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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과 태영 Oct 20. 2020

마을은 정말 세계를 구할까?

체화당이 남긴 질문 (2)

마을은 정말 세계를 구할 수 있을까?


  체화당에서 자주 읽히는 책들이 있었다. 물론 이 책들은 풀뿌리사회지기학교의 주 교재에 가까운 책들이기도 했지만, 어차피 운영진들이 겹치고 체화당의 만들어 진 여러 프로그램들이 풀뿌리사회지기학교의 구성원들을 통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듯 하다. 그래서 어떤 책들이었는가 하면, 마하트마 간디의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헬렌 니어링·스콧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과 같은 책들이다. 누군가는 체화당을 오랜만에 찾으면 “체화당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아요.”라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 분위기를 만들어낸 데 일조한 책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는 책 제목은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과 같이 ‘마을공동체’에 여러 가지 기대를 걸고 있는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사실일까? 마을이 정말 세계를 구할 수 있을까? 


  20세기의 아주 중요하고 커다란 특징으로 ‘급격한 도시화’를 꼽는데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도시화는 산업화와 함께 오늘날의 풍족한 일상을 가능하게 만든 원인이자 결과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 존재감은 동시에 지금 우리가 마주한 여러 가지 ‘큰’ 문제들(기후위기와 같은 생태적 문제와 불평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의 원인으로서 지목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최근 들어 공동체적인 접근은 언제나 세상을 구할 해법으로 기대를 받곤 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시민사회단체 출신 박원순 서울시장의 등장은 민간 영역에서운동 차원으로 시도되던 다양한 마을공동체 활동들을 행정의 사업으로 확대해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중간지원조직이 만들어졌고, 중간지원조직과 보조금 사업을 통해 추진되는 마을공동체 사업은 서울을 넘어 전국 각지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을공동체는 도시와 사회가 부딪힌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지팡이처럼 호명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마법의 지팡이를 행정(지방자치단체)이 쥐게 되니, 뭔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프로그램 대상이 되어버린 마을


  풀뿌리사회지기학교는 2017년 서울 서대문구 시민협력플랫폼의제안과 지원으로 「서대문구 시민사회현황 및 활동가 욕구조사」를 진행한 바 있다. 이 조사는 서대문구 138개 시민단체 및 각종 주민모임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설문에 응한 138개 단체나 모임 중 3분의 4 이상이 2011년에 설립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즉, 시민운동가 박원순이 보궐선거를 통해 서울시장이 당선된 후, 마을공동체, 사회적경제, 도시재생 등의 영역을 급격히 제도화하는 중에 등장한 모임들이대다수였다는 것이다. 이 조사에서 드러난 눈에 띄는 특징으로는 첫째, 회비 의존도는 낮아지고 자원 활동가 비율은 줄어들며, 보조금의 비중이 커지는 변화의 경향이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설문에 응한 단체 혹은 모임의 구성원들은 ‘서대문구 시민사회에 어떤 것이 필요한지’ 묻는 질문에 ‘민관협력’(39.2%), ‘자생력’(25.8%), ‘정부지원’(24.2%), ‘민민협력’(10%) 순으로 응답한 특징이 있다. 조금 거칠게 정리하자면, 협력의 파트너는 시민사회 영역의 다른 동료시민이라기보다는 ‘행정’이 된 셈이다. 물론 전통적인 방식의 시민사회 조직(운동을 지지하는 시민들로부터 후원금을 모아 자립하는 방식)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사회경제적 맥락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흐름의 유일한 원인으로 제도화 된 사회운동을 지목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흐름이 보여주는 적어도 ‘마을공동체’를 통해 대항하려 했던 여러 가지 사회 모순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모순에 대항하기 위해 공동체적인 해법을 선택한 맥락이 있었을 텐데, 정작 강화된 것이 개인과 개인 간의 유대나, 민간 조직의 활성화가 아니라 행정과의 파트너십이라면,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치열하게 질문해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강화된 것이 ‘행정과의 파트너십’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도록 하자. 행정을 경유하게 되면 대표적으로 접하게 되는 것은 목표로서 존재하는 ‘정량적 지표’이다. 참여한 사람의 숫자, 행사의 횟수, 000을 설치한 가구 수 등이 그 지표가 된다. 여기서 첫 번째 왜곡이 발생하는데, 아래로부터 방식(Bottom Up)을 정책의 철학으로 설정하였지만, 관료제 안에서 그 철학의 성과를 증명하기 위해 위로부터 방식(Top Down)으로 프로그램을 집행한다. 그러다보니 동원의대상이 바뀌었을 뿐, 보조금 사업 참여자들은 잠재적이고 장기적인 동원대상이 되어간다. 게다가 이전의 동원 대상(직능단체와 같은)보다 훨씬 더 관료제의 훈련을 잘 받은 동원대상이 탄생한다. 마을공동체를 포함해서 보조금 사업의 프로그램이 된 이상, 사업의 참여자들은 각종 집행지침을 훑고 지침에 맞게 예산을 집행하는 것이 시민으로 성장하는 경험이 된다고 착각하게 된다. 훈련된 주민으로 성장한 ‘마을지원활동가’가 보조금 사업에 처음 진입하는 신규마을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오리엔테이션 행사에서 아이스 브레이킹 차원에서 던진 질문이 “인건비 원천징수는 얼마부터 발생할까요?”였던 신기한 경험도 기억난다. 


  마을공동체가 관료제의 프로그램이 되며 발생하는 두 번째 왜곡은 바로 칸막이 행정 그 자체이다. 칸막이 행정은 일 자체를 번거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종합적인 목표를 서로 공유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마을공동체를 담당하는 부서와 기후변화를 담당하는 부서가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지 않는다. 그러니 보조금 사업에 참여하는 시민들도 주관 부서의 목표와 지침 안에서 각자의 활동을 모색하고, 이는 마치 시민들 역시 소속 부서가 생기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 이런 흐름은 기후위기나 불평등문제처럼 거대하면서 일상에 치명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안들을 대응하는데 있어 매우 취약한 체질을 만들어낸다. 기후위기(와 생태적 위기)와 불평등을 포함해서인간성의 상실 같은 산업사회 이후에 등장한 문명적 위기들을 극복하기 위해 언급해 온 ‘공동체’에는 반자본주의, 반국가, 탈산업사회 등의 의미부여 작업이 있어 왔다. 행정의 칸막이는 행위자들로 하여금 이런 의미부여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장려한다. 마을축제를 지원하는 예산은 해당 축제가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파괴하지는 않는지 검토할 것을 지침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앵커시설이 에너지효율이 아주 좋지 않은 통유리 건물로 만들어지는 사례도 등장한다. 문제는 모두 연결되어 있지만, 관료제는 이 당연한 진실을 전혀 인식하지 않는 것 같다.  


마을이 구하려는 세계에는 누가 포함되어 있는가?


  한편, ‘마을’과 ‘공동체’를 강조하다보면, 자연스레 정상가족(결혼과 출산으로 구성된 4~5인 규모의)을 중심에 두게 되는 경향이 있다. 체화당도 마을 카페라고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여러 기획들을 진행할 때 항상 긴장 했던 지점이다. 체화당에도 의심의 여지없는 ‘주민’들이 자주 드나들던 때가 왕왕 있었는데, 주로 어린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맺어진 관계가 발전한 경우다.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이 활발하게 되면 체화당으로서는 몇 가지 고민에 부딪히게 되는데, 첫 번째로는 어린이들이 많은 장소와 청년들이 많은 장소가 동일한 장소이기 어렵다는 점이다. 체화당 마당에서 담배를 피는 청년들을 어린이(와 부모)들은 견디기 힘들고, 어린이들이 뛰어다니는 공간에 청년들은 카페로서 기대를 갖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 고민은 특히 공동육아와 같은 관심사를 갖고 그 기대를 체화당이라는 공간에 투영하는 주민들의 감각과 체화당이 맺어 온 여러 관계들이 충돌할 때 발생한다. 언젠가 퀴어문화축제의 사전 행사격으로 퀴어 작품을 체화당에 전시한 적이 있다. 체화당은 광장 바깥에 존재하는 일상의 영역에서 광장의 언어들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공간이기를 스스로 바랐다. 그 전시도 그러한 지향과 고민에서 선뜻 공간으로서 연대한 것이다. 그런데 전시 기간 중 체화당을 자주 활용하던 학부모와 어린이들의 모임이 하루 잡혔다. 사전에 행사를 준비하러온 분께서 그날 하루만 전시된 그림들 중 몇 개를 가려줄 수 있는지 부탁하셨다. 우리는 매우 난처했지만, 여러 가지 고민 끝에 결국 그 행사 시간에 맞춰 요청하신 그림을 잠시 가리는 결정을 했다. 사실 광장의 언어가 일상에 들어오는 구체적인 장면을 마주한 셈인데,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앞서 질문했듯이, ‘누가 마을의 주민’으로 주로 호명되는지 살펴보는 작업은 사실 권력의 문제를 직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권력의 문제를 직시할 때 절대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견고한 권력으로 존재해온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여성의 무급돌봄노동을 전제로 가족임금제를 기반 삼아 성장해 온 산업사회의 한계를 넘어보겠다고 선택한 공동체적인 시도가 정작 이 가장 오래된 모순을 직시하지 않는 경향도 분명 존재한다. 예컨대,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여성의 당연한 무급 돌봄 노동을 중요한 모순으로 인지하는데 도움을 주며 인용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렇듯 공동체를 낭만으로 소환할 때, 자칫 빠지기 쉬운 오류는 공동체를 가족 중심적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남성 중심 가부장제는 회피하면 되는 위기의 주변 요소가 아니라 가장 본질적인 연결고리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낭만화 된 공동체가 정상가족을 주민으로 호명할 때 소외되는 소수자들이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돈독함의 이면에는 배타성이 존재한다. 마을이 대안이 되려면, 돈독함을 만들고자 설정한 여러 가지 경계들이 도시의 다양성을 파괴하지는 않는지, 시민권을 사실상 제한하는 것이 아닌지 늘 성찰해야 한다. 

  돈독함(멤버십에 기초한 공동체적인 문화)과 배타성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고민은 체화당이라는 작은 장소에도 고스란히 투영되는 고민이었다. 우리는 체화당이라는 공간이 공동체적으로 끈끈한 관계가 형성된 공간이 되기를 항상 바랐고, 어느 때건 그런 관계망이 존재했으며, 그 관계망이 체화당을 운영한 힘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이 공간은 ‘열린 카페’로서의 매력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체화당 문 앞에까지 와서 “여기 카페 맞나요?”라고 묻는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형성된 공동체적인 공기는 이 공간에 새롭게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멤버십과 배타성의 문제는 체화당이라는 작은 장소에서도, 체화당이 위치한 도시 공간에서도 동일하게 질문하게 되는 것이었고, 이 질문을 더 여럿이 함께 고민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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