐거움


 하지만 회사에서 보내온 누적 시간이 늘어날수록 자연스럽게 회사에서의 인간관계도 확장되어간다. 아무리 피하고 싶은 싫은 사람들이 즐비한 회사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확률상 나와 맞는 사람이 한두 명 정도는 생기는 운 좋은 일이 생기곤 한다. 사람이 친해지는 데 중요한 요소는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 같은 것을 싫어하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같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난이도가 높아 보인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공유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다들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좋아하는 책의 글귀를 적거나 하는가 하면, SNS에 느낌이 좋았던 카페라든지 요새 흥미가 생긴 영화나 음악을 전시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무엇인가를 싫어하는 것을 알리는 것은 조심스럽다. 싫어한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전시하는 것이기에 꺼려지기도 하고, 혹여나 이 싫어하는 감정이 나만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주저함이 생기기도 한다. 그렇기에 가끔 어떤 사람과 구체적인 어떤 무엇인가를 함께 싫어한다는 점을 알게 되면, 그리고 그 무엇인가가 구체적이고 희귀한 것일수록 동질감 비슷한 것이 생겨나게 된다. 팬카페보다 안티카페의 활동력이 월등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 보자. 회사에는 싫어할 만한 거리들이 널리고 널렸다. 노다지도 이런 노다지도 없지. 자리에서 손톱을 깎는 A과장, 말할 때마다 트림을 하는 B차장, 한번 이야기하면 말을 끝내지 않는 C팀장. 나에게 소소하고 지속적으로 화를 가져다주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몇 년째 물가상승률을 밑도는 연봉 인상, 점점 초라해져 가는 회사의 복지, 미래가 없어 보이는 회사의 사업. 회사 자체에 대한 불만도 하나 둘 커져만 간다.


 회사의 비중을 내 삶에서 줄이고 줄여보려 노력하지만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다 보면 회사에서 발생하는 일이 나의 일상을 초 단위로 잠식해버린다. 결국 나의 일상이 회사에서의 나의 일상이 되어버린다. 나의 고민이 결국 회사에서의 나의 고민이고, 오늘 내가 짜증 났던 일은 회사에서 내가 짜증 났던 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다 보니 오늘 나의 일상을 회사 밖의 친구에게 공유하자면 이게 참 귀찮은 일이 되어버린다. 내가 어느 날 회사 일로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내가 왜 짜증이 났는지 이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A팀장의 성격, 그리고 A팀장과 B실장과의 관계에 대해 구구절절한 소개와 설명이 필요하다. 일전에 몇 번 이들에 대해 언급을 했었더라도, 친구들도 그들 나름의 삶으로 가득 차 있기에 나의 소소한 일상까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 분명하다. 또 어느 날은 새로 시작하는 C 프로젝트가 과거에 실패한 D 프로젝트와 닮아 불안한 마음을 설명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D 프로젝트가 무엇이었는지 일일이 소개하자니, 위로받기도 전에 설명하다 지쳐버릴 것 같다. 상당히 비효율적이다. 매일매일 안부를 주고받는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도, A가 누구였지? D 프로젝트가 언제 했던 거더라?라고 물어보기가 일쑤다. 이런 질문에 답을 하다 보면 점점 이야기는 산으로 가게 된다. 나의 일상을 공유하며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회사의 지난 프로젝트를 설명하느라 시간이 흘러버린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배경 설명 없이도 대화가 가능한 회사 사람들과의 만남이 편해지곤 한다. 같은 고민을 회사 동료에게 털어놓는다고 생각해보자. 전후 맥락 설명은 필요치 않다.


‘아 C 프로젝트 D꼴 날까 봐 쫄리는데… 내일 B한테 보곤데 A가 말아먹을 듯’


짧은 한마디로 나의 불안함과 현재 C 프로젝트의 위기를 간편히 전달할 수 있다. 최소한의 시간을 투입해 나의 힘들과 불안함을 공유하는 데 성공했다. 내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작지만 소중한 가능성


 회사에서 어느 정도까지 사적인 인간관계를 만들지에 대한 정답은 없다고 본다. 나 역시 회사에서 마음을 터놓는 동료를 만들었다가 관계가 멀어져 괜히 어색한 사이가 된 적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사회에서는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물론 이 말이 사실일지 모른다. 이미 각자의 세계가 단단해진 이들끼리 마음을 털어놓기는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사회에서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고 해서 굳이 친구를 일부러 만들지 않을 필요는 없다. 이는 마치 고등학교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사회적인 통념 때문에 잘 맞지 않는 고등학교 친구와 억지로 인연을 이어가며 대학교 친구에게는 왠지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될 것 같이 행동하는 것과 같다. 알다시피 우리는 호호 할머니가 되어도 새 친구를 만날 수 있다. 어쩌면 70대 혹은 80대에 나의 베스트 프렌드를 만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얼마 전 90이 다 되신 할머니 댁을 방문해 할머니가 은행에서 새로 사귄 친구를 소개받았다. 돈을 찾으러 간 은행에서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다면 회사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험난한 세상에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경험은 너무나 소중하고도 희박하다. 그 경험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회사 동료라는 이유로 벽을 칠 필요는 없다.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회사 동료 대신 좋은 친구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내 고민을 남보다도 더 잘 이해해주는 친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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