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세 달 유학한 자의 아는 척 모먼트
그래도 명색이 유학에세이 카테고리인데, 맨날 줄줄 우는 이야기만 쓴 것 같아서
오늘은 제대로 각을 잡고
고작 세 달 유학한 사람의 시선에서 (막 십 년 씩 영국에 사신 분들이 보고 '재미있다ㅋㅋ' '얘 뭐냐 어이없어' 하면서 제 이야기에 덧 대어 주시면 감사할 요량으로...)
몇가지 상황별로 한국과 영국에서의 대화와 반응을 비교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미리 이야기해 두지만 어디까지나 랭커스터 시골마을에 사는, 그것도 고작 3개월 산 자의 개인적 경험이므로 일반화 할 수 없음을 밝혀두는 바.
상황 1. 주말이 지나 일주일만에 수업에서 동기와 만났다.
친구가 오늘따라 화려한 귀걸이를 하고 왔네?
"와, 귀걸이 너무 예쁘다!! 어디서 샀어!!" 라고 했을 때
한국친구의 반응(앞으로 '한국'으로 줄임): "뭐래~걍 싸구려임 ㅋㅋ" or "아니야~ 그냥 대충 있던거 한거야" 라며 손사래. 만약에 내가 선배라면 "아니에요~이쁘긴요 무슨" 이라며 굳이 자신을 낮춤.
영국 친구의 반응(앞으로 '영국'으로 줄임) : "오 정말? 고마워~ 네 잠바도 멋지다~"
그러면 나는 또 "정말? 고마워~~ 너 부츠도 진짜 귀여운 듯 ~" 하며 칭찬 릴레이.(네버엔딩..)
상황 2. 한 학기가 끝나고 뒷풀이에 가는 상황.
다섯명이 어디서 음식을 먹을지 정해야 한다. 우리 중의 한 명이 비건이다. 그러나 학교 안에 비건식당은 모두 자리가 꽉 찬 상황이다. 어떻게 해야하지??
한국: 주로 비건 친구가 양보를 하는 편. 삼겹살 집에 가서 구석에서 깻잎에 콩자반을 얹어 먹거나 김치전을 시킨다.
영국: 나머지 친구들이 시내에 있는 비건 식당을 함께 검색한다. 혹은 배달이 되는 비건 식당에서 주문해서 커뮤니티 룸에서 함께 먹는다. 비건이 혼자 먹게 되거나 따돌림을 당하는 일은 없음.
상황 3. 마트에서 카트의 물건을 직원이 다 찍었는데 애플페이가 갑자기 열리지 않는다.
하필이면 데이터도 잘 안터져서 로딩이 엄청 느린데 내 뒤로 줄이 한참 늘어섰다.
한국: 5분이 넘어가면 뒤에서 짜증섞인 소리가 들으라는지 혼잣말인지 싶게 들려온다. "아 좀 빠져있다가 다시 계산하면 안되나" " 민폐잖아 완전 지금" "아니 왜이렇게 오래 걸려"
영국: 무슨 일인가 사람들이 매우 흥미롭게 바라본다. 그리고 당황한 나와 눈이 마주치면 웃어준다.
상황4. 친한 선배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밥을 사주셨다. 너무 맛있는데 양이 많아 반은 남은 상태다. 싸가서 이따가 집에서 먹고 싶은데 어쩌지?
"저기, 선배 저 이거 포장해도 되요?"
한국: " 먹던 거를? 에이. 됐어. 나중에 내가 또 사줄게. 여기 바쁘고 그래서 싸달라고 하면 눈치 보여"
"아니, 좀 아까워서 그래요. 저 여기 빈 용기도 가지고 다니는거 있어서..."
"시호야. 자취생 같이 왜그래. ㅋㅋㅋ 부끄럽다. 그러지말고 나가서 2차나 가자"
영국: "당연하지, 이거 소스도 같이 싸달래자"
상황5. 기숙사의 냉장고 서랍이 부서졌다. 관리실에 내용을 전달한지 한달이 넘은 상태. 기숙사 학생 모두가 불편을 겪고 있다. "이거 아직도 교체가 안 되있네"
한국: "아니, 한달이 넘게 안 고쳐주는게 말이 돼?" "저번주에도 항의 글 올리지 않았어?" "이번엔 니가 올려. 차라리 공론화 할까봐" "아니 우리가 낸 돈이 얼만데 지금 이렇게 관리가 안돼?" 라며 분노 폭발.
영국: "아마 한달 넘은거 같지?" "어이가 없다" "기숙사가 그렇지 뭐" "오늘 저녁 뭐먹었음?" 으로 별반 무게를 두지 않고 지나감.
상황6. 공용정원 정리를 하다 손에 가시가 박혔다. 으악!!!! 가시가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데 깊숙히 박혀서 스칠때마다 아프다. "친구야 나 이거 어떡함? 손에 가시가 박혔는데 넘 아프다"
한국: "야 당장 피부과 가서 빼달라 그래 안그러면 너 나중에 째고 막 그래야 된다"
"그치? 으 무섭다 무서워"
영국: "걍 바늘로 대충 후비면 빠져"
"뭐라고? (안되겠다. 의료실 가야겠다)."
의료실: "돋보기 드릴테니 바늘로 잘 빼보세요(뭐 그런걸로 의무실에 오냐는 얼굴)"
상황7. 기차를 타고 2시간 반 가량을 가야 한다. 어쩐지 심심하여 옆 자리 남자가 보고 있는 책에 눈길이 간다. 용기를 내어 물어본다. "뭐 읽고 계세요?"
한국: "네???(당황한 기색이 역력). 아.. 그냥 책요. (친구에게 뭐라뭐라 카톡을 한뒤)" 성급히 자리를 옮긴다. 아마도 '옆자리에 이상한 여자가 탔어'라는 내용이겠지...
영국: "아, 이거 얼마전에 아마존에서 베스트 셀러길래 샀는데요, 생각보다 재미는 없네요. 흐흐. 어디까지 가세요?" (대화가 시작됨)
여기까지만 보면 영국이 훨씬 인간답고 살기 좋은 나라같겠지만 꼭 그렇진 않다.
유도리 없는 이들의 태도는 관공서, 은행, 회사, 학교를 불문하고 모두 한결 같기에 여러가지 상황에서 모두 비슷한 태도로 대처하는 이들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상황 8. 카페에서 다이어리를 잃어버렸다. 전화번호가 쓰여있긴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빨리 내가 찾는게 좋을 것 같은데... 카페에 전화를 건다. "죄송한데 엊그제 다이어리를 두고 왓는데요, 아직 거기 있나요?"
한국: "어떻게 생긴 다이어리 인가요? 아. 녹색이요, 잠시만요. 아. 있네요. 언제 찾으러 오시겠어요? (대부분 잃어버린 자리에 있는 편)
영국: (전화 연결도 무지하게 안됨) "다이어리요? 아, 죄송하지만 지금은 저희가 영업중이라 찾을 수가 없어서요. 우선 저희가 좀 찾아보겠습니다. 뚝"
아니 내 번호도 안 물어보고... 며칠을 기다렸지만 연락이 없다. 다시 전화한다.
"다이어리요? 들은 바가 없는데.. 저희가 영업중이라 좀 바빠서요. 확인하겠습니다. 뚝"
이 사이클이 계속 반복. 그러다가 결국 찾아가면 "음. 찾아봤는데 없더군요 죄송." 으로 귀결..
아니 전화해서 없다고 이야기 해줬으면 됐잖아...
상황 9. 한국에서 보낸 소포가 여지껏 오지 않는다. 검색해 보니 관세를 내지 않아 어딘가에 묶여있다고. 우체국 고객센터에 전화해본다.
한국: "아, 송장번호를 불러주시겠어요? 현재.---에 있군요. 관세를 어떤 방식으로 내시겠어요. 받으시는 분이 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연락처를 주시면 저희가 연락을 취해볼게요"
영국: (신호만 가고 아무도 받지 않는다)
힘들게 고객센터 메일주소를 찾아 보낸다.
3일만에 온 답장은 "응 관세를 내지 않아 어딘가 묶여있어. 관세를 내." 이다.
다시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20분만에 누군가 받는다. 상황설명을 하자 "관세를 내야지" 라고 응수한다.
나 : 어디로 뭘 어떻게 내는지 전화 한통이 없었는데 어떻게 '알아서' 관세를 내?
우체국: 음. 보니까 이게 주소가 잘못 되서 제대로 안 간것 같은데 (뭔 딴소리야) 주소를 바꿔야겠네
나: 주소 지금 다시 불러줄게
우체국: 아니, 너에게 소포 보낸 사람이 직접 우체국에 다시 가서 주소를 바꿔야 해
나: 한국에서 다시 우체국엘 가야 한다고?
우체국: 응
나: 아니, 내가 지금 그냥 불러주면 되잖아!
우체국: 아니야. 그 사람이 직접 우체국 가서 주소를 재 접수해야 하고, 돈도 내야해.
나: 아오...
(며칠 후, 한국에서 다시 주소를 보냄. 이마저도 인터넷으로 수정되는게 아니라 우편의 형태로 다시 주소 변경을 요청해야 한다고 함.. 세상 불편)
우체국 사이트를 다시 확인.
[관세 내지 않아 본국으로 돌려보냄] 이라고 뜸.
아니 뭐라고????? 주소를 바꾼다고 그 난리를 했는데 다시 돌려보낸다고??
또 전화했지만 안받음. 다시 메일 보내니 "응 미안, 착오가 있었나봐. 중간 허브에서 다시 우리쪽으로 돌아오게 조치했어. 아마 열흘 넘게 걸릴거 같은데, 꾸준히 사이트에서 위치 체크해. 행운을 빌게!"
장난하나.
후...
며칠 새 이놈의 소포 때문에 폭삭 늙어버렸다. 그리고 9월말에 보낸 소포는 1월말이 되도록 여전히 도착을 못하고 있다. 다시는 선박 택배 안해야지 라는 다짐만이 짙게 남는다. 최근의 경험담이다.
굉장히 단적인 비교이고, 일반화를 할 수도 없지만 분명히 너무나 다른 우리와 이들의 모습이 있다. 하지만 런던은 또 다르다. 문화 생활 겸 한달에 한 번씩 놀러가 겪는 런던의 삶은 서울과 굉장히 닮은 부분이 많다. 그래서 편하기도, 또 불편하기도 하다.
일처리는 느리고... 융통성은 제로인 이 사람들은 도무지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걸까. 그런데 놀랍게도 처음엔 이런 부분들이 적응이 안되고 욕지기가 나왔는데 이제 슬슬 나도 그러려니 하고 있는 걸 보니 이미 랭커스터리안이 되고 있는 것일까. '불편'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너비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