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스트를 동경하다가 육아만 남았다 3

포도를 통해 넓어진 세상

by 오전직업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아이와 둘이 알콩달콩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가 가진 인간관계는 단순해졌다. 단순해지는 듯했다. 회사 생활을 하려면, 저녁에 술도 마시고 일 말고 서로의 사사로운 생활을 좀 공유해야 하는 데 엄마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승진을 하려면, 혹은 좋은 업무를 맡거나 어려운 일을 피하려면, 밥 먹고 술 먹는 와중에 은근슬쩍 얘기를 전달해야 한다는데, 그게 아니면 일단은 시간을 보내면서 친해지기라도 하라는데, 6시 퇴근과 함께 하원하러 가는 워킹맘에게 그게 가당키나 한가. 이생망(*이번생은망했다)라고 생각하며, 이미 육아를 경험해 본 선배 워킹맘들에게만 가끔 하소연할 뿐이었다.


저녁에 만날 수 있는 어른이라고 하면,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학부형들 뿐이었다. 어린이집에서는 그렇게 오매불망 엄마를 기다렸다던 아이들은, 엄마를 만나고 나서는 기세등등하여 집에 가지 않고 ‘어린이집 밖에서‘ 친구들과 놀기를 원했다.


아이들은 광장에서, 회사 로비에서, 마냥 뛰어다니거나 소꿉놀이를 하거나, 춤을 추거나, 하면서 줄기차게 놀았다. 종종 편의점에서 간식도 사 먹어가면서. 엄빠들은 그 근처에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거나, 핸드폰이나 보거나 하면서 기다렸다.


그러다가 심심해서, 또 뻘쭘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걸었다. 그 집 아이는 몇 시에 자나요? 지금 다른 과외수업은 뭘 하고 있나요? 어린이집에서 도시락 싸 오라고 하던데 어떻게 싸가실 건가요? 이런저런 정보를 공유하면서 가까워졌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 아빠인 데다가, 육아 화제는 동이 나는 법이 없으므로 할 말은 넘쳐났다. 아이들은 종종 ‘포도네 엄마', '쌍둥이네 아빠' 무릎에 앉아 말을 걸거나, 무등을 태워달라고 조르면서 그 특유의 예쁨을 뽐냈다.



폭염특보가 이어지던 한여름, 하원하러 가야 하는데 헛구역질이 나오려고 해서 잠시도 눈뜨고 제정신으로 서있기 어렵던 저녁, 아이들 노는 거 지켜보고 있을 테니 잠깐이라도 쉬고 오라고 말해준 사람도 학부형 직원이었다. 염치고 체면이고 모르겠고 덥석 고맙다고 말한 뒤 회사 한구석 휴식실에서 한 시간 눈 붙이고 일어난 후에야 정신이 좀 돌아왔다. 아이를 태우고 무사히 운전해서 집에 갈 수 있었던 그날 내 곁에 있던 건 학부형 동지였다.


주말에도 육아는 해야 하기에, 종종 가족끼리 모여서 놀기도 했다. 그러다가 여행을 같이 가거나, 서로의 집에 놀러 가기도 했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잘 놀았고, 아이들의 놀이가 끝나길 기다리며 어른들의 얘기도 육아에서, 회사 생활로, 그때그때의 뉴스거리로 넓어져갔다.


어느 순간, 회사에 아는 사람이 꽤 많아졌다. 내가 내 힘으로 ‘누군가와 친해져야지’ 하고 욕심을 부렸을 때보다 더 쉽게, 더 다양한 부서의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서로의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도 이미 알고 있으므로,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에 공감과 측은함이 기본으로 깔려있다. 그러다 보니 회사일 정도는 나라도 나서서 도와줘서나, 조금 실수해도 넘어가주고 싶다. 회사에서 이런 동지를 만난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 워킹맘, 워킹파더라면 모두 알 거다.


그러니까 다들 힘내시길. 아이 때문에 인간관계가 단순해지더라도, 다른 세계가 열리는 만큼 다른 관계가 생기는 게 분명합니다. 그게 육아의 연장선상이라도.


어차피 나의 세계란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하는 동안만큼은 절대로 아이와 동떨어져 있을 수는 없으므로, 육아의 세계가 나의 세계와 다르지 않은 데다가, 육아의 세계는 나와 아이를 합친 세계이므로 나 혼자만의 세계보다 넓은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육아 만세. 워킹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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