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화당이 남긴 질문 (1)
비단 시민사회단체뿐 아니라 그 형태가 기업이든 협동조합이든 비영리단체든 간에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를 정체성 삼은 조직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것을 체화당도 당연히 겪었다. 20세기를 관통하며 만들어진 여러 영역의 사회적 작업의 성과란 그런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을 상수로 여기며 활동하는 이들의 강력한 동기와 자발성에 기대 만들어진 것들, 물론 21세기에 문을 열었지만 20세기의 고민과 감각으로부터 고스란히 연결된 체화당이라는 공간도 그러했다. 그러니 한동안은 적어도 인건비만큼은 자립하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명분 삼아 이른바 인건비성 경비에 대해서는 각종 지원사업의 수혜를 받지 않았던 체화당도 2015년 즈음부터는 여러 보조금 제도를 통해 인건비를 만들어낼 고민을 시작했다. 신념이 명분이 된 것인지, 현실이 명분이 된 것인지는 지금도 헷갈리지만 말이다. 서울시에서 ‘뉴딜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영역에서 행정이 직접 지원하는 뉴딜 활동가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당연히 큰 영향을 주었다. 2016년 당시 김민주-박동효 공동 매니저와 법인(사단법인 풀뿌리사회지기학교해내외엔담)의 이태영 사무국장은 서울시 ‘활력공간 지원 사업’에 지원했다. 활력공간 지원사업은 무중력지대와 같이 서울시가 직접 운영하는 청년 공간 외에 이미 민간 차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공간에 ‘활력공간’이라는 브랜드를 부여해 청년들의 지역 거점을 확대하려는 서울시 청년정책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만들어진 사업이었다. 활력공간이 되면 사업비와 함께 인건비도 지원이 된다.
이 지원 사업에서 체화당은 탈락했는데, 면접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체화당은 청년 공간이라기보다는 마을 공간 아니에요?” 면접에 참여했던 박동효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청년 공간과 마을 공간이 그렇게 딱 분리가 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보통 섞여 있지 않나요?” 급격히 제도화된 여러 부문의 의제들이 역시 급격하게 관료화되며 만들어진 난감한 상황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하는데, 단일할 수 없는 정체성인 세대와 도시 공간에 존재하는 수많은 커뮤니티들의 양태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 마을이 마치 실재하는 정체성과 장소인 냥 언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넷(서울에 각 자치구별로 존재하는 민-민 네트워크의 명칭) 모임에서 들었던 “왜 마을에는 청년이 없어요?”라는 질문 역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저 질문이 전제하는 ‘마을’은 마을넷 모임인가, 마을보조금사업인가, 마을공동체지원센터와 같은 중간지원조직인가? 사업의 대상이 되면 실재하지 않는 개념이 그 형태를 갖추게 된다. 어쨌든 그 날 우리가 받은 저 질문은 체화당으로선 매우 억울한 질문인데, 체화당은 어떤 공간에서는 항상 마을공간이기를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체화당 인근에서 원룸이나 하숙을 운영하는 주민(주민이라 불릴 때 의심받지 않는 완전무결한 구성원)들은 체화당이 마을카페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까? 아니, 인지할까?
체화당이 위치했던 대도시 서울의 일상은 어떠한가? 서울 인구의 절반 이상이 다른 사람의 집을 빌려 살아가고 있고, 이들은 2년에 한 번씩 현재 살고 있는 집에 계속 살 수 있는지 집을 법적으로 소유한 이에게 물어야했다. 30년 넘게 개정되지 못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드디어 세입자의 권리를 보다 더 보장하는 방향으로 바뀐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렇다. 지방선거는 4년에 한 번씩 돌아와 시장, 도지사, 구청장, 군수 등의 지방자치단체 수장과 각급 의회의 의원들을 뽑아야 하지만, 4년 뒤에도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살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 한겨레신문과 한국정치학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집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지방선거에 대한 관심도 차이는 유의미한 수준의 격차로 확인됐다.
정주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가 마을이라고 부르거나 지역사회라고 부르는 물리적인 장소에 애착을 갖기 어려운 조건일 수밖에 없다. 불안함은 그 뿐이 아니다. OECD 국가 최고 수준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이 사회는 애초에 시민 개인에게 장소와 관계를 맺을 시간 자체를 부여하지 않는다. 노동시장은 불안정하고, 그 불안정의 파급효과는 자영업의 위기로 확대되기도 한다. 도심에 이토록 치킨집이 많은 이유는 해고되었거나 퇴직했거나, 혹은 노동시장 진출 자체를 못한 이들에게 가장 접근성이 높은 자영업이 요식업이고 그 중 치킨집이 으뜸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게다가 도시의 삶이란 본질적으로 자립적이지 못하다. 단적으로 전기가 그 예이다. 우리는 전기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그 전기를 스스로 생산하지 못한다. 이런 도시와 그 도시의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지역은 어떤 의미일까? 이들에게 마을은 실재하는 것일까?
정주하지 못하고,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민’으로 초대되기 어렵다. 말했듯이 정주라 함은 장소와 관계 맺을 수 있는 절대적인 조건으로서 시간을 의미한다. 소유는 장소와 관계가 생기는 또 다른 조건인 경제적 이해관계를 획득하기 위한 여권 같은 것이다. 세입자가 집과 건물을 소유한 이들과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는 매우 당연해 보이는 명제가 실은 전혀 작동하지 않는 공간이 지역사회이다. 제도적, 문화적 모든 영역에서 말이다.
사실 도시의 가장 큰 역동과 가능성은 익명성이 주는 탄력성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옆집 숟가락 개수마저 알던 시기를 공동체가 살아있던 시기로 향수하지만, 도시는 기본적으로 우리 집 숟가락 개수를 알리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위기들의 원인을 공동체의 파괴에서 찾을 수 있다는 동의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식들이 마을을 향수하게끔 했고, 국가와 자본이라는 거대한 것들 사이에서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사유 체계들이 사회경제적인 차원에서 공동체적인 해법을 찾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을과 공동체에 미래를 위탁한다고 할 때, 적어도 그 미래의 모습이 다양성을 옹호하는 도시적 전통의 연장선에 있어야 한다는 합의를 만들었어야 하는데 지금의 사업화된 마을은 그러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
체화당 10년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당시 매니저였던 정동욱씨는 ‘정주자 중심의 마을공동체’ 모델에 갇혀 생활 주민뿐 아니라 학생 주민을 주체로 한 새로운 마을 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마을에 대한 모호한 환상(전통마을이나 몇 가지 외부사례에서 기인한)만 있었지 지역의 특성이 반영된 구체적인 마을 모델에 대한 비전이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사실 체화당은 꽤 이른 시기부터 ‘생활 주민’과 ‘학생 주민’을 분리해서 호명했었다. 이는 풀뿌리 정치체로서 민회를 제안하고 실험했던 신촌민회로부터 연결된 개념인데, 신촌민회는 신촌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십분 살리기 위해 주민이라는 개념을 나눠서 사용했다. 그러니까 신촌을 오고가는 학생들도 주민이니 이들을 학생 주민으로 부르고, 그 외에 거주라는 준거점으로 주민으로 호명되던 이들은 생활주민이라고 언급한 셈이다. 지금 와서 보면 이 역시 매우 한정적이고 한계적인 구분이지만, 그래도 활동하는 자신들의 정체성 역시 주민으로 세우고자 했던 적극적인 전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10년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언급된 저 내용은 체화당 역시 결국은 자기 일상과 괴리되는 활동을 마을이라는 정체성을 위해 시도했다는 인정 같은 것이다.
전형적인 마을의 범주 바깥에서 마을을 고민하고, 특히 1인 가구와 세입자, 2~30대 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현격히 높으며 유동인구가 정주인구보다 많은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공동체사업을 해보겠다는 목표는 체화당이나 풀뿌리사회지기학교가 보조금 사업을 신청할 때 주로 쓰던 레퍼토리다. 진짜로 그러고 싶었던 것이니까 기술적인 거짓말 같은 것은 분명 아니었다. 체화당이 수행했던 보조금 사업으로는 대표적으로 에너지자립마을 지원 사업이 있다. 체화당이 속한 법인의 이름으로 3년 진행한 이 사업의 경험을 복기해보면, 결국 이 사업을 통해 모인 시민들은 원룸과 하숙을 운영하는 정주성이 높고, 부동산을 소유한 주민들이었고, 이 사업의 보고되기 용이한 성과는 원룸과 하숙집 지붕에 3kw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다는 것이었다. 왜 에너지자립마을 같은 기후변화나 탈핵 이슈에 연관된 지역 활동은 정주성이 강한 거주민 중심으로 이뤄지는가 질문을 던졌고, 1인 가구로 살아가는 유동적인 세입자들, 도시의 보행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공동체적 프로그램은 없을까 찾고자 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애초에 명확한 정량적 성과를 중심으로 계획되고 평가되는 보조금 사업으로는 실행할 수 없었던 목표였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스스로를 마을카페로 정체화하기 시작한 순간, 우리 역시 마을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빠져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보조금 사업이 시민이 사회와 정치에 참여하는 효과적이고 우수한 경로로서 인정되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 경향은 가속화되었다. 우리도 우리를 관료사회에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했고, 그게 마을이나 청년이었기 때문에 마을활동으로 해석될 만한 것들, 청년활동으로 해석될만한 것들을 선택하게 되는 경향이 우리 안에도 존재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마을이 존재하고, 청년은 실재한다고 인정해버리면 그 안에서 어떻게든 생존전략을 구축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머리가 복잡한 체화당의 우리들은 그러지도 못했다. 그래서 체화당은 누구를 이 공간으로 초대하고 싶었을까? 체화당이 생각했던 마을은 무엇이고, 그 마을이 개인과 사회에 어떤 역할하기를 기대했던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이제라도 꼭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