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9년 국민 독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들의 연간 평균 종이책, 전자책(교과서, 학습 참고서, 수험서, 잡지, 만화 제외) 독서량은 7.5권이다. 2017년의 9.4권보다 1.9권 줄었다고 한다. 연간 독서율은 성인이 55.7%, 학생이 92.1%다. (독서율이란 1년간 일반도서를 1권 이상 읽은 사람의 비율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지난해 우리나라 성인 중 약 44%가 일 년 동안 책을 1권도 읽지 않았다는 말이다.
성인의 독서량은 감소하는 추세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여전히 많고, 신간도 쏟아져 나온다. 글로 밥을 버는 능력자들도 수두룩하고, 심지어 다른 밥벌이를 하면서 책을 내는 초능력자들도 참 많다. 브런치 작가 1년 차, 나는 돌쟁이지만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했다. 겨우 한 달에 한두 번 노트북을 붙잡고 한 발 떼어 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욕심이 앞서 자꾸 넘어진다. 한 발도 못 떼면서 자꾸 달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다 발이 꼬이기 때문이다. 가뿐하게 장애물까지 뛰어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워 죽을 지경이다. 내 눈에는 뚝딱뚝딱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얼마 전 공모전에 글을 올리고 혼자 뿌듯했던 시간은 아침이 밝아오기 전까지 고작 몇 시간이었다.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만족감에 가벼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아침에 다시 만난 글은 내가 봐도 오글거렸다. <안 느끼한 산문집>을 쓴 강이슬 작가의 강연 영상을 본 적 있다. 그때 들었던 작가의 말이 내 뒤통수를 때렸다.
"새벽에는 글 마귀가 돌아다녀요. 새벽의 저주는 아침의 쪽팔림이죠. 오글거리는 글은 독자와 먼 글입니다."
새벽에 쓴 글은 업로드하지 말고 꼭 낮에 수정해야 한다던 그녀의 말이 맞았다. 아침의 쪽팔림으로 얼굴은 벌게져서 수정하기를 클릭했다. 느끼한 단어들을 빼고, 오글거리는 문장들을 지우자니 별로 남는 게 없었다. 클리셰가 범벅인 글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뜯어고쳐야 할지 막막했다. 몽땅 지워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걸 쓴 시간이 아까워 버리지도 못하고 쩔쩔맸다.
글을 끝까지 읽고도 하트를 누르지 않는 것은 공감하지 못할 때다. 하지만 정반대 일 때도 있더라. 걸음마도 떼지 못해 괴로워하던 중 이윤주 작가의 글을 처음 만났다. 한 편을 읽고 하트를 누르고, 이전 글을 읽고 또 하트를 눌렀다. 그렇게 몇 편 더 역주행하다가 하트를 누르지 않았다. 공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부러워서.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말, 꼭 쓰고 싶었던 이야기. 그러나 나는 흩어져 있는 생각들을 글로 만들지 못했다. 이렇게 명쾌하고 세련된 문장들은 왜 내게로 오지 않는지.
걸음마를 배우려면 매일매일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야 하는데 연습은 안 하면서 힘들다고 주저앉아 떼쓰는 꼴이다. 누워서 뛰고 싶다고 소리치는 셈이다.
'초고는 쓰레기다'라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원문은 이윤주 작가의 글에서 처음 보았다.
"The first draft of anything is shit."
여태 내가 쓴 글은 똥이었다. 글 마귀가 돌아다니는 깊은 밤에 그저 쓰고 싶다는 욕망에 충성하면서 쓴 글이니까. 그런 일조차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보니 서랍에 넣어 두고 말고 생각할 틈도 없이 발행을 누르고 배설의 후련함을 느꼈다. 내놓아봤자 거름이 아니라 똥일지라도. 지난해 11월부터 자괴감에 빠져 6개월간 한 편도 쓰지 못했다. 그때 배설의 중요성을 알아버렸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는 걸. 지금은 나를 위해 거름을 만드는 시간. 간절한 바람은 냄새는 좀 구리지만 다른 한 사람에게라도 쓸모 있는 거름이 되는 거.
봐 달라고 내놓은 글이니 누군가는 읽을 것이다. 공감을 하든지 욕을 하든지 읽는 사람의 몫이다. 자위 행위라고 비웃어도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다. 포기하려다 6개월 만에 뒤집기를 성공한 돌쟁이니까 그저 본능에 충실하고 싶다. 아가들의 똥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은 별로 없지 않은가. 애기들의 글을 읽는 어른들은 너그럽게 봐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