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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과 태영 Oct 20. 2020

배움과 정치, 두 가지 열쇳말

장소성에 대한 상상을 확장하기  

  골목을 놓고 볼 때 그저 오고가는 길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화초를 키우는 정원, 만남의 장소, 자신을 표현하는 무대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장소는 각자에게 다양하게 해석되고 그에 따라 활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장소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개인적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장소에서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주체적인 존재로 정체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장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기억은 장소에 대한 정체성을 뚜렷하게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장소에 대한 공통된 기억을 공유하면서 집단적 기억, 사회가 공유하는 기억을 만들어낸다. ‘마을카페’라고 하면 물리적 의미에서 카페를 둘러싼 공간적 영역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장소를 상상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지역 주민’을 공간에 초대하는 게 주요한 목표가 되곤 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그래서 대체 ‘주민’이 누구인지 질문하게 되는데 우리도 그랬다. 사실 더 먼저 되었어야 하는 질문은 ‘체화당에서 사람들은 어떤 기억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였어야 했다. 기억이 장소를 구성하고, 공유된 기억이 소비자가 아닌 시민으로서 공간에 접속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 앞으로의 공동체 운동, 특히 장소를 거점으로 한 풀뿌리 운동은 이점에 착안해 장소성에 대한 상상을 확장해야 할 것이다.  


“마을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우리는 결핍된 것을 욕망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이런 구절을 읽으면 무한 감동을 받는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의 칼럼에 나오는 마을이야기를 읽고 ‘그래 이렇게 살아야지’ 다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나의 현실은......” 
‘무소속 주민의 마을은 어디에'(한겨레21, 제1034호)


  우리는 ‘마을’과 공동체적인 삶을 욕망한다. 정확히는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체험한 우리는 각자의 개인적 욕망과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좋은 것’의 괴리를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절망한다. ‘나는 공동체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가 보다.’고 스스로를 탓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실 이웃과 동료를 만들어본 경험이 부족하다. 그런데 공동체는 욕망한다. 대부분 그렇게 욕망하는 ‘공동체’라는 것에는 어떤 틀이 있다. 주소지라던가, 00구 주민이라던가 하는 정체성이 그 틀을 채우는 기준이 되고, 그 틀을 충족시키는 어떤 좋은 활동이 ‘마을’스러운 것이며 공동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작 구체적인 관계의 경험은 부재하지만, 경직된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에 힘들어진다. 어쩌면  ‘청년 마을활동가’라는 새로운 형태의 일감들이 청년 세대에게 ‘주민 흉내’를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갖게 된다. 자신의 삶의 패턴과 동선, 관계의 형태들을 무시하게 되면 그것은 흉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흉내는 서로를 지치게 하기 마련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나 직장을 가고, 학교나 직장에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그 근처의 어딘가에서 저녁을 먹고, 맥주 한잔을 하기도 한다. 자주 가는 공간이 있고, 자주 가는 단골 술집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대중교통을 이용해 집으로 귀가한다. TV를 보거나 인터넷을 하며 하루를 마감하고, 다시 다음 하루가 시작된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도시의 젊은 사람들에게 ‘마을’은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온라인 세계가 공간으로서 많은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재하는 물리적 장소의 중요성은 여전할 것이다. 또한 팬데믹의 경험이 비대면(Untact)을 새로운 기준으로 적극 채택하는 경향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이 전례 없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상호 학습과 민주적 협력이 중요하다고 받아들인다면 그 학습과 협력이 경험이 만들어지는 자리를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 ‘마을’이 그러한 자리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을 수 있지만, 정말 그러할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논쟁적으로 마을이라는 ‘장소'가 다양한 존재의 일상에 어디쯤, 어떤 모양새로 위치하고 있는지 물어야만 한다. 장소성을 확장적으로 상상해봐야 하는 것이다. 체화당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가 제안하는 장소성 확장의 두 가지 키워드는 ‘배움'과 ‘정치'이다. 


당장에 인생을 실험해보는 것


“젊은이들이 당장에 인생을 실험해보는 것보다 사는 법을 더 잘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또 있겠는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성장하는 개인과 제자리걸음하는 조직

  체화당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운영진들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만난 체화당에 대한 공통된 감정이란 고마움과 미안함이 섞인 마음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체화당을 통해 성장했음에 고마워했고, 자신은 성장했지만 조직(과 공간)은 정체해 결국 문을 닫게 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에 미안해했다. 개인은 성장했고, 조직은 정체했다. 체화당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진단이다. 개인도 성장하고, 조직도 성장한 경험을 쌓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개인도 조직도 전부 힘들어진 경험까지는 아니었나 싶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개인은 정체(피폐)하지만 조직이 성장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나 질문도 해보게 된다. 개인이 불행을 기반으로 조직이 성장했다면, 그 성장은 이제 더 이상 성공의 범주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조직의 성장에 대해 다시 한 번 들여다볼 필요성이 있어 보였다. 


‘확장된 교실’

  어쨌든 체화당을 거쳐 간 이들의 감정 속에서 이 공간의 제일 중요한 기능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여기는 카페였지만, 바로 교실이었다. 자기 일의 현장으로 찾는 사람들, 다시 말해 운영진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찾기 위해 어떤 시간들을 기꺼이 체화당과 그로부터 형성된 관계에 투여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거나 삶의 방향을 찾는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자기 삶을 재료로 새로운 것을 실험해보고 싶었던 이들이 체화당이라는 공간을 빌렸던 것 같다. 체화당을 통해 카페 운영을 해보고 싶다든지 등 자기 일의 현장으로 찾는 사람들, 다시 말해 체화당의 운영진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찾기 위해 어떤 시간들을 기꺼이 체화당과 그로부터 형성된 관계에 투여한다.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거나 삶의 방향을 찾는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이신행 교수의 수업이나 풀뿌리사회지기학교라는 구체적인 교실 현장과 연결된 장소라는 특징이 있지만, 결국 체화당 자체도 ‘확장된 교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교실로서의 기능을 중심으로 체화당의 20년을 복기해 보면, 개인은 성장했지만 조직은 정체했다는 총평이 아주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셈이다. 교실이었기에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렇게 성장한 개인들이 문을 닫는 시점까지 서로 연결되어 있어 그 20년을 회고하고 있고, 우리는 복기하고 회고함으로서 이 조직이 정체했던 이유를 최대한 발견하고 드러내면 될 일이다. 


배움이었고, 만남이었고, 발견이었다. 

이렇듯 우리 모두에게 ‘학교’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매일 먼 곳으로부터 집에 돌아와야 하겠다. 모험을 하고, 위험을 겪고, 어떤 발견을 한 끝에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성격을 얻어가지고 돌아와야 하겠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체화당에서 자신을 깨우는 경험을 했다거나, 자신의 일을 직접 발견했다는 고백은 적지 않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구체적인 배움이라 할 수 있는 건 협업의 경험, 동료와의 조우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든 체화당이라는 장소는 동료를 찾기 비교적 용이한 환경이 되어주었다. 체화당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던 정혜성은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친구 따라 카페에 놀러 왔다가 만나게 된 사람들이 결국 제가 이렇게 살게 된 계기가 됐어요.”라며 해남 미세마을로 귀농하게 된 계기를 밝히고 있었다.  


  공공연히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이야기한 지도 십년이 넘었다. 신자유주의가 장악한 생활세계, 강화된 불평등의 양상이 학교에도 고스란히 전이되었고, 여러 가지 위기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는 동료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배움의 계기와 자리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성찰적인 질문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급변하고 있는 미디어 환경 역시 이러한 질문들을 더 확대하고 있다. 이른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등장했고, 변화된 미디어 환경은 사고하는 방식과 소통 구조 전반에 아주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긴 글보다는 짧은 글, 문자보다는 영상이 배움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기후변화와 같은 생태적 위기와 젠더 이슈를 포함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형태의 협력과 그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시민이 필요할지 생각해보면 단정적이고 즉자적인 특징을 지닌 뉴미디어에서 학습한 리터러시(문해력)가 과연 복잡하고 치명적인 현재의 위기를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인지 질문하게 된다. 게다가 COVID19는 감염병 확산이라는 크나큰 변수의 존재감을 강력히 확인시켜 주었다. 새로운 표준(뉴노멀)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고 비대면(Untact)이 After Corona시대의 뉴노멀로 의심 없이 인정되는 흐름마저 존재한다. 매우 난감한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학습하고 성장하는 계기가 필요한 시대를 마주했다. 욕망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대응할 수 없는 문명전환적 위기를 만났기 때문이다. 특히 요구되는 학습과 성장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확장하는 형태 속에서 만들어질 그것이다. 


  하나의 큰 교실이었던 체화당의 경험이 교육 불가능의 시대, 그럼에도 강력한 변화와 학습이 요구되는 시대에 힌트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구체적인 장소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실험하며, 그 실험을 공동으로 기록하고, 협업을 통해 모든 일을 추진해야만 했던 카페 체화당이라는 교실이 다행히도 이 교실을 거쳐 간 사람들에게 성장의 기억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이들의 각자의 삶이 우리 사회가 마주한 복잡한 위기를 증폭시키지는 않을 형태라는 것,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문제들을 직시하고 대안을 만들어가는 영역에 자기를 위치 짓고 있다는 것이 체화당이라는 힌트의 가장 큰 매력이다. 작은 규모 역시 강점이다. 왜 Before Corona 시대의 표준이 되는 대면(Contact)는 하나같이 크고 거대하며 밀집되어 있고, After Corona 시대의 새로운 표준이 되는 관계는 갑자기 비대면(Untact)가 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 배우고 성장하며 지키는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COVID19와 같은 감염병 확산 국면에도 안전하며 기후위기를 가속화하지 않을 회복력 있는 규모와 형태의 공적인 자리들을 새롭게 구상해야 한다. 체화당, 특히 풀뿌리사회지기학교라는 대안대학과 연결되어 있는 이 구조와 규모가 어쩌면 힌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억을 만드는 장소가 새로운 시민을 만든다 


  카페, (독립)서점, 베이커리, 복합문화(커뮤니티)공간 등 요즘처럼 공간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 때도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지역 곳곳에서 공간을 매개로 한 2,30대 창작자 그룹들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한 때는 공간이 없어서 마을만들기가 잘 안 되는 줄로만 알고 유휴 공간, 공유 공간, 마을 공간, 마을예술창작소, 무중력지대 등 공간을 찾거나 만들기에 주력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셈이다. 장소에 대한 권한이 이전되지 않고 시민을 공간의 소비자로 초대하는 공공공간의 운영은 마을도, 사회도, 어떤 관계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는 건 보이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새로운 관계망, 확장되는 질문, 장소성에 대한 상상, 협력의 조건, 이런 것들은 성과로서 쉽게 가시화되지 않는다. 그러니 잘 목표가 되지도 못한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복잡한 세계, 서로 연결된 치명적인 위기들이 일상을 도처에서 위협하는 시기에는 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코로나19 감염병 확산을 통해 우리는 똑똑히 확인하지 않았는가. 이미 위기의 원인과 그 형태 역시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위기는 보이지 않는 것이 되어 더욱 매섭게 개개인의 일상을 공격해오지만, 이 위기를 막아낼 힘이 우리에게 있는지 질문하게 되면 난감한 마음이 된다. 


  이 복잡하고 치명적인 위기를 막아낼 힘을 만들어내는 것은 2020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최대 과제임이 틀림없고, 그 힘은 분명 만들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리고 아마 이 위기 상황 속에 발휘될 우리의 힘이 만들어질 단서는 바로 ‘기억의 장소’를 다시 복원하는 작업으로부터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 힘의 본질은 더 많은 시민들이 사회변화에 개입하게끔 하는 것이다. 돈이 없는 이도, 소유한 집이 없는 이도, 정상가족 범주 바깥에 있는 이들도 동등한 시민으로서 변화에 참여할 계기를 갖게 되고, 실제로 정치사회적 활동에 참여함으로서 무언가 바뀌는 효능감을 경험할 때 위기를 증폭하는 강력한 원인들은 흔들린다. 그게 민주주의가 파국을 막는 힘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계기와 경험을 갖는 것이 쉽지 않다. 오히려 바뀌어가는 도시의 경관은 참여의 계기와 효능감을 경험하기 전에 훌륭한 소비자로서 시민을 훈련시킨다. 


  계기가 만들어지는 가장 확실한 지점은 바로 ‘기억’이다. 소중한 장소, 지키고 싶은 공동체에 대한 기억, 그 기억이 개입의 의지로 이어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소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제 그 기억들이 희미해진다. 1년 사이에도 골목과 상권은 몰라보게 바뀌고, 우리는 그 변화에 익숙하다. 오히려 변화에 참여한 경험은 극히 드물고, 적응한 경험만 쌓여간다. 우리의 감각은 어떤 변화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맞춰진다. 애초에 감정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피곤한 애정의 기억을 스스로 생산하지 않는다. 어제 스타벅스가 있던 자리에 그 다음날 할리스 커피가 들어온다고 우리가 아쉬울 것은 없다. 다른 스타벅스를 찾아가면 되고, 할리스 커피에 다시 익숙해지면 된다. 이렇게 참여보다는 적응에 익숙해진 개인, 소비자로만 이 도시와 거리, 지역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치는 그저 소비하는 예능 프로그램, 스포츠 게임 같은 것일 뿐이다.  


  체화당의 스무 해는 사실 장소에 그런 기억을 부여하고, 그 기억을 공동으로 소유했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체화당이 잘한 것은 꽤 여럿에게 인상에 남을만한 기억을 남겼다는 것이고, 못한 것은 그 기억을 보다 잘 기록하고 더 공동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이다. 기억이 공동의 것이 될 때 권력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런 장소들이 사라지지 않고 더욱 많아져 없어지면 안 되는 장소의 기억을 가진 시민들이 더욱 많아질 때, 기후위기와 불평등 문제와 같은 위기를 헤쳐 나갈 힘도 조금씩 보태어질 거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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