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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 매니저 Jun 26. 2023

나는 여자를 정말로 모르겠어요

과거가 있는 여자


나는 너를 빤히 본다. 너는 처음 보는 내게 직장에 대한 불만을 마치 오랜 친구에게 하듯이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나는 적절히 맞장구를 치며 때때로 네 말들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직감한다.


‘너를 많이 좋아하게 되겠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다. 너는 연말에 미국으로 가서 직장을 갖는 계획을 갖고 있고, 오래 만난 남자친구와의 이별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남자친구는 너와 같은 직장에 다니고, 너는 곧 있을 그의 친형 결혼식에 간다고 한다. 이처럼 너와의 첫 만남 이후 계속된 연락과 만남에서 듣게 되는 너의 이야기는 종종 내 가슴을 쿡쿡 찔러 아리게 만드는 동시에, 비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확신은 되레 짙어진다. 너를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몇 년에 한 번씩이지만 나는 확신이 들 때가 있고, 그 확신은 틀리지 않는다.


‘낚시 좀 한다는 사람들도 잡기 힘든 게 무늬야. 아직 입질인지 아닌지도 판단 못 하는 놈이 뭘 잡아? 무늬가 쉬워 보여?’


낚싯배에 오르기 전, 오늘은 무늬오징어를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는 내게 T형이 웃기는 놈일세 하는 표정으로 했던 말이다. T형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낚시에 푹 빠져 온갖 낚시 장비는 물론이거니와 낚싯배도 가지고 있는 준전문가였다.


그날, 나는 날개 한쪽이 떨어진 루어로 1kg가 넘는 무늬오징어를 낚아 올렸다.



그때 나는 정말 기뻤지만, 기쁨보다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났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때 T형에게 “거 봐요, 확신이 들었다니까요.”했던 것처럼, 네게 “거 봐, 내가 확신이 든다고 했잖아.”하고 네 손을 꼭 잡고 말하는 순간 역시 일어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현실은, 점점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너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분명 해지는 나와는 다르게 점점 더 혼란스러워한다. 오랜 기간 사람에 대한 감정의 문이 닫혀있다 열린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다. 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나는 내가 기다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고 답한다.



너를 기다리는 중에 나는 오랜 친구를 만난다. 7시간도 넘게 운전해서 시골에서 올라온 날임에도, 나는 친구와 새벽 5시에 마감하는 술집에서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직원의 마감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나온다. 책, 친구, 여행, 가족, 일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는 사랑에 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는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아. 너도 그래?”


친구가 묻자, 나는 새로 알게 된 사람에겐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소설을 네게 보여줬던 것을 떠올리며, 그런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여자는 어떤지 묻는다.


“글쎄. 여자도 똑같은 것 같은데, 여자는 그래도 남자보단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더 쉽게 하는 것 같기도? 그걸 무기로 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이고. 그것보단…”


음, 친구는 좀 더 고민하더니 말을 잇는다. “주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하고, 여성스러워지는 거? 아, 그리고 나 같은 경우는 상대가 싫어하는 걸 아예 안 하게 되더라.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거라도. 뭐 이런 적은 지금 남자친구가 처음이지만.”


나는 친구의 말에 공감하며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라는 퍽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입 밖으로 낸다.


“다시는 이런 감정을 못 느낄 줄 알았는데… 이게 되네.”


스스로의 감정에 놀라는 내게 친구가 묻는다. “야, 너 저번에 만났을 때 기억하냐? 더 이상 사람한테 감정을 못 느끼게 된 것 같다고 했을 때.”


“Y랑 술 마셨을 때?”


“어, 그때. 그때 솔직히 속으로 지랄하네, 생각했거든?” 친구는 맥주 500에 새로를 콸콸 따르느라 하던 말을 잠시 멈춘다. 얼마 전 난생처음 가 본 안양의 어느 술집에서 네가 마시는 새로를 내 잔에 따라 마셨던 기억이 떠오른다. 몇 년 만에 입에 댄 소주는 역시 내겐 너무 써 얼굴을 찌푸렸었다.


“니가 무슨 아픔과 슬픔을 갖고 살아가건, 나이가 몇 살이건, 그딴 거 다 필요 없고 사랑은 갑자기 불쑥 어느 순간 나타나는 거야. 팍! 하고.” 조그만 주먹을 팍! 하고 펼치는 친구를 보며 나는 픽 웃음이 났다.



너는 다시 만난 내게 감당하기 어려운,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입시를 준비하던 고3, 너는 6살 연상의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대학병원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됐고, 그로 인해 몸이 많이 안 좋아짐과 동시에 네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원에서는 따돌림을 당했으며, 그 당시 집에서는 어머니가 바람이 나 안식을 얻을 수 없어, 그저 고향을 벗어나겠다는 간절한 마음 하나만으로 버텼다는 믿지 못 할 이야기.


여기까지만 했어도 나는 어지러움 속을 헤맸을 터인데 너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네가 만났던 그 6살 연상의 남자는 알고 봤더니 만나는 여자친구가 있는 상태였고, 그는 지금 그녀와 결혼까지 했다고. 너는 사람에 대한 상처가 너무 커서 학교 선배들이 있는 대구와 부산으로 갈 수도 있었음에도 어떻게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서울로 가고 싶었다고. 그렇게 악착같이 서울로 올라온 후 너를 다시 찾은, 네가 힘들 때 무관심했던 학원 원장의 전화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붙은 것에 대해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는 거였다고.


새빨개진 눈시울로 사람을 믿고 좋아하던 네가 성격이 바뀌게 된 계기가 이해가 되느냐고, 너는 내게 물었다. 굳이 알지 못 해도 되는 진실은 알고자 하지 않는 나는, 네가 쏟아내는 말들이 많이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런 나를 보며 너는 아직도 부족했는지 이것도 얘기했나?, 라며 손목을 내민다. 나는 고개를 젓고 너는 오래 만난 전 남자친구와 싸울 때 분노를 못 이겨 스스로의 손목을 그은 얘기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러곤 너는 할 얘기를 다 했으며, 선택은 나의 몫이라고 웃음을 지어 보인다.


너는 이런 얘기를 해서 내게 무엇을 얻고 싶은 걸까, 나는 어지러움이 한층 심해진다. 그리고 어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속에서부터 밀려 올려와 토할 것만 같다. 이건 분노일까, 슬픔일까, 충격일까, 두려움일까. 어떤 감정이든 이건 무엇을 향하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을 나는 토해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쁜 소녀의 짓궂음의 칠레 소녀에게, 아를레테 동지에게, 아르누 부인에게 네가 오버랩된다. 나는 마치 충실한 리카르도라도 된 것 같다.


나는 상대의 과거를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상대가 아닌 나는 어떻지? 나의 과거는? 나의 모든 것을 네가 하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을까? 나조차 부끄러운, 심연의 어느 깊은 곳에 묻어둔 모든 것들을 네가 내게 했던 것처럼 꺼내어 털어놓을 수 있을까? 그리고 상대에게 그걸 이해해 주기를 바랄 수 있을까? 나는 절대 그러지 못 할 것이고,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다. 너는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면서 모순적이게도 너의 그 모든 것을 받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간절히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네 두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있는 나보다, 사실 네가 더 사람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이성은 너에게서 조금이라도 빨리 도망쳐야 한다 말하고, 동시에 나의 감정은 너와 평생 잊지 못 할 뜨거운 사랑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너는 내게 있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너의 말들에서 나는 계속해서 모순을 느낀다. 상처 입은 어린아이가 하는 행동 같은 —지금까지 손해를 많이 보면서 관계를 맺어왔기에 이제는 절대 손해를 보지 않겠다며 조금도 지지 않으려는— 너의 태도는 귀엽지만 맞추기 귀찮고 피곤하다. 어떻게 너를 대해야 할지 나는 갈수록 혼란스럽다. 불안하게 이어지는 우리의 관계는 미세한 바람에도 쉽게 끊어질 수 있어 나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점점 너에 대한 마음이 정리된다. 상처가 두려운 나는 언제 너를 잃어도 아무렇지 않을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잘 되면 좋은 거고 아니면 계획했던 내 삶을 살아야지 하는 나른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의 관계가 정말 실낱같다고 생각하며.


그러던 중 어느 날, 너는 갑작스레 네가 왜 좋은지 내게 묻는다.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 “글쎄… 내가 좋아하지 않는 행동을 해도 별로 싫지 않던데.”, 라고 답한다.


그런 후 언제나 그래왔듯 뒤늦게 보다 보다 적절한 말이 떠오른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는 나는 모든 관계가 믿음과 신뢰를 기반으로 쌓아 올려지는 사람이라서 그게 정말 중요한데, 내 감과 경험으로 비춰 볼 때 너는 믿을 수 있을 사람 같아서, 라는 문장.


하지만 네게 전하진 않는다. 너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한 내 판단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너에 대한, 아니 잘 알지도 못 하는 너에 대한 확신을 가진 나에 대한 불신의 싹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



나는 5년여 만의 해외여행을 앞두고 있다. 여행작가인 오랜 친구가 입이 닳도록 최고라고 얘기하던 히피 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설렘 보다 아쉬움과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아직 비행기를 타려면 며칠이 더 지나야 하는데도.


너는, 너도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한다. 떠나고 싶다고, 속초에 ktx가 서는지 내게 묻는다. 나는 없다고 알고 있음에도, 혹시 몰라 인터넷에서 검색을 한 뒤 ktx는 없다고 말해준다. 여행을 고민하는 네게, 고민하는 이유를 묻는다. 너는 같이 갈 사람이 없다는 말과 함께 고등학교 이후로 뚜벅이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고 내게 답한다. 나는 그럼 나랑 가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고, 내심 기대한다. 너는 ‘그건 좀…’하고 ‘ㅋㅋㅋㅋㅋㅋㅋ’ 웃는다.


그 순간 나는 또다시 참담을 맛보며 끓는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다. 나는 잠시동안 뜨겁게 끓어올랐다가 다시 차갑게 식어버렸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으며, 앞으로 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다.


나는 네게 답장을 하지 않고 내 일상으로 돌아온다. 아니 돌아오기 위해 노력한다. 꿈이라고,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는 꿈 속에서 참으로 애썼다고, 그러니 이제 잊고 현실을 살자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여행을 이틀 앞둔 지친 퇴근길에 네 연락을 받는다.


“잘 다녀와”라는 네 글자. 나는 평생 너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며 정말 너를 모르겠다고 답한 뒤, 한참을 더 생각한다.


나는 이미 미련도 후회도 별로 남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다고,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다. 이런 나의 생각을 정리해서 보내자, 너는 미안할 뿐이라고 내게 답한다. 내가 좋아서 한 걸 왜 네가 미안해하는지, 마지막까지도 나는 너의 생각을 조금도 읽지 못 한다.


우리는 애초부터 끼워 맞출 수 없는 조각이었다. 맞지 않는 너트에 볼트를 끼울 순 없다. 애초에 그 짝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위의 문장으로 우리가 지나온 시간의 결과를 이해해보려 애쓴다.


우리는 서로의 안녕을 빌어준다. 잘살아, 네가 내게 남긴 마지막에 말에 나는 답장하지 않고 너와의 대화와 번호를 지운다.



끝맺음을 맺었지만 여행을 와서도 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 한다. 서로를 지우기 전, 너와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고 프사와 배경이 지워진 후 네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나쁜 가능성이 떠오르고, 이제는 남이니 신경 쓰지 말자 다짐하면서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네가 내게 얘기했던 여행 온 나라의 특징적인 무늬가 수 놓인 천이 눈에 밟히고, 요리에 관심이 많은 네가 받으면 기뻐할 현지 소스 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내 마음을 어지럽힌다. 좋은 친구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나는 100퍼센트 순간에 집중하지 못 한다. 이 낯선 곳이 좋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여기에서 먹는 음식이 맛있다고 느낄 때마다, 행복한 웃음으로 순간을 보내는 다양한 커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너와 함께 이곳에 왔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여행의 마지막 날까지도, 나는 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념품이 늘어선 야시장에서 너를 위한 선물에 발걸음이 여러 번 멈추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구매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너를 쉽게 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사랑했을 수도 있었을 한 명의 가능성이자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는 여럿 여인들 중 하나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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