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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과 태영 Oct 20. 2020

아주 약간의 힌트

우리가 실패한 것들에 대해 

  이제 우리가 실패한 것들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실패했다는 단정적인 표현을 우리 안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지만, 그래도 한계를 마주하고 평가를 남겨 조금이라도 무언가 이어지게끔 하기에는 실패를 인정하는 것만큼 좋은 태도가 없다. 우리의 한계가 여러분에게는 작은 힌트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적어 보았다. 


조직화 부족, 커뮤니티 디자인 설계 부재


  체화당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조직하는 것’이 내부적으로 항상 중요한 문제였다. 체화당의 여러 기획들은 커뮤니티 개발(Community development)에 대한 구상, 구성원들과 동료 시민들의 커뮤니티 역량 강화(Community Empowerment)에 대한 계획이 부재했다. 20년간 꾸준히 이어져 왔던 체화당의 간판격 마을일감인 체화당 마을음악회, 체화당 어린이학교는 사실 커뮤니티 역량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기획된 프로그램들이었다. 물론 어린이학교의 경우 지속적으로 부모 조직을 시도했다거나 동네탐험대로 넘어오면서 지역사회의 다른 관계망과의 결합을 고려하긴 했지만 부족했다. 적지 않은 실패를 겪었지만 발전시켜 나가지는 못했다. 아이디어의 부족과 이를 제대로 실행할 다양한 전략들과 효율적인 과정을 구축하며 프로그램을 이끌어가지 못했다. 그만큼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되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수단으로서만 그 역할을 했어야 할 프로그램들이 목적 그 자체가 되어가면서 그저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소비되어 온 것이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매번 기획의 목적을 묻는 작업은 피곤하다.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고, 옥상옥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오고갈 확률도 높다. 게다가 목적을 구성하는 가치지향적인 언어를 보다 쉽게 사용하는 이들이 회의를 주도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회의 공간의 묘한 긴장도 존재한다. 그러다보니 그런 이야기 자체를 점차 안 하게 된다. 그런데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은 필요 없는 가치 지향적 단어들을 남발하는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장기적 관점(방향성)을 공유하는 것에 그 명확한 필요가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여러 프로그램들이 적어도 10년 정도의 장기적 관점에서 지역사회는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 참여자들은 어떻게 성장하게 할 것인 질문할 때 사업의 ‘목적’이 확인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조직화라고 부르는 긴 호흡의 관점, 참여를 디자인하는 구체적인 설계가 부족했다, 아니 냉정하게 말하면 없었다. 이것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다. 목적이 희미해질 때 장소는 노쇠한다. 해본 것은 점점 많아지고, 당연히 잘 안된 것들도 점점 많아질 텐데, 그걸 왜 했는지 잘 질문하지 않게 되고, 왜 잘 안 되었는지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 그러면 새로운 사람이 접근할 때 해봐선 안 된 것들은 많은데, 왜 안 됐는지는 잘 모르는 이상한 공기가 장소를 점령하게 되고, 이 공기가 공동체와 장소의 노쇠를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 문제는 이것이 비단 체화당만이 가진 한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프로그램 중심으로 운영되는 지금의 마을공동체지원사업, 공간(카페)운동 모델이 봉착하고 있는 문제라는 점에서 함께 고민해봐야 한다.


교실공동체가 가진 한계

 

  체화당의 결정적 한계를 하나 더 짚고 넘어가면 좋겠다. 우리에게는 체화당과 체화당을 둘러싼 구조(사단법인)가 사실 운동의 제안자이자 공간 기여자인 이신행 교수의 대학 내 연구실의 관계 맺기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성찰의 지점이 존재한다. 그 한계들을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관계의 애매함이 존재했다. 사제지간, 선후배 관계가 여전히 작용하면서 법인 이사회 등에서 이니셔티브가 누구에게 가 있었는지 의사 결정이나 책임체계 구조, 소통 구조 등 민주적인 조직 조직 운영 방식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구조의 재구성이 간간히 제기되면서 논의되기도 했지만 결국 발전시켜 나가지는 못했다. 가끔 2005년 각 일감(체화당, 신촌민회, 종로민회, 풀뿌리사회지기학교, 풀씨재단)의 운영자들로 구성된 ‘전체협의회’처럼 위계(hierarchy) 대신 합의를 통한 협력을 추구하며 기본적으로 중심성을 갖기보다는 우리 일감을 포함한 다양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운영해 나갔다면 어땠을 까라는 상상해 본다. 


  둘째, 공간 정체성이 불분명하고 복잡함이 있었다. 교실에서 만들어진 구상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그 구상을 쉽게 수정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체성을 찾고 만들어나가는 과정 중에 있었던 초기 운영자들이 어려움이 많았다. 결과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사실 비즈니스 모델이라기보다는 그냥 통째로 ‘학교’와 같은 기능을 한 장소였는데, 이 애매함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탓에 카페로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학교와 같은 기능을 하는 역동적인 장소성을 확장해보는 작업에 신경 쓰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비즈니스 모델로서 발전가능성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짧은 호흡


  위와 같은 난감함들 때문에 안정적인 리더십 구조가 만들어지지 못했다. 매니저들이 바뀔 때마다 리셋이 되다보니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장기점 관점의 공간 운영을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연속성은 너무나 중요한 요소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매니저, 간사들의 근무 기간은 평균 5~8개월이었고, 1년을 넘긴 매니저는 고작 단 3명에 그쳤다. 그만 둔 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조직의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작업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공유 부족, 모호한 결정 구조, 체화당과 법인간 소통 부족, 상호 신뢰 결핍, 무엇보다 불분명한 권한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조직의 방향과 운영 방식이 복잡하다보니 리더십 충원도 폐쇄적이었다. 이 폐쇄성이 조직의 변화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차단하는 건강하지 못한 순환 고리를 완성했다. 즉, 다양성의 경계를 넓히지 못했다.  

  이 순환 고리는 자연스럽게 체화당의 짧은 호흡으로 이어졌다. 2012년 운영진들이 일본의 여러 커뮤니티 공간을 탐방하면서 체화당은 마치 단거리 주자, 그들은 마라톤 주자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했다. 물론 한국와 일본 시민사회의 축적된 경험과 습관의 차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체화당의 짧은 호흡을 지적한 이는 비단 이들 뿐만은 아니었다. 달리기 주자가 결승점이 어디인지 모르고 뛰어가는 것처럼 매니저들이 처음 체화당을 맡았을 때 어떻게 이끌어 가야할지 몰라 이리저리 허둥이고 헤매였던 시간들이 있었다고들 이야기하고 있다. 어쩐지 공통의 비전을 갖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여러 가지 역동성과 복잡함에 대한 고려에 비해 장기적 관점이 실로 부족했던 우리를 돌아볼 수 있었다. 우리 작업에 대한 자기 학습과 공유가 부족했고, 방향성, 미래의 그림(중장기 비전) 등 이슈와 목표를 구체적으로 구상하는 작업이 부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안에서 함께 진지하게 논의하거나 서로의 생각을 공유해 본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장기적 관점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조직 내의 건강하고 적당한 권위가 형성되어야 한다. 지역사회를 조직하겠다는 목표만큼 중요한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기획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교실로부터 시작돼 교실로 이어진 체화당은 건강한 권위를 형성하는 자기조직화를 못해냈고, 장기적 관점을 갖지 못했다.


협력의 조건을 고려하는 공동체


  모든 사회적 실험의 현장들이 일터로서 노동에 대해 공정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전제가 되었다. 당위적인 목표가 조직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이 전제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느렸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이제 이해가 안 되면 외워야 하는 수준의 사회 규범이 되었다고 생각하자. 하지만 모든 활동이 임금노동이라는 조건으로 이뤄지는 것만도 아닐 것이다. 생태사회주의자 앙드레 고르스가 우려했던 것처럼 우리가 임금을 주지 않는 모든 노동의 폐지를 주장하는 순간, 임금노동 제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은 옅어진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관점이다. 어쨌든 체화당과 같은 장소의 운영에는 자발적인 협력이 어떻게 만들어질 것인지에 대해 충분히 숙고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협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어떤 조건에서 협력이 만들어지는지 충분히 살피지 않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협력마저 옳고 그름의 이분법에서 옳은 것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수준에 머무른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언제 서로 협력하게 될까. 

  첫 번째 상황은 조직과 공동체에 대한 명확한 권한이 확인될 때이다. 그리고 그 권한을 행사하는 방법이 즉자적으로 확인될 때이다. 어떤 회의체에 들어가면 된다거나, 그 회의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책무가 있는지 쉽게 확인될 때 사람들은 책무와 권한의 경중을 재어가며 협력할지 아닐지를 판단하게 된다. 물론 실제 책무에 따른 권한이 잘 작동하는 조직이 일하기 좋은 조직이다. 협동조합이 항상 민주적이고, 주식회사는 비교적 평등하지 않은 권력구조에 노출된 조직으로 단순히 인식하는 것은 그래서 문제적이다. 주식회사든, 마을기업이든, 협동조합이든, 사단법인이든 원칙은 동일한 것 같다. 행위자에게 권한과 책무의 행사 방식이 쉽게 확인되어야 하고, 확인되는 의사구조가 기만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 그 구조가 정확히 확인된다면 그 형태는 그 다음 문제가 된다. 교실에서 시작해 적당한 다른 권위를 만들어내지 못한 체화당의 뼈아픈 경험에 근거한 성찰의 기록이다. 


  장기적 관점 역시 협력을 증진시키는 데는 아주 필수적이다. 관계가 지속된다는 신뢰가 있을 때 개인들이 서로 협력할 명분도 강력해질 뿐더러, 긴 호흡에서 사회와 개인의 관계 맺기를 상상할 때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는 시민으로서의 정체성도 강화된다. 그 과정에서 국가나 사회의 미래만 장기적으로 구상한다거나, 개인의 미래만 긴 호흡에서 기획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둘을 통합적으로 연결하는 경험들이 중요할 것이고, 앞으로의 배움은 사실 개인과 사회의 미래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기획할 수 있는 덕목 중심으로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간 거점의 마을만들기, 사회만들기 작업은 그 공간에서 개인이 어떤 학습의 경험을 갖는지를 중요하게 살펴야 하고, 그게 가능한 자기조직화가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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