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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도토리 Feb 02. 2022

출근을 위한 자기 합리화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지속 가능한 출근


 지속 가능한 경영이 대세인 것 같다. ESG 관련 주들이 차트의 상위로 올라오기도 하고, 친환경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기업들도 어떻게든 ESG 추세에 한쪽 발가락이라도 담그고자 용을 쓰고 있다. 회사들이 이렇게 지속 가능한 경영을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이 순간, 나도 나 나름대로 지속 가능한 근무를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매일 아침 회사로 발을 뗄 원동력을 만들어 내기 위해 회사가 가져다주는 장점을 쥐어 짜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찾아낸 나만의 지속 가능한 출근법이라고나 할까?


 회사를 그만둘까 하는 고민이 정점을 찍었을 때 누군가 해준 이야기가 있다.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시점은 회사가 너무 싫을 때가 아니라 도저히 그 회사에서 얻을 것이 없어지는 시점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회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기로 했다. 맘에 안 드는 날이 더 많은 내 회사의 장점을 어떻게든 찾아내어야 한다니, 못생기고 능력 없는 애인의 장점을 어떻게든 찾아내어 콩깍지를 눈에 스스로 박아 넣는 자기 파괴적인 연애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어쩌겠는가. 나의 정신 건강이 더 중요하니 오늘 아침도 나는 출근길 무거운 발걸음을 떼기 위해 나를 위한 자기 합리화를 시작한다.



루틴의 중요성


 이제야 고백하지만 스스로 회사생활이 잘 맞는 타입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다시 말해야겠다. 회사생활을 하는 것이 나에게 도움을 주는 편이라 생각한다. 이는 회사생활이 잘 맞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 회사라는 공간에서 다채롭게 시달리고 고달파하더라도 회사생활을 하는 나와 하지 않는 나를 비교해보았을 때 전자가 여러 측면에서 바람직한 나의 모습에 가깝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일하기 싫단 얘기를 줄곧 하고 나서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다만, 나는 어쩔 수 없이 회사와 같은 단체생활이 있어야 나의 전반적인 삶의 발란스가 유지되는 사람이다. 무한한 자율성보다는 약간의 강제성 안에서 행복해하며, 제한된 자유 속에서 소소한 만족에 기뻐하는 성향을 가졌다고 볼 수 있겠다. 참으로 소시민적이고 다루기 쉬운 유형 같기도 하다. 나 같은 사람으로 지구가 가득하다면, 아직도 인간은 농경사회에 머물고 있을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 두기가 한창일 때 회사에서 재택 근무율을 70%까지 늘린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보며 아 출근 안 해도 되니 참 좋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일이 많은 시즌이 아니어서 하루에 1~3시간 정도 집중해서 일하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나는 코로나 블루가 아닌 재택근무 블루에 빠지기 시작했다. 집에만 있으니 우선 일과 일상의 구분 자체가 되지 않았다. 아침에 눈곱만 떼고 바로 로그인을 하면 출근이었고,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우면 바로 퇴근이었다. 이것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큰 장점이겠지만, 나에게는 안 그래도 게으른 나를 극단적으로 게으르게 만들기에 최적인 환경이었다. 나는 재택근무의 큰 장점 중 하나인 출퇴근 시간 및 준비시간 절약으로 발생하는 잉여 시간을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출근을 하며 바쁘게 지내는 날에는, 퇴근길에 서점도 들르고, 집에 와서 운동도 하고, 책도 보고 이래저래 나름 무언가를 하면서 살았던 것 같은데 재택근무를 하니 세수라도 제대로 한 날은 선방한 날이었다. 바깥공기를 한 번도 마시지 않은 날이 많아지니 이래저래 답답해지고 점점 업무시간에도 누워만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업무 효율은 바닥을 찍고 출근하는 날이 되어서야 몰아서 부랴부랴 미뤘던 일들을 처리하기 바빴다. 나의 평범한 일상이 사라져 가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침에 일어나 씻고 밖에 나가서 찬 공기를 마시며 출근을 하고 제시간에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집에 돌아오는 이 루틴이 하루의 기준점들을 찍어주는 역할을 해왔나 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주어진 잉여 시간이 적었을 때 내가 활용하는 시간은 길어진 것이다. 물론 아직도 가끔 눈알이 빠지게 야근을 하는 날에는 ‘하 출근 안 하면 안 되나’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회사를 다녀야만 제대로 인간 구실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슬프게도 나는 로또가 되더라도 어딘가에 적을 두고 아침마다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회사는 안 다니는 게 더 행복할 것 같다고? 어디까지나 지속 가능한 출근을 위한 나의 자기 합리화임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강제력 있는 사회생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완전히 혼자 생활할 수는 없다. 최근 읽은 소설에서 1인 우주선에 갇혀 꽤 긴 시간을 혼자 보내게 된 사람의 입장에서 서술된 장면을 읽은 적이 있었다. 우리는 집에 혼자 있더라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전기가 들어오고, 수도에서는 물이 나오고, 가스가 켜지고, 누군가가 쓰레기를 치워주고. 우주선과 같이 극단적으로 고립된 공간에서야 우리는 진정 혼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우리는 혼자 있더라도 항상 누군가와 함께한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사람들과 부대끼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출근을 한다는 것은 다양한 타인들과 소통할 기회의 장에 뛰어드는 것이다.


 예전에 어떤 시험을 준비해보겠다고 학교를 휴학하고 1년여간 신림동 고시촌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가 없어서 혼자 학원을 다니고 혼자 밥을 먹었다. 친구들과의 연락도 자제한 채 1년이 지나고 나니 뭔가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간단한 대화도 매끄럽게 이어가지 못했고, 대화에서 그 상황에 적합한 리액션을 고르기도 어려웠다. 나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 별것 아닌 사회이슈에 과도하게 분노를 하기도 했다. 단 1년의 고립생활(따지고 보면 엄청난 고립 생활도 아닌)을 하고 나니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이 현격히 줄어든 것이다. 다행히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이상 증세는 금세 사라졌다. 나도 혼자 있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외로움도 잘 느끼지 않는 편이다. 혼자 카페에 가거나 밥을 먹는 일은 전혀 꺼려지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주말 중 하루는 집에서 쉬어야 하며, 정말 좋아하는 친구들과의 약속도 연달아 잡히면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빠지는 편이다. 하지만 사회 속에서 살아가려면 어쨌든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사람들과 얽혀 지내는 일이 누구나에게 쉽지만은 않다. 어떤 이에게는 지속적인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 같은 류의 사람들은 타인을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대화도 나누고 세상 돌아가는 일도 들어야 나만의 세계에 과하게 빠지지 않을 수 있다. 회사에서 몇 분의 커피타임을 통해 요즘 관심사들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시시콜콜한 드라마 이야기도 하는 시간들이 쌓여 나를 사회적 동물로 완성하는 것이다. 회사가 없어도 적극적으로 외부와 소통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회사에서의 강제적 혹은 자율적 대화가 사회생활의 좋은 연습이 되어준다.





 사실 맨 첫 번째 항목으로 넣고 싶었지만, 너무 뻔한 이야기라 살짝 뒤로 숨겨보았다. 더 이야기할 것 없이 우리가 회사를 나가는 주 원동력은 돈이다. 하지만 요즘과 같이 노동 수익에 대한 가치가 떨어지는 시대에서는 매달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이 가치가 점점 작게만 느껴지는 것 같다. 물론 월급을 천만 원씩 받으면 이런 생각 자체가 들지 않겠지. 매일 6시 출근도 군말 않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선 현실로 돌아와 이렇게 생각해보자. 내가 예전에 회사 그만두고 대학원을 갈까요? 하고 한 회사 선배에게 상담했을 때 그가 나에게 해준 설명이 있었다. (일전에 나에게 결혼을 하면 회사생활이 힘들지 않다고 설명했던 그 선배다). 내가 월급으로 매달 300만 원을 받는다고 가정을 해보자. 내가 매달 300만 원, 연간 3,600만 원을 벌기 위해서는 얼마의 자본금이 있어야 할까? 투자능력이 있는 사람이야 돈 몇십만 원으로도 몇천만 원을 만들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경우를 가정해보자. 연 3%의 이자를 주는 안전 상품을 찾았다고 생각했을 때 대략 14억이라는 현금이 있어야 1년 뒤 대략 3,600만 원의 수익을 받아낼 수 있다. 내가 회사에 다님으로써 월 300만 원을 번다고 생각하면서 다닐 수도 있겠으나, 관점을 달리해 내가 이 회사를 다님으로써 14억이라는 현금을 가진 만큼의 효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산가가 되어버린 나라니 이야말로 자기 합리화의 끝이라고 보이겠지만, 그만큼 정기적인 노동 수익의 가치를 말해준다고도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노동 수익은 끊임없는 자산 증식의 수단이다. 과거에 일확천금을 꿈꾸며 코인에 투자했던 나는 차 한 대 값을 벌었다 고스란히 날리기도 했었다. 아직 마음고생이 부족했던 것인지 나는 아직도 주식에 적지 않은 돈이 물려있으면서도 더 큰 한 방을 노리며 자본시장을 끊임없이 기웃거리고 있다. 하지만 내 예상보다 기웃거림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나의 노동능력일 것이다. 투자에 정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단기투자는 어렵다. 다들 답은 장기 투자라고들 이야기한다. 장기 투자를 위해서는 나의 매달매달 삶을 지탱해 줄 노동 수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물려있는 주식에 오늘도 존버를 외치며 (이것도 장기투자라고 할 수 있을까?) 오늘도 나는 월급을 벌러 회사에 나간다.




작은 성취의 경험


 아주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오늘 해야 했던 업무들이 별 이슈 없이 착착 마무리되거나, 준비한 보고가 예상보다 반응이 좋았던 그런 날. 그런 날에는 퇴근길 쌀쌀한 공기를 마시면서 느껴지는 아주 작은 벅참이 있다. 나는 안다. 나는 내가 오늘 열심히 준비한 이 일이 없어지더라도 이 팀에, 이 회사에, 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없을 거란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순간 무언가 목표했다는 것을 해냈다는 느낌, 그리고 누군가의 인정을 받았다는 기분은 스스로를 대견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물론 외부의 인정이 없이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항상 최대치로 차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우리는 주변인들과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는다. 때로는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서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나는 제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남들이 다들 앞으로 나아가니 나는 뒷걸음질을 치는 것만 같다. 혼자 속이 상해버린다. 작은 일에 혼자 자책하고, 슬퍼하고, 반성한다. 내가 작아진다. 잘 풀린 하루의 작은 성취감은 작아져버린 나에게 괜찮다는 심심한 위로를 전달한다. 나는 위로를 받는다. 작고 소중한 성취의 경험은 하나둘 복리처럼 쌓여 내가 너무나 작아져 사라지지 못하도록 꽉 잡아 줄 것이다. 성취감은 소중하다. 비록 그것이 회사라는 우울한 공간에서 발생한 것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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