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가끔씩 들어오던 일도 그만두었다. 집안일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힘들었고 아이를 키우는 게 태어나서 해 본 일 중 가장 힘든 일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로 힘든 이 모든 걸 엄마는 어떻게 했던 걸까? 그때는 한 집에 아이가 서너명은 됐었는데 말이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당황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이 드는 순간까지 일은 해도 해도 넘쳐났다. 어쩌다 한 번씩 들어오는 카피 일이었지만 이 정신으로는 제대로 해 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내 경력은 단절되었다.
어느새 아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나는 다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40이 넘어버린 카피라이터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젊고 반짝반짝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집에서 살림하던 아줌마를 그것도 40이 넘은 나이의 직원을 자기 밑에 두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해는 됐지만 왠지 씁쓸했다. 그러던 와중에 남편이 회사까지 그만두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장 생활비가 급한 건 아니었지만 초조하고 불안한 날들이 흘렀다. 1년이 지났을 때 우울증은 극에 달했고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원래부터 지구 상에 없었던 존재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래도 살아야 했기에 50군데가 넘는 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면접을 보러 오라는 곳은 극히 적었다.
나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일을 너무 오래 쉬었고 혼자 생활하는 걸 즐기던 내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면접을 보러 간 어느 곳은 젠틀했으나 어느 곳은 무례했다. 한 시간 반이상 젊은 친구들과 함께 면접관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도 했다. 정치성향을 알고 싶어 하는 질문들과 이제 와서 뭐하러 일을 하려 그러냐는 질문들에 꽉 잡고 있던 멘탈이 깨졌다. 면접을 함께 보던 다른 면접자는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같이 있던 여러 명을 공격하기도 했다. 면접을 마치고 나오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경력단절된 아줌마들을 비싼 돈 주고 채용하지는 않아요. 누군가의 말이 여러 날 이명처럼 나를 괴롭혔다.
어떤 회사의 대표는 연예인처럼 온 몸에 명품을 두른 채 나를 안내했다. 대표실에 놓여있던 여러 개의 명품가방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연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원하는 금액을 얘기했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나도 많이 지쳐있던 때였고 당장 어디라도 들어가야 했기에 많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대표의 얼굴은 처음과 달랐다. 지금 밖에 있는 젊은 친구들도 그렇게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인사를 나누고 대표실을 나와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둘러보았다. 직원들은 며칠 밤낮을 자지 못한 얼굴로 표정 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착잡했다. 억울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들이 받는 월급이 십 년 전 이십 년 전 내가 받던 월급에서 단 한 푼도 오르지 않은 그대로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이력서를 내지 않았다. 점점 더 우울해졌고 살기 싫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정말 쓸모없는 인간일 걸까,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 한 곳에서 전화가 왔다. 쇼핑몰의 간단한 제품 카피를 쓰는 정도의 일을 생각하고 지원했던 곳인데 소설가로 등단했다는 걸 알고는 다른 제안을 해왔다. 자신의 회사에 대한 책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나는 거절했지만 대표는 끈질기게 설득했다. 재택근무를 해도 좋다고 말했다. 물론 월급도 두둑이 챙겨줄 것이며 인세의 몇 프로를 주겠다는 말에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두려웠다. 내가 개인도 아닌 한 회사의 역사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는 게 무서웠다. 하려면 할 수도 있었지만 아직 내 책 한권도 내지 못한 주제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종종 선배나 아는 사람에게 부탁을 해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연락을 살갑게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다정한 인간도 아니었다. 먼저 안부를 묻거나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는 성정 또한 아니다. 남이 내 삶에 관여하는 것을 싫어하는 만큼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코드가 맞거나 함께 있는 순간은 누구와도 격의 없이 지내며 즐거웠지만 헤어지고 나면 완벽한 타인으로 돌아갔다. 피해를 받는 것도 피해를 주는 것도 싫었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은 더더욱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내가 이제 와서 이런저런 이유로 일을 달라고 말할 순 없었다. 간신히 용기를 내서 누군가를 만나면 운을 떼다 말고 술이나 거하게 마시고 돌아서기 일쑤였다.
그 이후로 나는 프리랜서나 단기 계약직으로 글을 쓸 수 있는 회사들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괜찮은 회사와 연이 닿아 간간히 함께 일을 하고 있지만 중간에 엎어지기도 하고 또 고정된 수입이 없다 보니 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냥 내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만 간신히 막아주고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 그래도 이런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나이는 더 들 것이고 50 넘어서 까지 나에게 일이 계속 들어올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아이는 아직 어리고 남편은 다른 곳에 취직이 됐지만 전에 다니던 곳의 절반도 되지 않는 월급이었다. 당장 뭐라도 더 해야 했다. 좀 더 일찍 취업전선에 뛰어들지 못한 게 한이 됐다. 어떤 회사의 인사팀장이 면접실을 나서는 내게 말했다. 30대만 돼도 취업이 어느 정도 잘 되는데 40이 넘으셔서 힘드실 거예요.
그의 말이 서운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이 나이에 다시 일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일을 손에서 놓아서는 안됐는데 후회가 됐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 있으랴. 나는 젊은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자신만의 일을 찾으라. 그리고 절대로 손에서 놓지 말아라. 보호해줄 누군가는 없다. 스스로 자신의 일을 만드는 것. 그것만이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