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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과 태영 Oct 20. 2020

사회만들기?

체화당이 남긴 질문 (3) 

마을만들기? 사회만들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체화당은 복잡했다. 요새 유행하는 것처럼 효과적인 비즈니스 모델의 필수조건인 ‘한 문장으로 비전과 목표를 설명하기’ 같은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장소였다. 마을카페, 청년문화거점, 대안학교 등 여러 가지 설명들이 체화당을 수식했다. 그건 이 공간이 시작부터 사회를 만들고, 정치를 조직하는 풀뿌리적 실험의 일환으로 구상되고, 기획되었으며, 큰 틀에서 그러한 고민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래저래 요새 유행하는 여러 가지 ‘사회혁신’의 흐름과는 잘 맞지 않았다. 진지했고, 복잡했고, 무거웠다. 

  그나마 체화당은 ‘마을카페’라는 조금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개념이 있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다보니 진짜로 ‘마을’이라는 단어에 갇히게 된 어려움도 있었지만 체화당과 연결된 기획인 풀뿌리사회지기학교를 찾는 이들에게 단연 어렵고 무거운 단어는 ‘사회지기’였다. 우리는 사회지기라는 단어에 사회를 지어가고, 지켜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는데, 이게 경험해본 적 없는 역할이기 때문에 막막하다. 그렇다면, 사회활동가가 되라는 의미인가. 실제로 풀뿌리사회지기학교의 구성원들은 학교가 제안하는 개인의 미래가 무엇인지에 대해 자주 질문했다. 어떤 이는 한 때 그 단어만 들어도 화가 나고 답답할 정도로 자기를 무겁게 하는 것이었노라 고백하기도 했다.  

  이신행 교수가 정의한 ‘사회만들기’는 지역을 기반으로 풀뿌리 사회적 권력을 만들어나가는 것, 즉 시민들의 결사체(주체)가 토론 구조를 통해 사회적 정당성을 형성(구현)해 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적정당성이란 ‘정치적 정통성’과는 다른 개념인데, 이신행 교수는 이른바 87년 체제가 한국사회의 정치적 정통성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지만, 체제 내외에서변동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사회적 정당성은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에 이를 만드는 것이 민주화 이후의 중요한 과제라고 이야기한다. 그 사회적 정당성을 구축하는 일감이 곧 사회만들기인 셈이다. 


체화당과 사회만들기 구상 


  체화당을 둘러싼 구조는 사회만들기 구상으로부터 만들어졌다. 앞서 언급한 ‘풀-민-C’ 통합모델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체화당은 토론의 자리이자 카페연대 등을 조직, 토론의 주체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체화당이 사회만들기라는 목표를 설정한 공간 기획이었다는 것이 마을카페로서 체화당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마을만들기와 사회만들기가 대항하거나 갈등 관계에 있는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만들기라는 것이 체제 내외의 사회 변동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사회적 정당성을 만드는 작업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할 때, 체화당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어떤 식으로 ‘사회적 권력’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서 해석될 수 있어야 했다. 조직의 가치 지향적 목표들은 그 조직이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단계에서부터 중요한 준거점으로 작동할 때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떤 가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초기의 강력한 동력이 어느 정도 사라진 시점부터 그 목표는 사후의 평가지점 정도로 작동하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체화당은 그런 점에서 다행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회만들기를 중심으로 한 첫 번째 질문은 체화당 안으로 향한다. 우리는 풀뿌리적인 사회적 권력을 만들어간다는 차원에서 체화당에서 만들어간 일들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은 성립부터 쉽지 않다. 고백하건대 우리 안에서 ‘사회를 만든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한 토론을 멈춘 지 꽤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풀뿌리’사회지기’학교의 ‘사회지기’가 이 학교를 찾아오는 20대 초반의 청년들에게 무겁고 혼란스러운 키워드로 존재했듯이, 체화당의 ‘사회만들기’ 역시 어려운 주제였다. 체화당이 ‘문화센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대화를 종종 주고받았다. 이 대화가 사실 ‘사회만들기’라는 난감한 개념을 우리가 마주하는 방식을 드러낸 대표적인 소통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체화당은 이 공간을 찾는 사람들이 식음료 뿐 아니라 프로그램마저도 단순히 ‘소비’하는 주체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소비자가 아니라 공간의 공동 운영자 정도로서의 멤버십을 가진 동료시민들을 이 공간으로 초대하고자 했는데, 이런 바람은 실제 공간을 운영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희미해져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체화당은 돈을 벌어야했고, 우리는 멤버십을 가진 이들을 공간으로 적극적으로 초대하며 사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한 상업카페로서 정체성을 굳히지도 못했기 때문에 만성적인 경영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쨌든 이러한 충돌이 보여주는 건 체화당이 사회만들기를 꾸준히 해석하는 방식 중에는 ‘소비자’가 아닌 ‘시민’을 공간의 활용자로 초대하고자 했던 부분이 있다. 사실 그런 점에서 이 공간에 유일하게 멤버십을 가진 이들로 결합한 ‘시민’은 결국 교실(이신행 교수의 수업, 대안대학 풀뿌리사회지기학교)을 통해 체화당을 만나게 된 이들이라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어쨌든 체화당은 결국 교실의 관계망 이상으로 사회를 확대하는 것에는 실패한 셈이다. 앞으로 비슷한 고민으로 공간을 만들고, 관계를 조직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면 질문을 좀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어떤 조건에서 공간(과 모임)에 소비자 이상의 자기 정체성을 투여하고, 멤버십을 갖는 것에 호의적인 상태가 될까?”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니, 몇 가지 떠오르는 답이 있다. 예컨대, 그 공간의 규범을 만들고 수정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고, 실제 그런 참여가 공간의 규범을 새롭게 직조하는 환경.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소비자 이상의 감각으로 공간에 접속할 것 같다. 그리고 그 규범의 변화가 자기에게도 이익이 있고, 흥미로운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체화당은 그런 공간이었을까? 

  그리고 중요한 지점이 바로 ‘사회적 권력’이라는 키워드인데, 설명해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우리 중 누가 ‘사회적 권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질문하며, 그 과정 중에 우리 일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했을까? 선거를 통해 권력이 정통성을 갖게 된다는 이해가 체화당 구성원들이 권력에 대해 갖고 있는 최소한의 공통분모였던 것 같고, 이건 사회 전반에 그 이해와 크게 차이가 없는 정도였다. 매우 정치적인 질문, 그러니까 사실상 ‘(광의의) 정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이 어딘가 존재했지만, 누구도 쉽게 그 질문과 마주하지 않았고, 못했다. 딱 그 정도였다. 


사회만들기 관점에서 마을공동체사업에 던지는 질문     


  이제 사회만들기를 중심으로 한 질문을 체화당 바깥으로 던져보자. 대표적으로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사회변화를 추동하고자 했던 운동의 흐름을 제도로 포섭한 흐름이 바로 마을공동체 지원 사업이다. 시민운동가출신의 서울시장이 당선 된 2011년 이후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해 지금은 전국적인 정책 사업이 되었다.  


  첫 번째 질문은 ‘마을’의 폐쇄성을 향해 던져진다. 고양의 한 아파트 단지는 2019년  ‘미세먼지 없는 실내놀이터 만들기’를 주제로 고양시자치공동체지원센터 공모사업(마을꿈활동 계획수립 지원 사업)에 선정되었다. 실내 놀이터 만들기가 주제인데 나눔 장터, 물놀이(사설업체에서 대여한 대형 워터 슬라이드 설치) 등 잇따른 프로그램이 실외에서 진행되는 상황도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지만, 아파트 거주민만 참여 가능하다는 프로그램 참여에 제한을 둔 홍보물은 더 납득이 가질 않았다. 미세먼지 문제로 마음껏 밖에서 뛰어놀기 어려운 현실이 비단 이 아파트단지만의 문제인가. 단지로 사업이 선정되었다하더라도 단지를 거점으로 이 문제를 인근 지역사회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더하여 외연을 확장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처럼 마을공동체 사업에는 확장된 개념의 ‘우리’가 없다. 철저히 수단으로만 역할 해야 할 프로그램(취미)이 목적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을공동체 사업은 과연 사회를 만들었을까? 두 번째 질문이다. 질문이 좀 모호하니 부연하자면, 제도화된 마을공동체 사업은 무엇을 강화시켰을까? 개인의 일상? 사회적 관계? 전혀 그렇지 않다.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지금의 마을공동체 사업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사업의 참여자들이 결국은 관료적 습관을 훈련받아 이것을 ‘시민의 성장’으로 받아들이는 중대한 왜곡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제도화된 사업이 정작 중요한 권력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우회하며 ‘참여’를 프로그램화하고 시민의 권리가 확장되고 있다는 착각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역할 한다는 점이다. 이런 부분들을 ‘탈정치화’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을공동체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시간과 장소가 있는 이들이다. 무언가 참여해볼 수 있는 시간과 안정적인 정주성을 지녔다는 것이 도시 공간에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조건은 아니다. 이 ‘권력성’을 인지하고, 왜 사람들은 시간이 없을까, 왜 사람들은 안정적으로 머무르지 못할까를 질문하며 해결 방안을 찾는 것을 ‘정치적’인 행위라고 할 때, 탈정치화 된 사업은 사업의 정량적인 성과만을 의식하며 시간과 장소를 가진 이들을 사업의 참여자로 호명한다. 특별히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권리(쉬고 머무를 권리)가 없는 다수의 시민들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실상 참여의 배제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관료제의 무서움이고, 제도화의 이면이다.

  더 적극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누가 마을의 주민인지, 마을이 정말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지금의 당연시 된 제도와 그 제도에 기반을 둔 사업들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질문이 사라진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건 사회도, 마을도 아닐 것이다. 당연히 세계도 못 구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마을과 사회에 대해


  다시 한 번 마을만들기가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질문해본다. 마을이 곧 사회이기도 한데 이렇게 구분 짓는 것 자체가 사실은 어불성설이기는 보편적인 개념이 제도화되는 순간 특수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이런 질문도 성립하게 된다. 어쨌든 우리의 경험 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여러 경험들, 그리고 가까운 일본의 사례들을 토대로 이 질문에 대답해보자면, 마을만들기가 우리의 일상(사회적 안전망 등)을 더 안전하고 평등하며 지속가능한 공간으로 만드는 방식으로는 미비한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커뮤니티가 좀처럼 사회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마을이라는 공간에는 항상 소외되는 계층이 있어왔다. 성공회대 사회학과 김동춘 교수는 한  기고문에서 마을로부터 소외된 이들(비혼, 미혼, 싱글 맘, 독거남성 등)에 주목, 이들과 마을과의 연결 작업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신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체화당 실험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한국의 사회운동이 ‘사회만들기’로 들어가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었다. 이와 비슷한 논의에서 일본의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山本理顯)은 ‘지역사회권(圈)’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내 집’을 꿈꾸는 동안 주택은 밀실이 되고, 주변 환경은 황폐해지고, 지역사회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기존의 1가구 1주택 모델에 대한 수정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으며 고령화와 1,2인 가구 증가와 같은 사회, 경제적 여건의 변화에 따라 가족을 전제로 하지 않는 새로운 주거 모델, 새로운 생활방식의 요구되는데, 이것을 지역사회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건축(공간)을 통한 사회만들기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마을만들기(마찌즈쿠리)운동은 일본 지방의 시(市)·정(町)·촌(村)을 중심으로 꾸준히 전개되며 많은 성과를 거뒀다고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일본의 일련의 상황들을 지켜 볼 때 이런 운동의 경험이 일상 자체를 변화시켰는지는 잘 모르겠다. 국가 규모, 글로벌한 범주에서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일상을 장악했고, 이런 영향력들이 커지는 순간들에 이른바 ‘마을만들기’가 사실은 잘 개입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심각한 기후위기, 강화되는 불평등 문제는 마을과 국가, 세계 경제를 넘나드는 영역에서 그 해법을 찾아낼 수 있는 의제이고, 이런 치명적인 문제들이 사실은 일상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마을만들기가 무엇을 강화하고 있는지, 행여나 기후위기와 불평등 문제와 같은 치명적이고 복잡한 문제들을 더 심화시키는 게 문화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충분히 질문해봐야 할 것이다. 2020년의 공동체운동, 마을만들기는 이 복잡한 조건들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잡함을 단순함으로 만드는데 강점이 있는 관료제와 빠르게 결별하고, 새로운 관계 맺기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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