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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새눈 Aug 04. 2023

호랑이를 가질 수 없다면 그걸로 끝

고집쟁이 우주인의 파란만장 지구생활 (적응기) 3


  사립 대학교의 등록금이 그렇게 비싸다는 것은 입학금 고지서를 받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입학금 고지서에 찍힌 숫자를 보았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동시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첫 학기 등록금과 입학금은 다행히 할아버지의 염려와 막내 작은 아버지의 호의로 해결되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반대를 심하게 하셨던 할아버지도 등록을 안 하면 재수를 해야 한다고 하니 탐탁지 않아 하시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셨던 듯하다. 할아버지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공부를 정말로 열심히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2004년 2월, 나는 아빠와 함께 모든 짐을 메고 들고 끌어안고 상경했다. 아빠는 나의 만류에도 크고 두꺼운 솜이불을 바리바리 싸서 직접 들었다. 큰 짐을 들고 이동하는 것이 힘들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큰 짐들은 먼저 택배로 보내고 간편한 차림으로 가고 싶었는데, 아빠는 혹시라도 이불을 택배로 보냈다가 제때 받지 못해 내가 추운 날씨에 이불을 덮지 못하고 잘까 봐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다. 아빠와 (누가 봐도 시골에서 올라온 티가 나는 아빠가 창피했던) 나와 짐은 5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한번 갈아타고 대학 근처 고시원에 도착했다. 나는 계속해서 뚱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짐과 함께 나를 고시원에 안전하게 데려다준 후에 나오지 말라며 문을 닫고 나가던 아빠의 멀어지던 발소리를 기억한다. 해방감과 안도감을 느끼며 문 앞에 서서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갑자기 불안과 슬픔이 밀려왔고 눈물이 차올랐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서울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나처럼 별을 좋아해서 온 친구들이 반가웠다. 강의에서 배우는 내용도 신기하고 재밌었다.

(천문학은 물리와 수학을 기본으로 하는 광학, 분광학, 전파천문학, 천체역학, 항성의 진화, 성간물질,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의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어 있다. )    

    

  그곳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우며 기쁨을 느끼기도 했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업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늘어났고, 뛰어난 친구들과의 격차를 체감하며 내가 전혀 똑똑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수적이라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에도 영 소질이 없었다. 프로그래밍 수업은 기본기를 익힌 이후에 교수님이 제시한 과제에 대해 스스로 프로그래밍을 해서 소스코드와 답을 제출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친구들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코딩을 하는 동안 나는 어쩔 줄 몰라 멍하니 모니터를 보거나 친구들을 힐끔거렸다. 그러다 마지못해 친구에게 도움을 청해 친구의 코드를 받아 수행해 보면 이상하게도 에러가 났다. 결국 징글징글한 프로그래밍 수업을 수강철회 해버렸다. 

 

  별과 우주를 사랑한다면 그럴수록 더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나는 생각했던 것과 다른 대학생활에 내심 당황하며 권태를 느끼고 있었고, 천문학이 생각보다도 어려워 또 당황하며 방황하고 있었다. 이제야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는 넓은 세상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깨닫고 실의에 빠졌다. 아무리 해도 명문대 출신의 유학파 교수님들 같은 사람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정도는 되어야 천문학자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내가 선택한 이 길의 실체를 조금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교수님들은 학생들을 참 예뻐해 주셨다.)     

 

 

  또 그간 살아왔던 터전을 처음으로 떠나 모든 것이 새로운 환경에서 지내야 하는 피로감과 낯섦, 좁고 적막한 고시원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고독함은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종류의 힘듦이었고, 그런 것들을 포함한 타지 생활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서울엔 사람도, 계단도, 건물도, 차도 너무 많았다. 지하철은 늘 빙 돌아서 환승을 해버렸고, 버스도 타고 보면 항상 반대 방향이어서 길을 자주 잃었다. 어리숙한 모습이 눈에 띄었던 탓인지 성경공부를 하자고 권하거나, 좋은 상품이 있다거나, 기운이 좋다면서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소심한 성격 탓에 거절을 하지 못해 난감해하면서도 시간이나 돈을 손해보곤 했다. 

 

  고시원 방안에 가만히 있으면 시끄럽게 울려대는 냉장고 소리에 내가 혼자 있다는 사실이 더욱 크게 와닿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온라인 메신저로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새벽에야 잠들었고, 혼자 있기 싫어서 술자리에 어울리다 보면 빠져나올 타이밍을 잡지 못해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 그러면 밤늦게 집에 오다가 변태를 만나기도 하고,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해 수업시간에 지각을 하기도 했다. 방에 혼자 있는 기분이 싫어서 식물 화분을 사 모았으나 물이 부족하거나 물을 너무 많이 주는 바람에 하나씩 하나씩 시들어서 결국 다시 혼자가 되었고, 친구가 선물해 준 ‘땡칠이’라는 하얗고 작은 햄스터를 키우기도 했는데 설 연휴를 맞아 고향집에 같이 다녀온  다음 날 땡칠이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당시에는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사치라고 여기면서도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스스로를 비관하며 미워했던 것 같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내가 죄를 지어 지구로 유배당한, 기억을 잃은 외계인(우주인)이기를 소망했다. 나는 죄를 지어 불행한 것이니 언젠가 죄에 상응하는 기간이 끝나면 외계인 동료들이 우주비행선을 타고 나를 데리러 올 거라고, 그때가 되면 원래 나의 행성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원인이 분명한 불행, 언젠가는 끝날 불행을 원했다. 기분이 울적한 날 친구와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런 얘기를 들려주면 친구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네가 외계인이라고? 하하하, 하여튼 이상하고 특이해.”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하며 친구를 놀렸다.

나중에 우주선이 나를 데리러 오면, 너한테만 살짝 알려 줄게. 우주선이랑 외계인 구경하러 와. 큭큭.”

 

 

 나의 권태와 좌절과 가난과 가정사, 혹은 (대부분 짝) 사랑의 감정들을 싸이월드에 글을 쓰면서 해소하곤 했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와중에도 멋있는 남자애는 멋있어 보였고 때때로 좋아졌다. 나는 나와는 반대로 활발하고 자신감이 넘치고 자기표현과 자기주장이 확실한 잘 꾸미는 남자애들이 좋았고 (주변 친구들이 봤을 때는 약간 날라리 같은 남자애들이었다고 한다;), 그 애들을 닮거나 그 애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현실에 괴로워했다. 나는 평소에 남자인 친구들과는 스스럼없이 잘 지냈으면서 좋아하는 남자애 앞에만 서면 머리가 멍해지고 말이 안 나왔다. 그 남자애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얼음 땡 한 듯이 뒤늦게 머리가 돌아가고 말이 떠올랐다. 그럴 때 컴퓨터를 켜고 싸이월드 게시판에 못다 한 말이나 마음속 기분, 생각들을 문자로 옮겨 적었다. 그러고 나면 속이 후련했다. 나의 내면이 글자의 형태를 갖추고 딱 알맞은 단어와 기가 막힌 표현으로 하얀 컴퓨터 화면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것을 볼 때면 슬픈 글임에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몇몇 친구들ㅡ선배 한 명과 친구 서너 명 정도였다고 기억한다ㅡ은 그 글들을 읽고 나에게 글을 잘 쓴다거나 국문학과로 옮기라는 둥 농담조의 댓글을 달아 주기도 했다. 




  4학년이 되자 다들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학과가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 선배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천문학 전공으로 졸업을 해서 어디에 취업을 할 수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대학원에 진학한 선배, 컴퓨터 관련 학과를 복수전공하여 대기업에 취업한 선배, 망원경 판매회사? 에 취업한 선배 정도의 예시가 있을 뿐이었다. 그 외에는 전공을 살리지 않고 취업을 했다는데 어디에 취업을 했는지 들은 기억이 없다. (들었으나 기억을 못 하는 걸지도 모른다.)

  

  집안 형편이 넉넉했다면 별 고민 없이, 아니 결정을 미래로 미루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학원에 간다는 것은 더 많은 돈이 든다는 뜻이었고, 더 많은 빚을 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등록금은 첫 학기를 제외하고 모두 학자금 대출을 받은 상태였고, 부모님은 나의 서울생활을 위해 무리를 하고 계셨으며, 돈문제로 자주 다투셨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보탬이 되어보려고도 했으나 아빠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신 차라리 공부를 해서 장학금을 받으라고 하셨다. 괜히 고생만 한다면서. 아빠 몰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었지만 매일 전화를 하는 아빠의 감시 탓에 세 달 밖에 하지 못했다.   

 

  나는 늘 그런 부분에 대해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적은 썩 좋지 않았고, 그래서 장학금도 찔끔찔끔 밖에 받지 못했고,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학자로서의 삶을 포기했다.  

 


 

  조교 선생님의 안내를 받고 진로 상담을 위해 교수님 방으로 찾아갔다. 천문학을 제외하고 나면 글 쓰는 게 그나마 재미있고 소질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고민을 교수님께 말씀드렸더니 (질문 자체가 막연하긴 했다.)     

 

"내가 아는 국문과 교수를 소개해줄 수도 있는데 연락을 해 줘 볼까요?"


"음..... 국문과 교수님과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


“써 놓은 글이 있다면 피드백 같은 것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어볼 수도 있고요.”

 

  나는 글을 쓰는 것으로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 직업적으로 쓸 수 있는 글이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내가 썼던 것은 편지 또는 시적 비유가 다분히 섞인 일기나 수필 정도의 글들이었고, 내심 그런 글이 누구에게 보일 만한 정도의 수준은 아니며, 더욱이 결코 돈이 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국문학과 교수님을 만나면 창피만 당하고 올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에게 필요한 것,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음......”     

 

"뭘 할지 결정을 못하겠다면 일단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 해보는 것은 어떤가요? 많지는 않지만 용돈 정도의 금액을 학교에서 지원해 줄 수는 있을 겁니다."


"아.... 그건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힘들 것 같아요...... 교수님, 생각해 봤는데..  학자로서의 삶은 저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학자로서의 삶이라......." 

교수님은 고개를 한참 갸웃거리시더니 어렵게 말을 이었다.

 

"음...... 그렇다면....... 일찍 결혼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어요."


"(....???!!!!!) 아.......... 네...."     

 

  상담은 형식적이었고, 짧게 끝났다. 상담을 할 당시에는 교수가 학생에게 어떻게 취업하는 대신 결혼(취집)하라는 말을 할 수 있냐고 (속으로) 역정을 내며, 교수가 말인지 방귀인지 모를 상담을 해줬다고 생각해서 기분이 나쁘고 어이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교수님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신 것 같기도 하다.     

 

  다른 교수님이 감사하게도 내가 원한다면 과학관이나 천문대에 추천서를 써줄 수 있으니 고민해 보라고 제안을 해 주셨다. 하지만 나는 나의 호랑이(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던 원대한 꿈)가 고양이에 머무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과학관이나 천문대에서 하는 일이 따지고보면 고양이로 비견될 일은 아니고, 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보람을 느끼며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을 텐데, 어쨌든 자발적인 선택이라기 보다는 좌절에 의한 차선책이었으므로 당시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아주 오랫동안 꿈꿔왔던 호랑이를 떠나보내는 일은 매우 슬픈 일이지만, 호랑이를 품었던 마음으로 고양이에 만족해야 하는 현실은 더욱 슬픈 일이었다. 

 

  호랑이를 가질 수 없다면 그걸로 끝! 

  나는 단호하게 나의 소중한 꿈이 어설프게 남아있는 것을 거부했다.

  오만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상의 타협은 불가능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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