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은 3가지의 수용으로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첫 번째가 자신에 대한 수용(나라는 존재), 두 번째가 타인에 대한 수용(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 마지막 세 번째가 나와 모든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것들(내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 환경)이 그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수용인 환경 수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대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삶의 현실은 굳이 생로병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렇기에 앞서 언급한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도 그의 기도문에서,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평온한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은총을 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은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인생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정적이거나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일에 맞닥뜨리게 되면, 대개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거부하고 저항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장 지금의 그런 상황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경우 그런 힘든 상황을 오롯이 감내하는 대신 어떻게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저항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지속됩니다. 분석 심리학자였던 칼 융(Carl G. Jung)도 ‘뭔가에 저항하면,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버틴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면증에 걸린 사람이 잠을 자려고 불면증에 저항하는 경우, 잠을 자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잠은 더 오지 않게 됩니다. 즉 불면증에 저항하면 할수록 불면증은 지속됩니다. 이때는 ‘잠이 오지 않는 체험도 한번 해 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면서 ‘불면증에 한번 푹 빠져보자’라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누워 있으면, 어느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본시 사람은 자신이 잠드는 순간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애를 쓰면 자꾸만 그 순간을 인식하는 상태가 되어 불면증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방금 예로든 불면증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일들이 저항하면 할수록 더욱 지속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견디기 힘든 막다른 상황에 처하면, '내 삶은 왜 이렇게 힘들까?' 혹은 '하필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라면서, 애꿎은 하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런 고통은 더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신호입니다. 뭔가 끝을 봐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든 그 상황을 모면할 생각을 하지 그런 상황을 기꺼이 충분히 겪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에게 가장 적당하고 가장 필요한 과정이기에 하늘이 나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선물과도 같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단언컨대 우리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만큼 행복할 수 있듯이, 우리의 삶 또한 우리가 받아들이는 만큼 열립니다. 눈앞에서 닫히는 듯이 보이지만, 바로 뒤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또 다른 기회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의 저자 파커 파머(Parker J. Palmer)는 ‘길이 닫힐 때 나머지 세상이 열린다. 길이 닫힐 때, 불가능을 인정하고 그것이 주는 가르침을 발견하라. 길이 열릴 때, 당신의 재능을 믿고 인생의 가능성에 화답하라’는 말로 이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상황은 모두 하나의 축복이며, 체험 하나하나 마다에는 진짜 진정한 보물이 감춰져 있다’라는 닉 도날드 월쉬(Neale Donald Walsh)의 ≪신과 나눈 이야기≫ 제1권의 메시지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신과 나눈 이야기≫ 제3권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가장 암울한 순간일수록 특히 그런 순간일수록 더더욱 감사를 표현하라. 그리고 다음에 되고자 하는 장대한 모습을 상상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두울수록 빛은 더욱 찬란히 타오를 절호의 기회를 맞습니다.
저는 17년 전 기존 사업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가 완전히 파산한 적이 있습니다. 그해 겨울 기거할 집이 없어, 제 아내는 두 아이를 데리고 자동차에다 간단한 가재도구만 실고서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니며 2주일 정도를 떠돌이 생활을 하고 저는 월세가 몇 달치가 밀린 조그만 사무실에서 라면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는 등 숙식을 해결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이런 상황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만 하는지 화가 났습니다.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든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거의 1주일 정도는 눈물로 지새운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파커 파머가 말했듯이, 지금의 이 상황이 내게 주는 가르침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며칠을 생각한 끝에 어느 순간 제가 목적의식 없이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사업 실패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단지 이로 인해 돈이 없다는 것 빼고는 소중한 것들은 다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아들의 행복만을 바라시는 어머니, 사랑하는 아내,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토끼 같은 자식들, 나를 늘 응원하는 친구들, 지인들 그리고 젊고 건강한 몸 등 소중한 모든 것들은 다 가지고 있음이 참으로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제 서야 제가 지금도 할 수 있는 일과 저의 재능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의 가능성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가닥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두어해 전부터 몸담고 있던 다이어트 업계에서의 새로운 비즈니스의 기회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이어트 분야에 있어 블루오션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당시에만 해도 생소했던 ‘치유를 통한 다이어트’ 솔루션에 관한 아이디어였습니다. 그 결과물이 2009년에 출간한 저의 첫 번째 책인 ≪시크릿 다이어트≫, 두 번째 책인 ≪마인드 디톡스 15일≫이며, 제가 지금까지 다이어트와 심리치유 분야로 코칭과 강의를 하게 된 배경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간 인생의 소명 의식 없이, 단기적인 목표만을 추구하며 나름 열심히 산다고 자부 내지는 위안하면서, 더 나은 안락한 삶만을 꿈꾸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사업 실패로 처절한 고통을 겪고 나서 ‘사람들이 존재감 100%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는 제가 평생을 바쳐 이루어야 할 저의 사명과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어두울 때 빛이 가장 찬란히 타오를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듯,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처절했던 시기에 제 인생의 소명의 빛이 찬란히 타오를 기회를 맞이한 것입니다. 제가 만약 그 당시 제게 닥친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인정하지 않은 채 저항하며 처지를 한탄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면, 저는 결코 제게 주어진 인생의 가능성에 결코 화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맞닥뜨리는 삶의 현실에 저항하는 이유는 뭘까요? 표면적인 이유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당장 지금의 그런 상황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보다 심층적인 이유는 삶에서 마주하는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면, 삶의 희생자 혹은 피해자가 되어 인생의 굴레 속에 그대로 주저앉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버려졌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후 그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속 깊이 상처로 남아있어 성인이 되어서도 늘 사람과의 관계에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그 상처를 상처로 여기지 않고, 자신 이외에도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고통을 그가 직접 느낌으로써 진실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아픔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요? 동시에 자신의 고통 즉 원치 않는 상황이 자신에게 펼쳐지는 건 그것을 통해 반드시 내가 체험해야 할 부분이 있음을 자각한다면 어떨까요? 나아가 그 상처로 인한 고통을 탓하는 대신 오히려 감사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요? 만약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제 그 상처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닐 겁니다. 그 순간 그는 인생의 ‘피해자’로부터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주도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삶의 ‘피해자’에서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주도자’로의 관점이 전환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의 치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 치유란 '~때문에'에서 '~임에 불구하고', 그리고 '오히려 ~덕분에'로 변화해 가는 과정이 ‘광의의 치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정신의학적 질환이 있습니다. 간략히 말해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계속 그 고통을 느끼게 되는 현상인데, 이 PTSD 수준(상태)이 '~때문에'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임에 불구하고' 수준은 PTR(Post Traumatic Recovery) 즉 ‘외상 후 회복’된 상태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히려 ~덕분에'는 PTG(Post Traumatic Growth) 즉 ‘외상 후 오히려 성장’한 상태를 뜻합니다.
유리 공을 바닥을 향해 던지면 바로 깨집니다. 이 상태를 PTSD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플라스틱 공을 바닥에 던지면 잠시 찌그려졌다가 조금 지나면 원 상태로 회복됩니다. 이 상태가 PTR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고무공을 바닥으로 던지면 오히려 튀어 오릅니다. 이 상태를 PTG라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바닥을 향해 던져지더라도 즉 동일한 환경 하에 자신이 놓이더라도 내가 어떤 공이냐에 따라, 산산이 부서질 수도 있고 조금 지나서 원래대로 회복될 수도 있고 오히려 도약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어떤 공이냐가 결과를 결정합니다. 즉 내가 취하는 태도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무엇도 결코 내 허락 없이는 나를 불행하게 할 수 없다."라고 역설한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어느 누구도 설사 신조차도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내게 상처를 줄 수 없습니다. 상처는 나의 선택에 의해(나의 허락 하에) 오로지 나 자신만이 내게 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불행한 상황에서라도 지금 이 순간 행복함을 선택한다면 세상 어느 누구도 설사 신이라도 하더라도 나의 행복을 막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상처받을 만큼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가 인간인 동시에, 그가 받은 상처를 그가 스스로 상처로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상처가 더 이상 상처가 아닐 수 있는 위대한 존재 또한 인간인 것입니다.
저의 삶에서 가장 기쁘고 보람되며 존재감을 느끼는 순간 중 하나가 바로 코칭을 통해 고객 분이 PTSD에서 PTG로 변화되는 것 즉 상처로부터 회복됨을 넘어 오히려 성장하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는 순간입니다. 그야말로 가슴 벅찬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 제게 ‘모든 실망과 상처를 지울 만큼 가장 가치 있는 순간이 언제인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이라 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