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화당이 던진 질문 (5)
카페는 상업 기능 공간과 사회적 기능 공간 두 가지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카페를 통해 사회적인 임무를 다하는 것뿐만 아니라 수익 역시 얻기 원했다. 공공적인 것과 상업적인 것 사이에서 공공성을 유지하고 이를 조율하는 부분은 쉽지만은 않았다. 또한 카페로서 수익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압박에 놓여 있었다. 공공성을 지향하지만 체화당(제3의 장소)은 민간이 운영하므로 수익을 내야 한다. 하지만 체화당은 끝내 경제적 안정을 구축하지 못했다.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 수익 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늘 체화당 운영의 불안함의 요소가 되었고, 또한 문을 닫는데 있어 어느 정도는 결정적이기도 했다. 체화당은 카페 수익으로 신촌민회와 풀뿌리사회지기학교를 지원하는 구조로 설계됐다. 하지만 매니저 인건비가 겨우 나올 정도로 운영은 늘 어려웠다. 운영진들의 희생과 이신행 교수의 무상 임대 덕분에 그나마 이 공간이 유지될 수 있었다.
<매니저 인건비 충원 구조>
체화당 운영이 5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 두 일감에 대한 경제적 지원 역할을 대신할 ‘풀씨재단’이라는 조직을 만드는 작업이 잠깐 시도되었다. 티셔츠, 스티커 제작 등 기발한 아이디어로 완판될 정도로 우리 작업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적지 않은 후원금까지 조성된 바 있다. 그 이후 특히 부족한 매니저 인건비를 메우기 위해 바자회, 체화당 엽서 판매 등 여러 시도들이 간간히 있어 왔지만 이는 단기성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2007년 매니저 인건비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CMS가 당시 유지숙 간사에 의해 제안되었다. 아직 법인과 같은 구조를 스스로 갖추지 못하고 있던 때라 매달 적지 않은 월정액이나 제대로 납부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며 회의적인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체화당 운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동안 직간접적으로 체화당을 지원했던 5명이 각각 10명씩을 맡아 후원자로 만들기로 하였고, 송년모임도 기획해 초기 CMS구조를 구축하였다. 다행히 우려했던 월정액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아쉽게도 기대치에는 도달하지는 못했다.
이후 2008년 카페 체화당과 풀뿌리사회지기학교, 신촌민회를 목적사업으로 하는 사단법인이 만들어지며 CMS 관리는 사단법인의 몫이 되었고, 한동안 CMS를 통해 후원된 모금액 중 체화당 쪽으로 후원하고 싶다는 해당되는 금액이 매달 체화당 운영 계좌로 보내지는 방식으로 독립적 경영 원칙을 지켜가려 했다. 체화당 후원 금액에서 매니저의 인건비를 포함한 운영비를 자체적으로 관리하고 책임지도록 한 구조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구조는 2015년을 지나며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그 배경에 있어 우선 2014년 하반기부터 매니저 자리가 공석인 상태가 길어졌고, 카페로서 공간을 유지하고자 2015년 풀뿌리사회지기학교에서 배울이 두 명의 아르바이트생을 두며 8월까지 운영해나가긴 했지만, 2015년의 체화당은 또다시 공백기를 맞이했다.
김혜진 첫 간사는 음료 준비, 공간 세팅, 청소 등 카페로서 기능하게 하는 것이 예상보다 어려웠고, 카페로서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공간의 문제, 홍보나 시스템, 개인의 문제 등-가 무엇인지 분석해내기가 어려웠다고 당시의 고충을 토로했다. 게다가 외진 공간이라 손님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늘 홍보에 대한 고민이 무엇보다 컸다. 금화터널을 오고가는 8차선 도로에 바로 인접해있는 스타벅스 연대동문점 마감 시간이 오후 9시임을 감안할 때 이 동네가 얼마나 외져 있는지 그래서 사업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체화당으로서는 유인의 최선의 방법이 프로그램이었고, 그래서 체화당은 프로그램을 계속적으로 기획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체화당에 커피 맛을 기대하고 오는 손님들은 거의 없었지만 카페라면 응당, 게다가 카페 수익을 기대했다면 기본적으로 커피 맛은 확보되어야만 했다. 체화당은 오픈한 지 3년째가 되어서야 카페로 수익사업을 시도, 이른 아침 문을 열고 베이글과 커피 판매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7년 중고 커피 머신을 들이면서 여느 카페와 같은 커피를 추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YMCA로부터 소개 받은 바리스타 위은영씨가 파트 타임으로 고용하면서 커피 맛에도 신경 쓰는 카페로서의 모습을 잠시 갖추기도 했다. 하지만 매니저 선발에 있어 커피 능력이 주요하게 고려된 바가 없었다. 심지어 커피를 좋아하지 않거나 체질상 마시지 못하는 매니저까지 있었다. 당연히 커피에 자신이 없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운영진 대부분은 커피 메뉴를 주문받을 때마다 긴장,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렇게 늘 커피 맛을 의식하며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커피 맛 때문에 고민할 때마다 카페 사장들의 도움을 종종 받았다. 금화터널 너머 성곡미술관 골목에 자리한 카페 ‘커피스트’ 조윤정 사장은 2007년 매니저에게 자신의 커피 수업을 흔쾌히 제안해주셨고, 충정로 가배나루 사장은 원가에 가까운 원두제공은 물론, 커피에 대한 조언과 함께 2012년 매니저에게 일대일 커피 교육까지 해주었다. 그리고 체화당 인근에 자리한 ‘라 본느 타르트’ 김희연 사장 역시 체화당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카페 운영에 있어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커피 문화가 확산되면서 카페가 운동이나 작업의 중요한 흐름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카페를 연다고 해서 지역주민들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카페 오픈에만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카페에 대한 지식이나 운영의 전문성 확보에도 신경을 써야 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외부인들도 이곳을 매력적인 공간으로 여길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운동이나 작업은 외연으로 확장되기 어렵다.
카페로서의 존립을 어렵게 했던 또 하나의 원인 중 하나는 현실에서는 구현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다중 이해관계자들의 다목적 공간이라는 체화당의 특성이 있다. 체화당은 수익을 내야 하는 카페이기도 했고, 신촌민회가 한창 역할 할 때는 민회의 회의장이기도 했으며, 풀뿌리사회지기학교의 캠퍼스였다. 풀뿌리사회지기학교 학생들이 10명을 넘어서게 되면 카페로서 체화당은 사실상 영업이 힘들어지고, 동네탐험대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당연히 체화당도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가 더 강력한 주도권을 발휘하기는 힘든 구조였는데, 체화당을 운영하는 매니저들은 공간의 관리자로서 이를 매우 힘들어했다. 그러다보니 여러 긴장과 갈등이 실제로 발생하기도 했는데, 특히 수업료를 지불하고 이 장소에 접속하는 풀뿌리사회지기학교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구체적인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불만이 관계 안에서 충돌한 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2013년에는 장소를 사용하는 여러 구성원들이 체화당의 사용규칙을 함께 만드는 시도를 한 적도 있었는데, 당연히 그 한 번의 자리가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결국 정동욱 매니저 이후로는 풀뿌리사회지기학교 학생들이 매니저로 역할하기 시작했는데, 2015년 이후로 체화당의 주요 목표 중 카페로서의 자립과 경영적인 독립이 희미해진 것이 사실이다.
카페 운영만으로도 쉽지 않은데, 프로그램 운영(게다가 사회만들기라는 과제도)까지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 하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만드는데 실패한 첫 번째 요인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체화당과 같은 대안공간들이 꽤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런 공간들 중 많은 곳이 결국 문을 닫았거나 여전히 운영에 어려움을 안고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운영하거나 지원하는 공공공간도 많아지는 추세이기 때문에 이런 공간들과의 차별성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한 공간들은 특히 더 어려워진 것 같다.
지속적인 활동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커뮤니티 공간을 통한 수익 구조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체화당과 비슷한 공간들을 찾아다녔다. 20여 년간 우리 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체화당은 철저히 카페로서 가야한다, 위치나 커피의 질적인 면에서 카페로서 운영은 어렵다고 판단해 과감하게 이 부분을 포기하고 프로그램에만 집중해야 한다 등이 항상 존재하는 이견이었지만, 선택과 집중에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불가피하게 두 가지 숙제를 동시에 가지고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과론적으로 카페를 통한 수익 구조를 기대한 애초 체화당의 구상은 잘못된 계산이었다. 종종 치열한 토론이 있었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되돌아보면 우리는 그 경계에서 선택을 했어야만 했다. 어느 한 쪽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이 어려웠다면 순서를 정하는 문제였을 수도 있었다. 만약 체화당과 같은 공간을 다시 시작한다면 우리가 자신 없는 커피를 선택하기보다는 자신 있는 그 무언가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지금은 과감히 커피를 포기하고 프로그램에 집중했어야 한다고 보는 운영진들의 의견이 많았다. 부산의 ‘생활기획공간 통’이 그 선택을 했다. 금정구 장전역 출구 맞은편에 자리한 2012년의 통 공간은 카페로서 나름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카페로서의 공간은 애초에 과감히 포기하고 그들이 하고자 하는 작업에만 집중해 나갔고, ‘통 사람들’은 지역의 리더들로 잘 성장해 나갔고, 지금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체화당도 카페가 아니라 자기 삶을 실험하는 ‘교실’이라는 브랜드로 만들어나갔다면, 우리가 자신 있는 일을 가지고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나갔다면 우리의 정체성, 차별성을 잘 드러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한편으로 체화당이 카페이니만큼 카페 운영을 해보고 싶어 운영진 역할을 자임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자기 공간(카페, 책방 등)을 운영하고 싶다는 로망을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 체화당은 자기자본 없이 이 로망을 실현해 줄 좋은 기회였던 셈이다. 카페로서 체화당을 접근했던 이들은 런던의 커피하우스나 프랑스의 살롱처럼 사회적 공간에서 카페(공간)가 던져주는 분위기와 커피가 주는 윤활유 역할이 결코 작지 않음을 지적했다. 카페 운영에만 집중함으로서 커피 맛으로 다양한 고객층을 확보해 우리 작업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체화당과 비슷한 쇼셜 카페들을 찾는 손님들 면면을 들여다보면 제한적이다. 자기 작업의 전환점을 원한다는 이제는 우리 편의 응원과 격려를 넘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저 너머의 사람들에 대한 적극적인 접촉과 설득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교토의 ‘hanareXSocial Kitchen'처럼 프로그램은 외부 워킹그룹(Working Group)을 활용하는 것도 그 방법이 되었을 수 있겠다. 이제야 드는 의문은 어찌보면 신촌민회, 풀뿌리사회지기학교도 넓은 의미에서 워킹그룹이라고도 볼 수 있었는데, 굳이 체화당까지 나서서 프로그램을 운영할 필요성이 과연 있었는지 공간의 정체성만 분명히 드러낸다면 우리와 결이 맞는 워킹 그룹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체화당이 던져준 오랜 숙제, 공공적인 것과 상업적인 것 사이에서 공공성을 유지하면서 안정적인 수익을 유지하고 있는 공간들을 여전히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