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작가 중에.
나의 첫 드라마는 <가을 동화>였다.
<겨울 연가>, <여름 향기>, <봄의 왈츠>로 이어지는 계절 시리즈 드라마 중 첫 번째였던 <가을 동화>는, 요즘 시대에 진부한 막장 요소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요소들이 아마 이 드라마부터 시작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온갖 클리셰가 범벅되어 있다. 출생의 비밀, 재벌 남자, 불치병이라는 요소는 지금에야 너무 뻔하고 재미없는 주제가 되었지만, 2000년에는 시청자를 웃고 울리는 꿀잼 스토리의 기본 요소였다.
어린 은서(문근영 분)를 두고 새로 찾은 딸만 데리고 부모님이 미국으로 떠나 버리는 장면을 보며,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있다. 무려 밤 10시에 시작하는 드라마를 고작 10살 아이가 꼬박꼬박 챙겨볼 수 있었던 건, 장사를 하는 부모님의 늦은 귀가 덕분이었고, 이미 자고 있는 초등학교 5학년 오빠를 확인한 후 몰래 이불을 빠져나와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드라마를 봤다. 만화 <웨딩 피치>의 릴리가 가진 립스틱이 부러워 엄마 립스틱을 훔쳐 바르던 아이가 은서(송혜교 분)가 죽지 않기를 바라던 그 순간은, 나의 세상이 2D에서 3D로 넘어오는 순간이었다.
물론 <가을 동화> 이전에도 드라마는 있었다. 일요일 밤, 부모님이 닭발 같은 메뉴를 두고 오붓하게 야식 타임을 즐길 때가 있었는데, 나는 그런 날이면 꼭 이상하게 눈이 떠져 눈치도 없이 사이에 껴 같이 뭔가를 먹으며 tv로 눈을 돌리곤 했다. 그때 봤던 드라마가 바로 <카이스트>였다.
어린 여자 아이가 과자를 만들어서 장사를 하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드라마 <국희>였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원빈의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는 드라마 <광끼> 속에 나오는 것이었고, 스토리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았도, 너무도 무서웠던 기억은 남아 있어 꼭 오빠와 같이 봤던 건 <RNA>라는 드라마였다. <보고 또 보고>라든지, <학교>라든지, <왕초> 같은 드라마들은 역시나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아도 단편적인 장면들을 봤던 기억은 기대로 남아 있다.
좋아하는 걸 하고 싶은 건 어쩌면 인간의 당연한 본능일 것이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생각해내는 사람이 되었고, 나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여러 종류의 작가 중에서도 왜 드라마냐고 스스로에게도 자주 질문했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어렸을 땐 그저 내가 쓴 하나의 문장이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내 글을 보고, '그래 맞아ㅋㅋㅋ' 혹은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먹고 살기 더럽게 힘든 이 세상에서 섣부른 조언보다는,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고, 근데 또 이럴 땐 살 만하고 그렇더라, 등신 같은 인간 덜떨어진 인간 많고 많지만 어떨 땐 나도 그렇더라, 너도 그렇지? 너만 바보 같은 건 아니야. 누구든 그렇더라. 하는 정도의 위로가 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