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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캐리 Oct 03. 2020

브람스를 좋아하려구요. 두 번째

스물아홉의 통장 그리고 오늘의 나.

스물아홉, 통장에는 얼마가 있어야 적당한 걸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남자 주인공 박준영(김민재 분)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다. 이름 있는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라 그냥 1등이나 마찬가지인 2등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유럽을 돌면서 투어 공연을 했다. 음악 분야는 잘 모르지만, 외국에서 공연하는 아티스트를 보면서 그 사람이 돈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아무리 적게 벌어도 한 번 공연할 때마다 몇 천씩은 땡기지 않을까?

하지만 준영이는 돈이 없다. 그렇게 열심히 피아노를 쳤는데도 통장에 딱 300만 원 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대표적으로 나에게는 상당히 큰돈이지만,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람의 통장 잔고 치고는 상당히 형편없다. 뭐, 집이 원래 넉넉하지 못하고 그 와중에 한량인 아빠가 늘 사고를 치며 그걸 수습하려고 번 돈을 죄다 끌어다 썼기에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 그래도 돈이 생각보다 너무 없긴 하다... (힘내 준영쓰)


그렇다면 다른 스물아홉은 어떨까?

여자 주인공 채송아(박은빈 분)는 경영학과를 멀쩡하게 졸업하고 갑자기 음악에 꽂혀 4수 끝에 다시 음대에 입학했다. 갑자기 전공과 다른 분야에 빠져 들어 4년 동안 배운 것을 써먹지 않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송아의 동창은 말한다.


"옛날에 너 음대 간다고 했을 때, 우리 다 말렸잖아. 근데 지금은 네가 짱이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부럽다. 아침에 출근카드 찍을 때마다 정말... 나도 하고 싶은 게 있었던 것 같은데. 멋지다, 채송아."


그럼 송아가 혼자 중얼거린다.


"남 속도 모르면서. 멋지긴 뭐가 멋져."





꿈을 찾아 떠나는 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두 가지다. '너 돌았니?' 아니면 '멋지다.'

보통 두 번째 말을 들으면 왠지 으쓱한 기분이 들면서 진짜 뭔가를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지만, 송아처럼 꿈을 좇는 과정이 너무 치열해지면, 너무 가망이 없어 보이면 멋지다는 말도 딱히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그녀가 하는 말처럼 남의 속도 모르면서 되는 대로 말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고 싶은 걸 한다고 해서 스트레스가 없는 건 아니니까. 어차피 각자 자신의 인생이 제일 고달프게 느껴질 테니까. 그래도 멋있다는 말이 넌 안 될 거야, 라는 말보다 확실히 낫기는 하다.


송아는 음대 졸업을 앞두고 있다. 보통 졸업하면 유학을 간다지만 그것도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 애들이나 가는 거고, 송아처럼 연주회에서 가장 끝자리에 앉는 학생은 가망이 없다.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거지 딱히 잘하는 건 아니다.

그런 송아의 통장에는 얼마가 있을까? 스물아홉이기는 해도 아직 학생이니 쥐뿔도 없겠지 뭐. 드라마는 송아의 꿈과 준영과의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여러모로 알만 하지 뭐.


돈이 있어도 없는 것 같은 또 하나의 캐릭터는 송아의 오랜 친구 윤동윤(이유진 분)이다. 동윤 역시 원래 음악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악기 연주를 그만두고 악기를 만드는 것을 배워 자신의 가게를 차렸다. 악기와 부속품을 만들기도 하고 고장 난 것을 수리해주기도 한다.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고 나름대로 가게가 굴러가는 것 같기는 한데(물론 드라마에서 그런 부분까지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본인 입으로 늘 영세 자영업자라고 말한다. 

작게라도 사업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매출이 많이 나오다고 하더라도, 물론 매출이 많이 나오기도 쉽지 않지만 어쨌든 매출이 많이 나오면 그만큼 써야 하는 돈도 많기 때문에 결국은 모든 것이 제로가 된다. 삼성 전자도 아니고 그냥 동네 사업하는 사람 중에 사업이 기가 막히게 잘 돼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를 본 적이 없다. 






쥐뿔도 없는 캐릭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현호다.

한현호 역할을 연기한 김성철 배우는 최근에 만난 알게 된 배우 중 가장 눈길이 가는 배우다. 내가 죽고 못 사는 애잔한 순정남 연기를 잘 하는 남자 배우는 언제나 환영이다. 

현호야 말로 세계적인 아티스트 절친과 재벌 금수저 여친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근데 그렇다고 자존감이 낮거나 찌질이는 아니어서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여자친구와 소위 말해 같은 '레벨'에 들고 싶어 노력하기는 한다. 

그런 현호의 통장에는 얼마가 있을까. 애기들 과외도 하고 엄마, 아빠의 편의점 일도 도와주고 있지만 딱히 풍족해 보이지는 않는다.

도대체, 왜 우리네들은 돈이 없는가.








나는 갑자기 내 친구들의 재정 상태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처럼 헤매는 인생이 아닌 진득한 직장 여성들은 스물아홉에 얼마를 가지고 있을까?

그저 단순한 계산 법대로라면, 

1.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직을 해 6년 정도를 일했으며

2. 부모님과 같이 거주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3. 한 달에 20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고

4. 한 달 평균 80만 원 이상의 저축을 한다고 쳤을 때,

스물아홉이라면 5천7백만 원 정도를 모았을 것이다. 이 조건에 맞는 친구가 딱 한 명 있었는데(다들 놀고먹는 기간이 조금씩은 있음), 애석하게도 그 친구 역시 5천만 원은 본 적이 없는 숫자라고 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간단한 이치였다. 일단 200만 원을 받고서는 한 달에 80만 원을 저금하는 것 자체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맨날 돈 쓸데는 많고 들어오는 건 없지. 맨날 쓰는 건 금방이지. 그리고 중요한 건 우리 또래 대부분의 여성 동지들은 첫 직장에서 그 200만 원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4년제 대학을 멀쩡하게 졸업한 인재들이 실 수령액이 150만 원이 채 될까 말까 한 돈을 받으며 일을 했다. 이 정도면 노동착취가 아닌가 싶지만, 현실이 그랬다. 취업의 문은 열리지 않고, 열쇠를 가지고 싶은 청춘들은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 재능이라는 금을 억지로 깎아 열쇠를 만들어야 했다. 






이토록 돈이 없는 와중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무엇을 해야 할까. 준영이처럼 재능을 꽃피워 봤던 사람도 현실이 막막하다면, 송아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앞이 보이질 않는다면, 현호처럼 10년을 한 사람만 좋아했는데도 같은 레벨에 설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속 준영은 다시 브람스 곡을 치려 한다.  그동안은 브람스와 슈만 그리고 그의 아내 클라라의 관계가 마치 자신과 현호 그리고 정경(박지현 분)과의 관계인 것 같아 브람스의 곡을 치지 못했다. 자신이 브람스이고 브람스가 자신이었기에 다른 것은 다 쳐도 브람스의 곡은 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새로운 사랑을 만났고, 예전부터 자신을 옥죄어 왔던 그 관계에서 벗어나려 한다. 모든 것이 얽혀 있고 해결하기 쉽지 않아 보여도 어쨌든 준영은 선택했다. 이제는 브람스를 치기로.


언제나 중요한 건 이전과는 다른 현재의 무언가이다. 어차피 통장 잔고는 서른이 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로또라도 당첨되라는 마음으로 오천 원, 만 원씩 쓰는 것도 의미가 없다. 차라리 치킨 사먹는 데 보태고 말지(근데 요즘 치킨이 왜 이렇게 비싸요?) 이미 서른을 경험한 나의 친구들 역시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역시나 삼십줄이 되어도 별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30년을 살아도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다행이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그러니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작은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면, 그러니까 그동안 외면해 왔던 브람스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준영처럼 다시 콩쿠르를 준비하고, 송아처럼 좋아하는 사람에게 터져 나오는 고백을 하며, 현호와 정경처럼 교수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것. 그 선택들은 나도 할 수 있고 나의 친구들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떻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는, 어제와는 달랐던 오늘의 나만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잔고가 텅텅 빈 우리네들의 통장에는 결국 돈 대신에 나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여러 가지 선택을 넣을 수 밖에 없으니까. 











(모든 사진의 출처는 해당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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