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회사, 새로운 조직에서 첫발을 내딛는 일은, 일부의 천부적인 적응력을 타고난 사람들 외에는 굉장히 고된 일이다. 나는 물론 천부적인 적응력을 타고난 일부에 해당하지 않았다. 심지어 낯선 환경에는 태생적으로 거부감이 있는 나였기에 대학 졸업반이 되자 슬금슬금 불안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뚜렷한 꿈이 없으니 나도 곧 회사라는 곳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될 터인데,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컸다.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큰마음을 먹고 대학교 상담소 문을 두드렸다. 지금에서야 여러 심리 상담이 보편화되어있고, 정신과 치료를 바라보는 시각도 예전에 비해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당시만(어느덧 십 년이 훌쩍 넘은) 해도 어렸던 나에게 교내에 있는 간이 상담소라고 하더라도 상담소라는 곳의 문을 스스로 열고 들어간다는 행위는 나의 미숙하고 모자람을 확인받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상담의 정확한 과정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놈의 기억력이란…) 테이블에 앉아 이런저런 설문지를 작성하고 상담사가 결과를 보면서 한 시간 가량 조언을 해주는 프로세스였던 것 같다. 현재 어떤 부분이 고민이냐는 상담사의 말에 나는 ‘회사에 적응을 못 할 것 같아서 고민이에요’ 라 답했다. 상담사는 왜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나는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 나에겐 왜 회사생활이 걱정되는지에 대한 논리적인 답변은 없었다.
그냥. 그냥 불안했다.
회사는 나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집합이라고 생각했고, 나의 성격은 그러한 집합에 어울리기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초중고 대학교까지 이어지는 피곤하지만 예측 가능한 공간을 벗어나 회사라는 정글로 던져지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나는 회사에서 일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동안에는 언제나 교과서가 주어지고 그 교과서를 외우고 문제집을 풀면 시험에 아는 문제들이 나왔다. 학교에서는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이 항상 주어졌다. 대학교 수업도 마찬가지였다. 객관식이 주관식으로 바뀌었을 뿐, 주어진 책을 공부하면 어느 정도의 결과는 보장되어있었다. 시험을 망쳤다면 그것은 시험공부가 부족했던 나의 탓이었다. 그런데 나는 회사에서 일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한 수업도 문제집도 없으니 나는 막막해졌다. 한편으로는 회사라는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부재했던 것이 이런 막연한 불안감을 더욱 부추겼다. 놀랍게도 그 당시 내가 가진 회사 업무의 지식은 건설회사는 건물을 짓고, 은행은 돈을 빌려주고, 광고회사는 광고를 만든다라는 정도의 초등학교 직업탐험 수준의 지식뿐이었다. 그럴싸한 사회생활 경험이 없었던 탓일 수도 미리미리 취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았던 탓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내가 회사를 입사하게 되면 어떤 업무를 맡게 될지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그림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와중에 그나마 회사에 대해 가진 정보라고는 매체에서 다루는 경쟁과 암투가 난무하고 직원들은 밤을 새워 PT를 준비하는 과장된 ‘회사’의 이미지뿐이었다.
이러니 내가 불안감을 느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어떻게 보면 그냥 불안했다는 것이 맞는 답이었을 수도 있겠다. 상담 결과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테스트 결과를 설명해주며 걱정하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평소의 성격대로라면 찾아갈 생각도 못 할 상담소 문을 내 손으로 열 정도로 고민했던 과거의 내가 안쓰럽긴 하지만, 내가 과거의 나에게 조언을 한다면 그때의 그 상담사와 똑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걱정하지 말라.
처음 입사했을 때를 돌이켜 보면, 안 그래도 유약한 나에게 회사는 컴컴한 방에 혼자 떨어진 것만 같은 경험이었다. 낯선 곳에 처음 떨어지면 반투명한 시트가 공간을 한 꺼풀 덮은 느낌이 들곤 한다. 사람들의 얼굴도 낯설어 좀 전에 말을 건 사람이 이 사람인지 저 사람인지도 헷갈리고,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낯선 용어들과 업무 환경으로 인해 무서운 이곳을 떠나 안전한 나의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들 수밖에 없다. 적게는 수 명, 많게는 수 십 명의 새로운 조직원들의 성향을 파악해야 하며 조직장은 어떤 스타일의 리더 인지도 가늠해야 한다. 신규 입사자 거나 새로운 업종으로 전환한 사람이라면 낯선 업무에 땀을 흘릴 것이며, 경력을 살려 이직을 한 경우에도 회사마다 사용하는 용어, 시스템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처음은 누구나 막막하다. 누구도 입사 전에, 회사에 대해서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심지어 내부 지인을 통해 미리 설명을 듣고 입사한 경우에도 제삼자를 통해 들은 정보와 내가 실제로 경험한 느낌은 크게 다르기 마련이다. 누구든지 시작은 백지이다. 이전의 업무 경험이 많은 사람은 그 백지상태인 기간이 조금 줄어들 뿐이다.
그러니 성급하게 쫄지는 말자.
최소 한 달, 길게는 3개월 후에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겠다면 그때 가서 슬슬 걱정을 시작하도록 하자. 미리 쫄기에는 우리의 에너지가 아깝다. 정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걱정을 가지고 입사했던 나였지만 실제 현실은 걱정한 만큼 나쁘지 않았다. 물론 한숨이 절로 나는 답답한 나날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생각보다 그런 날들이 길게 이어진 기간도 있었었다. 하지만 걱정만큼은 아니었다. 나에게 화를 내는 상사는 있었지만, 드라마처럼 서류를 집어던지지는 않았다. 사내정치와 라인 타기가 없지는 않았지만, 만화 같은 배신과 술수가 난무하지는 않았다. TV에서 다뤄지듯이 몇십 명의 임원 앞에서 보고하는 일은 사회 초년차에게 흔한 일이 아니었다. 현실은 상상보다 참을 만했다. 누구나 회사에서의 힘든 날들을 겪겠지만 걱정을 한다고 해서 그런 날들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걱정은 나쁜 일이 발생한 뒤로 미루도록 하자.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 비해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주위 사람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것도 잊지 말자. 예외적으로 대단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미 엄청난 곳에서 나라에 보탬이 되는 큰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일부 특수 직군이 아니고서야 지금 회사에서 한 자리씩 맡아 대단해 보이는 이들도 우리와 같이 평범한 교육과정만을 수료하고 온 사람들이다. 대학 시절에 다들 기껏해야 끙끙대며 과제를 제출하고 토익 점수를 올리기 위해 도서관에서 시달리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누군가는 내내 술만 마시고 겨우 딴 학점으로 입사를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실무와 전혀 상관없는 전공으로 학위를 땄을 것이다. 단언컨대 엄청난 경험을 미리 하고 온 사람은 없다.
자신만만하게 입사한 사람이건 회사생활이 너무나 걱정되어 잠 못 이루던 사람이던 어쨌든 회사를 다니면 거의 제로 베이스에서 업무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니 내 역량이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은, 이렇게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 막상 일이 닥치면 그냥저냥 일을 해나간다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회사에서 유명한 또라이 혹은 일못러들은 이러한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우습게도 회사 생활에 대한 걱정을 한다는 자체가 앞으로 회사 생활을 어느 정도 잘 수행할 것이라는 방증이 되곤 한다. 또한 학교 성적이나 입사 시험 성적이 회사에서의 성과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의 성과가 부진했더라도 얼마든지 회사에서는 적당히 욕먹지 않으면서 일을 해나갈 수 있다. 회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며, 우리도 충분히 그 안에 조용히 섞일 수 있다.
회사가 낯설고 무서운 친구들이여 우리 쫄지 말자. 고민은 잠시 접어두고 크게 심호흡을 하자. 근거 없는 불안은 나를 소모시킨다. 내가 기본적으로 지닌 장점과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는 것을 방해한다. 잘나 보이는 저 사람들도 집에 가면 속옷만 입고 소파에 누워서 리모컨을 붙들고 채널을 돌리며 티비를 보다 깜박 잠이 드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도 하는데 우리라고 못할 리 있겠는가? 우선은 쫄지말고 기다려보자. 삼 개월 뒤 회사 사람들의 이름이 더는 헷갈리지 않고, 회의 참석자들의 말들이 하나 둘 이해되기 시작했다면 반은 이미 성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