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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도토리 Jan 26. 2022

조용히 일만 하면 안 되나요?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청춘 회고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 나도 모르는 채 마음속에 새겨진 대학 입학이라는 보편적이고 피상적인 목표가 달성된 후에는 그렇다 할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 참 속 편하고 대책 없는 청춘을 보낸 것 같다. 어찌 보면 청춘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청춘’ 시절에만 할 수 있는 열정 가득한 이벤트 없이 하루하루 시간을 소비하면서 흘려보냈었다. 이따금 막연히 ‘아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라는 특정 상태에 대한 갈망은 있었지만,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다.’ 라거나, ‘이 세상에 어떠한 가치를 창출해 내고 싶다.’ 혹은 ‘어떠한 방식으로 자아실현을 하고 싶은가.’ 등의 인생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기회는 물론 그러고자 하는 욕구도 부족했다.


 한 반에 40명씩 그득그득 학생들을 모아 놓고 시험에 자주 나오는 문제를 달달 외우라 시켰던 공교육의 책임인가 싶기도 하다가, 똑같은 콩나물시루 속에서 교육을 받고도 나와 너무나 다른 아웃풋을 창출해내는 현대사회의 위인들을 보면 여지없는 나 개인의 자질 부족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뭐 어쨌든 사회가 차곡차곡 만들어 놓은 트랙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끈을 놓지 않고 발맞추어 따라갔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초중고 시절을 거쳐 수능을 보고 대학에 입학하고 수업을 듣고 졸업을 했다. 이력서에 넣기 위한 이런저런 봉사활동도 해보고 멋모르는 인턴 시절도 겪었다. 그러고 나니 드디어 따박따박 밀리지 않고 나오는 월급을 주는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것 같았다. 하염없이 늘어지고 싶어 하는 본성을 누르며 십여 년 간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서 입사했으니 그걸로 됐다는 생각 했었다. 최대한 몸을 사린 채 긴 기간 동안 월급을 수령하고자 하려는 요량이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참으로 대책 없었던 사회 초년생의 마인드셋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회사라는 곳은 입사한 것만으로 전부가 아니었다. 회사라는 곳이 ‘난 열정이 부족하니 몸을 사리면서 조용히 다니고 싶어요.’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렇게 두는 만만하고 자비로운 곳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눈이 반짝반짝한 입사 동기들과의 경쟁, 팀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 예상치 못한 인사발령, 나와 맞지 않는 신규 업무, 대하기 힘든 상사... 조용히 현상 유지를 하며 회사에 적을 두고 있는 일 자체만으로도 기가 빨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세상 물정 모르던 신입사원의 생각과는 다르게, 회사는 현상 유지만으로는 장기간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었다.


회사는 참지 않아


 우선 예상치 못한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입사하고 보니 내가 재직하는 회사의 근속연수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이런 부분까지 고려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입사한 나의 불찰이었다. 공무원 혹은 공기업다운 근속연수 까진 아니어도 얼추 50대 초~중반까지는 다닐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철없는 예측과는 달리 나의 회사는 나이 든 사람들을 꺼리는 회사였다. 요즘에야 많은 회사가 그렇겠지만 이곳의 시계는 보다 더 빠르게 흘러갔다. 특히 차장급 이상 (보통 40대 초반 이후) 중 그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않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인사팀은 암암리에 퇴사를 종용했다. (여기에서 ‘성과’란 묵묵히 본인에게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것 그 이상을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봉투를 받았다’라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이 되면 인사팀이 대상자를 선정해 위로금 조의 금액을 제시하며 퇴사를 권유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유 없는 강제 해고는 불가하기 때문에, 제안을 거절하여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 순간 회사로부터 잉여인력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채 저 멀리 구석진 자리로 보내지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의 구석진 자리다. 때로는 팀장이었던 사람을 자기가 이끌던 팀의 팀원으로 강등시키기도 하였으며, 본인의 주 생활지와 한 참 떨어진 곳으로의 지점 발령도 공공연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지속적으로 봉투를 거부한 채 투쟁을 하여 윗선에 밉보인 한 직원은 KTX가 다니지 않는 아주 한적한 지역으로 발령을 내라는 매우 구체적인 지시를 받기도 했다. 회사가 무서운 곳이라는 건 걱정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의 무서움은 철없었던 내가 비슷하게도 예측하지 못한 모습들이었다.


소비의 증가


 또 하나 예상하지 못했던 점은 사원~대리 수준으로의 월급으로는 점점 생활이 어려워진다는 점이었다. 입사 초반 대학생의 소소한 소비 습관이 남아있던 시절에는 처음으로 꼬박꼬박 받아보는 몇백 단위의 월급이 차고 넘치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물가는 올라가고 소비하는 품목의 종류는 다양해진다. 사회생활 1년 차에 소비한 목록을 찾아보면 지금과는 꽤 다른 품목과 가격에 놀랄 것이다. 대학생 티를 벗어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소소하고 귀여운 카드 명세서가 그립기도 하다. 왜 이렇게 씀씀이가 커져 버린 것일까? 높아진 물가로 기본비용이 증가한 것도 있지만 나의 경우는 그보다 소비하는 물건의 수와 퀄리티가 달라졌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기 때문에 운동은 이제 나에게 필수가 되었다. 그에 따른 수강료, 의복비 등이 추가되었다. 예전에는 비타민도 제대로 안 챙겨 먹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이름 모를 영어가 잔뜩 붙은 영양제도 누가 좋다고 하면 덜컥 사고 본다. 옷도 예전에는 지하상가에서 파는 옷들도 잘 입고 다녔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런 옷들에 대한 소화력이 왜인지 모르게 떨어져 간다. 매번 백화점에서 옷을 사지는 못하더라도, 겨울옷은 아웃렛이나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구매하기 시작했다. 구독하는 ott서비스들은 하나둘 늘어난다. 보고 싶은 콘텐츠는 많은데 제공하는 플랫폼은 제각각이다. 프렌즈를 보기 위해서 넷플릭스를, 마블 시리즈는 디즈니 플러스, 영화는 왓챠가 많아서 보기 편하다. 유튜브도 프리미엄이란 게 생겼다. 한번 경험하고 나니 광고를 보기가 싫어진다. 점점 독해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 밀리의 서재도 구독한다. 회사에서 정체되면 안 될 것 같아 학원도 결제한다. 퇴근하고 학원에 가기는 힘들 것 같으니 전화 영어 정도로 대충 타협을 한다. 게다가 어느새 회사에서의 모임에서도 꽤 연장자가 되어버려 밥을 먹고 나면 지갑을 활짝 열어야 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분명 몇 만 원짜리 결제들이었는데 합쳐보면 백만 원을 훌쩍 넘어 버린다. 크게 아픈 곳은 아직 없지만, 자잘한 신체적 불편함에 건강염려증이 더해져 병원비도 조금씩 쌓여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소비의 유지를 위해 회사에서 받아야 하는 돈은 늘어나야만 한다. 회사가 제공하는 매년 물가 상승률보다도 낮은 연봉 인상률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한 회사에 꾸준히 다니면서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만족스럽게 증가하는 임금을 취득하기는 참 어렵다. 결국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눈에 띄게 더 좋은 직장으로 점프 업해서 몸값을 늘리거나, 전문직으로 전향을 하거나, 투자 수익을 올리는 방법 등이 있을 것이다. 앞의 두 가지를 하기엔 에너지가 모자랐고 마지막 방법은 실패했다. 결국 내가 선택한 답은 내가 가진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나를 받아준 회사에서 버티면서 따박따박 승진을 해가며 가능한 최대한의 돈을 받아 가야는 것이다. 결국 이게 문제다. 욕망도 없고 야망도 없지만, 자존심만은 남아있다. 승진 못 하고 일 못 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해서는 회사에서 최대 수익을 뽑아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 최대한의 아웃풋을 뽑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최대한의 아웃풋은 요즘 심심찮게 등장하는 80년대생 임원이 되거나, 조직에서 일 잘하는 사람을 꼽자면 다섯 손가락에 드는 전도유망한 인재가 되는 방법이 아니다. 나의 목표는 적당한 조직 안에서 크게 칭찬받지도 크게 욕먹지도 않고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히 승진할 정도의 능력을 보유하는 것이다. 그것도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서 말이다. 최소한의 노력을 들인 뒤 남은 에너지로 나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도 보고, 책도 보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해야 한다. 회사에 전력을 쏟기에는 나의 열정과 에너지가 너무나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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