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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도토리 Jan 23. 2022

미생과 미생물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와식형 인간


 어느 순간 MBTI라는 알파벳 네 개가 우리의 일상에 한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처음 만난 나에게 MBTI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묻는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마치 어디 사세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같은 기본 신상명세를 묻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는 말투였다. 어떻게 사람을 16가지 종류로 나누냐며 이러한 대세 현상을 세모난 눈으로 바라보던 나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어 준 건, 의심에 가득 차 테스트를 한 뒤 내 타입에 해당되는 주요 성격 설명에 대해 읽던 순간이었다.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음’


 뜨끔하게도 글을 읽는 그 순간 역시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침대에 누워 손가락만 바쁘게 움직여 핸드폰 스크롤만 열심히 내리고 있던 나를 움찔하게 만들다니. MBTI… 너 생각보다 족집게였구나.


 핑계 같지만 내가 하루의 꽤 많은 시간을 누워서 보내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타고난 에너지가 부족한 걸 어쩌랴. 세상에 열정! 열정! 열정! 이 넘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애석하게도 거기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다. 내가 가진 에너지는 회사로의 출근, 8시간 남짓의 회사 업무, 거기에 이어지는 지친 퇴근길까지 거치고 나면 대부분 소진되어 버리고 만다. 물론 다른 직장인들처럼 나도 회사 이외의 시간을 의미 있게 쓰려는 마음은 가득하다. 가끔은 조금 남은 에너지를 긁어 모아 시도를 하기도 한다. 책도 드문드문 읽고, 종일 딱딱하게 굳어버린 어깨를 풀어주기 위해 자기 전 스트레칭도 한다. 전화영어를 신청해보기도 하고, 요즘에는 경제 공부를 하겠다며 주식/부동산 유튜버들의 이런저런 썰을 들으며 주식이 오르기를 기원하는 공부 아닌 공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회사-집’이라는 십 년 넘게 유지되고 있는 견고한 무한 루프를 뚫고 나가 바깥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며 무언가 엄청나게 활동적인 일을 자주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일이 나에게는 퍽 즐겁지 못하다.  나에게 퇴근 이후 회식에 참석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쇼핑을 하는 일들은 큰마음을 먹고 미리 사전에 계획을 한 뒤 전날 푹 쉬면서 사전 준비를 한 다음에야 가능한 정도의 무거움을 가진 일이다. 일만으로도 벅찬 나에게 주체적으로 다양한 사람들과의 술자리를 주도하거나 일주일에 몇 번씩 모임을 갖거나 할 정도의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다. 


 이러니 회사에서도 내 한 몸을 바쳐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의 일상을 영위하는 데 드는 에너지 만으로도 이렇게 피곤한데, 여기서 패기와 열정이 넘치게 일을 하게 된다면 언제 몸져누울지 모른다. 나는 내게 맡겨진 일을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회사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 입장에서 업무와 관련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게 회사의 미래 전략이나 프로젝트의 개선 방안에 대해서 심도 있게 고민할 에너지는 없다. 물론 억지로 쥐어 짜내어 보자면 그럴싸해 보이는 의견이야 한 두 개쯤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만사에 정답이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미 조직에는 여기저기 한 마디씩 보태고 싶어 하는 사람들 너무나 많다. 회의라도 한 번 할라치면 본인이 이 과제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뽐내는 자리인 것 마냥 다들 한 마디씩 입을 대곤 한다. 슬프게도 그들의 입 밖에서 내뱉어진 말의 극히 일부만이 회의에 도움이 될 뿐이다. 결국 의미 없는 회의 시간만 길어지고 만다. 참으로 애석할 따름이다. 이런 환경에서 큰 확신이 없는 한 내가 한마디를 더 해보겠다고 끼어드는 에너지 소모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회사에서는 드러낼 수 없는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내가 고심 끝에 낸 의견이 채택되더라도 내 옆자리 동료의 의견이 채택되는 것과 무엇이 크게 다를까? 나는 그냥 어떻게든 빠르게 결론이 나, 결정된 대로 성실히 일을 마치고 퇴근하고 싶을 뿐이다.



미생과 미생물


 추석 연휴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침대에 누워 의미 없이 핸드폰을 만지던 중 미생이라는 만화를 정주행 하게 되었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유명한 만화이지만, 한 번도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던 터라 남아도는 명절 연휴의 소중하지만 할 일 없는 시간을 낭비하기 위해 첫 화 보기를 클릭하였다. 작품은 물론 좋았다. 순식간에 part1을 다 읽어버렸다. 직장인들의 애환과 신입사원들의 도전과 열정을 엿볼 수 있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작품의 완성도가 아니었다.


 작중 고졸 출신이자, 바둑만 하다 보니 사회생활 경험이 부족한 신규 입사자로 그려지는 장그래와 그를 비롯한 다른 신입사원들의 역량과 열정이 나와 너무나도 비교가 되었던 것이다.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미생이라고 하면 현실의 직장 생활을 실감 나게 그려내 호평을 받은 작품이 아니었던가? 이게 현실이라고? 정말로 세상에 저렇게 일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물론 어느 정도의 만화적인 설정이 가미되었음은 분명하다. 아무리 대형 종합상사의 영업부서더라도 신입이 큰 계약 건에 깊게 관여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열정’이라는 부분만 한정해서 보더라도 나의 완패였다. 나는 저런 열정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신입사원 때를 되돌려보아도 내게 그만한 열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 같다. 만일 작품 중에서 상대적으로 기본기가 가장 낮은 것으로 설정된 장그래와 직장생활 12년 차인 내가 경쟁을 한다면? 두말할 것 없이 나의 완패일 것이다. 아찔하다. 장그래가 미생이라면 나는 미생물이다.




 열정과 헌신, 그리고 희생에 대해 큰 가치를 부여하는 대한민국의 기업 환경에서,  회사의 발전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그러고 싶지도 않다. 회사는 그들이 있기에 좋은 쪽으로든 그 반대 경우이든 어느 방향으로든 변화한다. 때로는 나 자신도 왜 나는 그들처럼 일하지 못하는 건지, 왜 그들과 같은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는지 아직도 가끔씩 자책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한다. 하지만 관점을 바꾸어보면 어떨까? 장그래의 일 할도 채 안 되는 열정과 역량을 가지고도 회사에서 벌써 십여 년간 꾸역꾸역 일을 해오고 있다. 누군가는 말을 잘하는 능력이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운동을 잘할지 모른다. 나는? 나는 별 능력 없이 회사에 오래 잘 붙어있는 중이다.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지.


‘어후 윤 과장 일 잘하지~’라는 칭찬까지는 듣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너랑은 일 못 하겠다’라는 욕은 얻어먹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최소투입으로 최대는 아니지만 적당한 효율을 산출해 냈다는 점에서 나름 성공한 회사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 아닐까? 어딘가 이 정도의 삶을 원하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혹은 회사 생활이 겁나고 두려운 사회초년생이나 취업준비생은 입사 후에 이 정도의 회사생활이라도 할 수 있을지 두렵고 겁이 날지도 모른다.


모두가 장그래와 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안영이 (장그래의 입사 동기, 작 중 능력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그려짐) 같은 능력치를 가지기는 더더욱 어렵다. 만일 내게 그러한 열정과 능력이 있다 해도 나는 그 에너지를 회사에 쏟고 싶지는 않다. 감사히도 나에게 적당한 돈을 매월 꾸준히 제공해주는 소중한 회사이지만, 지금보다 추가적인 에너지를 투입할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여분의 열정이 있다면, 나는 그 열정을 내 삶의 다른 부분을 위해서 투자하고 싶다. 그것이 나에게 장기적으로 더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경제 사회에서 타고난 재능이나 보유한 자본이 없다면,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노동 수익에 의존해야 한다. 일부 전문직 혹은 프리랜서가 아닌 이상 당신도 나도 회사에 다녀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사가 싫고 일을 하기 싫은 사람일수록 더더욱 회사를 다녀야 한다. 회사라는 안전망이 없는 곳에서 명확한 비전 없이 지금만큼의 수익을 내자면 더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회사에서 큰 열정 없이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을까?


여기서 최대한의 효율이라 함은,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는 방법은 아니다. 그런 방법은 나도 모른다. 알면 이미 회사에서 승승장구를 하며 고액의 연봉을 받아가고 있을 것이다. 다만 회사 생활을 무서워하지 않고, 조직에서 하위 20%에 포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나의 경험이 담긴 이야기는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쪼록 이 글들이 회사 생활이 걱정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열정이 넘치는 이들이여 더 열심히 일하라! 우리가 뒤를 열심히 따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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