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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IMI Apr 14. 2019

인도 여행 06. 까까머리 부탄 소녀

2019. 1. 12.

"탁 탁 탁 탁"

뭔지 모르는 소리에 잠을 깨보니 검은 까마귀 두 마리가 창문을 쪼고 있다. 낯선 경험이다. 난간으로 나가니 건너편의 움막에서 아침을 만드는 연기가 올라온다. 빨간 벽돌로 쌓아 올린 2평짜리 움막 옆에는 여섯 마리의 소들이 살고 있다. 오늘도 할머니가 소젖을 짜고 있다.

부처의 최초 설법지, 사르나트  Sarnath

어제 만났던 An과 함께 그린 가든의 웨이터인 Mayank의 안내를 받으며 사르나트로 향했다. 사르나트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네팔의 「룸비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해탈하여 열반에 이른 부처의 시신을 화장한 「쿠시나가라」와 더불어 불교의 4대 성지로 일컬어진다. 현지인과 함께해서 그런지 500루피를 요구하는 릭샤 왈라와 200루피에 쉽게 합의했다. 더 이상 거리가 새롭지 않고 한 시간 내내 먼지로 괴롭고 소음으로 혼란스럽다.

릭샤를 타고 사르나트로 가는 길

「사슴 동산」이라는 뜻의 사르나트(녹야원)는 부처가 전생에 사슴의 우두머리였을 때 새끼를 밴 다른 사슴이 왕의 사냥감이 되자 대신 죽겠다고 하여 왕을 감동하게 한 전생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사르나트는 바라나시에서 동쪽으로 250km 떨어진 보드가야(Buddhagaya)의 보리수나무 밑에서 득도한 부처가 당시 인도의 정치, 사상 그리고 종교의 중심지이었던 바라나시를 찾아 다섯 명의 옛 동료에게 최초로 자신의 법륜을 펼쳤던 곳이다. 최초의 인도 배낭여행자였던 혜초(704~780)는 그의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에서 사르나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부처의 다섯 제자의 모습이 새겨진 탑이 있다. 사자가 올라타고 있는 돌기둥이 있는데 그 돌기둥은 대단히 커서 다섯 아름이나 되고 무늬가 섬세하다.”

부처는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는 인도의 중심인 바라나시에서 민심을 사로잡고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려 했다. 그는 베다교의 불평등과 카스트의 굴레에서 희생당하는 민중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그들에게 현세의 카스트나 성별에 상관없이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끝없는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평등적인 종교관을 전파했던 매우 인간적인 철학자이었다. 또한,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소를 여전히 음식과 종교 제물로 도살하는 브라만을 향해 불살생의 계율을 제시하면서 종교적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등 매우 영리한 정치 감각을 보여주었다.

평등과 불살생의 부처 사상은 마우리아 왕조의 아카소왕 때에 전성기를 누렸으며, 뒤이은 쿠샨 왕조의 적극적인 불교 정책으로 중국에 전파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굽타 왕조를 거치면서 불교의 개혁성이 떨어지고 지배층은 소를 중요하게 여기는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한편 신분제를 강화하면서 민중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힌두교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이후 민중으로 파고 들어간 힌두교가 불교를 흡수하면서 인도에서 불교는 소수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부처의 최초 설법지, 사르나트 / Sarnath

‘사슴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사르나트(녹야원)은 부처가 전생에 사슴의 우두머리였을 때 새끼를 밴 다른 사슴이 왕의 사냥감이 되자 대신 죽겠다고 하여 왕을 감동시킨 전생 이야기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르나트는 바라나시에서 동쪽으로 250km 떨어진 부다(보드) 가야의 한 보리수나무 밑에서 득도한 부처가 당시 인도의 정치, 사상 그리고 종교의 중심지이었던 바라나시를 찾아 다섯 명의 옛 동료에게 초전법륜(최초로 자신의 법륜)을 펼쳤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도 배낭여행자였던 혜초(704~780)는 그의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에서 사르나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부처의 다섯 제자의 모습이 새겨진 탑이 있다. 사자가 올라타고 있는 돌기둥이 있는데 그 돌기둥은 대단히 커서 다섯 아름이나 되고 무늬가 섬세하다.”


부처는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있는 인도의 중심이었던 바라나시에서 민심을 사로잡아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려 했다. 그는 한 평생 베다교의 불평등과 카스트의 굴레에서 희생당하는 민중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그들에게 현세의 카스트나 성별에 상관없이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끝없는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평등적인 종교관을 전파했던 매우 인간적인 철학자이었다. 또한,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소를 여전히 음식과 종교 제물로 도살하는 브라만을 향해 ‘불살생’의 계율을 제시하면서 종교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하는 등 매우 영리한 정치 감각을 보여주었다. ‘평등’과 ‘불살생’의 사상은 BC 3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카소왕 때에 전성기를 누렸으며, 뒤이은 쿠산 왕조의 적극적인 불교 정책으로 중국에 전파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굽타왕조(AD 4~6세기)를 거치면서 불교의 개혁성이 떨어지고 지배층은 민중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힌두교의 사상을 적극 이용하였다. 브라만은 육식과 소 도살을 포기하고 소를 숭배함으로써 소를 신들과 소를 동일시하는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불교가 힌두교에 흡수되어 버리면서 인도에서 불교는 소수 종교로 전락되고 말았다.


부처 유해가 보관되었던 달마라지카 스투파 / Dharmarajika Stupa

사르나트에 들어서면 부처의 열광적 팬이었던 아소카 왕 시절에 건설된 시바의 링가와 비슷한 형태로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스투파가 보인다. 혼자라면 금방 둘러보겠지만 두 명의 젊은 친구들의 사진을 찍어주다 보니 발걸음이 늦어진다. An의 자세는 단순하지만 Mayank은 배우인 듯 다양하게 자신을 표출하면서 인도인의 카메라 사랑을 한껏 보여준다. 잘 단장된 길 왼편의 이미 무너져 버린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의 널따란 둥근 기단들 앞에는 소풍을 나온 학생들이 교사의 설명을 경건하게 경청하면서 찬란했던 불교를 공부하고 있다.

아소카 왕이 창건하고 후대에 증축해서 지름이 33m에 달했다는 이 스투파에서 부처의 유골로 추정되는 뼈가 있는 상자가 발견되었으나, 1794년에 바라나시의 지방 장관이었던 자갓 싱(Jagat Singh)에 스투파는 파괴되고 뼈는 갠지스강에 버려졌다고 한다. 자신의 집 건축에 사용될 벽돌을 구하기 위해 탑을 허물어버린 그의 행동은 비난받을 수 있으나, 경복궁을 막고 있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부숴 독립기념관의 바닥에 깔았던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힌두교가 부처를 비슈누의 여덟 번째 아바타로 만들어 불교조차도 힌두화시켰지만, 얼마나 불교의 사상과 스투파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어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자갓 싱이 부처의 유골을 버리지 않았다면 부처는 죽어서도 수천 년 후에도 자연으로 되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상자 안에 계속 갇혀 있을 것을 생각하면 그는 부처에게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곳, 다메크 스투파 / Dhamek Stupa

다메크 스투파는 아소카 왕 때 세워지고 굽타 왕조 시대에 증축된 거대한 원통형 전탑으로, 법이라는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곳이다.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에서 약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힌두교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서 있다. 상부가 일부가 붕괴하여 있지만, 현재 높이는 32m이고, 하부 지름은 26m이다. 스투파 겉면에는 직선을 이용한 기하학적인 문양과 여러 가지 덩굴이 꼬이며 뻗어 나가는 모양의 무늬가 부조되어 있고 8개의 창문 모양의 불감이 만들어져 있다.


스투파의 주변에는 정화수가 들어있는 투명한 수십 개의 플라스틱이 나란히 줄을 맞춰 놓여 있다. 네팔에서 온 가족들이 합장하고 스투파를 돌고 있고, 젊은 여인은 스투파를 향해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탑 형태가 아니므로 절을 하는 모습이 불교 의식인지 힌두교 의식인지 구분이 안 된다. 몇몇 사람들이 불감에 동전을 던지며 그들의 행운을 시험하고 있어, An과 Mayank도 시도해봤지만, 번번이 실패다. 하지만, 나의 동전은 한 번에 불감에 안착했다. 행운이 나에게 올 모양이다.

인도의 상징, 아소카 석주 / Asokan Pillar

출구로 나오면서 아소카 왕의 석주에 들렀다. 통일 전쟁을 마친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 왕이 전쟁의 참상에 대한 후회와 반성으로 불교에 귀의하고 불교를 통치기반으로 삼으면서 영토의 각지에 자비와 선행 등 불교의 가르침을 석주에 새겨 놓았다. 처음에는 30개나 있었으나 지금은 10개만 남아 있다고 한다. 사암으로 만들어진 이 둥근 기둥의 석주는 원래 높이가 12.25m이고 지름이 0.71m이었다. 하지만 무슬림에 의해 파괴되어 지금은 석주의 밑 부분만 남고, 네 마리의 사자상은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네 마리 사자상이 있는 사르나트 박물관 / Sarnath Museum

아소카 왕의 석주 사자상을 보기 위하여 스투파 맞은편의 사르나트 박물관(Sarnath Museum)으로 갔다. 이곳에는 BC 3세기부터 AD 12세기까지 불교 미술과 힌두교의 신상을 비롯한 다양한 고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아쉽게도 촬영 비용을 낸 카메라 외에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입장을 할 수 없다.

박물관 입구에는 아소카 왕의 석주 윗부분인 사자상이 서 있다. 부처의 화신인 네 마리 사자가 등을 맞대고 있는 조각 밑에는 불법을 상징하는 법륜(Dharma wheels)과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동물인 코끼리ㆍ황소ㆍ말ㆍ사자가 종 모양의 연꽃 위 둥근 기둥 위에 부조되어 있다. 이는 부처의 사상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자상은 인도의 국장(National Emblem)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간디와 함께 인도 지폐에 인쇄되어 있다. 또한, 법륜은 인도 국기의 중앙에서 볼 수 있다.

자이나교도의 순례지, 디감버 자인 템플 / digamber Jain Temple

박물관을 나온 우리는 황금색 첨탑이 솟아있는 사원에 들어갔다. 다메크 스투파 근처라 당연히 불교 사원이라 생각했지만, 사원을 둘러본 후에 1824년에 지어진 자이나교 사원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이나교의 제11대 지나로 알려진 슈레이산나스(Shreyanshnath)의 큰 석상이 있어 슈레이산나스 자이나교 사원(Shreyanshnath Jain Temple)라고도 불린다. 잔디밭과 정원은 잘 관리되어 있고, 자이나교 종교의 실질적인 창시자인 마하비라(Bhagwan Mahavir)의 삶을 묘사한 매력적인 프레스코 벽이 있다. 사르나트는 슈레이산나스가 태어난 싱푸르(Singhpur)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이라 자이나교의 중요한 순례지이기도 하다.

사원 관리인이 한국지폐가 있으면 교환하자고 제안한다. 한국에서는 신용카드를 사용하다 보니 더 이상 지폐가 필요하지 않다는 나의 대답을 이해하면서 자신이 가진 스무 장 정도의 다양한 나라의 지폐를 보여준다. 천 원짜리 한국지폐도 보인다. 최근에 동남아와 유럽을 여행한 An은 매우 흥미로워하며 관리인의 지폐를 떠들썩하게 구경한다. 주변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관심을 보이니 그는 매우 즐거워한다. 외국인을 자주 만날 수 있는 그가 즐길 수 있는 취미인 듯싶다.


사르나트에서는 단체로 순례하러 온 부탄 승려들이 많다. 식당에서 눈이 마주치자 수줍게 웃던 까까머리의 소녀 승려가 생각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데 행복지수 1위라는 부탄에서 온 소녀 승려 눈에는 화려한 옷에 긴 머리 휘날리는 또래 소녀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궁금하다. 원효는 「일체유심조」 즉, 마음이 모든 것을 지어낸다고 하였지만, 종교로 인하여 어린 나이의 순수함과 자유로움을 만끽하지 못하는 부탄 소녀가 이방인의 눈에는 안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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