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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새눈 Aug 12. 2023

신비와 모험의 나라 롯*월드의 뚝딱이



  한줄기 빛을 따라 ‘행복한 지구’를 향해 가보기로 정했지만 딱히 대책은 없었다. 공연을 만드는 직업에는 어떤 것이 있고, 그중에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또는 할 수 있는지, 또 그런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뭐가 됐든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먼저 ‘뮤지컬, 공연’이라는 키워드로 인터넷 검색을 했다. 여러 공연 기획사를 찾을 수 있었고, 그중 해외 유명 뮤지컬을 들여와서 제작하는 ‘설앤컴퍼니’라는 회사와, 뮤지컬 프로듀서 겸 설앤컴퍼니의 대표가 원장으로 있는 ‘서울아트스쿨 문화예술원’이라는 기관을 알게 되었다.


 ‘서울아트스쿨이 운영하는 문화예술원은 대한민국 문화예술과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핵심 교육기관입니다. 2001년 설립 이후 내실 있는 발전을 거듭한 결과 현재 국내 유수의 문화예술전문가 30인의 교수진이 최신시설을 갖춘 충무아트홀에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으며, 3개 학부 (공연예술(기획)/문화경영/뮤지컬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명실상부한 문화예술 전문 인력양성의 대표적 통합브랜드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입니다...'


   홈페이지에서 설명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다. 바닥을 다질 수 있는 좋은 기회 같았다. 일단 이곳에서 배워 자격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곳과 SBS 아카데미 두 곳에서 공연기획 강의가 있었지만 현재는 두 곳 다 없어진 듯하다. 현재는 더 전문적이고 상세한 커리큘럼을 가진 다른 아카데미들이 있는 것 같다.)


서울아트스쿨 문화예술원 공연기획자(공연예술전문가) 과정

교육 기간 6개월 정도 / 교육비 200만 원 남짓 / 시작 일시 7월 말


 목표가 생기고 보니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돈 벌기.




  때는 졸업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월이었고, 7월 말 시작이면 교육비를 마련할 시간은 충분했다. 이왕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면 공연에 대해 배우면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곳이 좋겠다는 생각에, 롯*월드 공연보조 아르바이트에 지원했다. 며칠 후 연락이 왔고 면접을 보러 갔다.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누군가를 따라 들어간 롯*월드 옆 높은 건물 안, 한적한 사무실 책상 에 면접관과 마주 앉은 채로 이야기를 나누는 식의 면접을 보았던 것 같다.


 "혹시 퍼레이드 본 적 있어요?"


 "네, 본 적 있습니다."


   나는 롯*월드에서 하는 퍼레이드는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릴 때 진해 군항제에서 해군이 단체로 제복을 입고 열을 맞추어 거리를 행진하거나 의장대가 총검술? 시범을 보이는 공연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퍼레이드라는 게 다 그런 것인 줄로만 알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땠어요?”


“재밌었습니다.”


"얌전해 보이는데, 할 수 있겠어요?"


"네,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자신감을 내비치며 대답했다.

 며칠 후 롯*월드로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면접관이 나의 진심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2008년 2월 27일.

  첫 출근을 해서 새로 채용된 아르바이트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 교육을 받았다. 고객을 대하는 마음가짐, 태도, 기본적인 근무 규칙 등에 대한 내용이었다. 양손을 현란하게 흔들며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법을 배웠다.


“환영합니다. 모험과 신비의 나라 롯*월드입니다 ♪”

(환영합니다, 로 시작하는 인사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최근 후기를 보면 감사합니다, 로 시작하는 듯하다.)



   며칠 후 드디어 근무하게 될 곳으로 안내를 받았다. 공연팀이 사용하는 공간은 바이킹 옆에 위치한 커다란 성문 같은 나무문을 통해 놀이공원과 분리되어 있는데, 그 문으로 들어가면 널찍한 공간 건너편에 컴퓨터가 서너 대 놓인 작은 사무실이 있고, 거기를 통과하면 양 옆으로 조명이 켜지는 직사각형 거울과 갖가지 화장품들이 놓여있는 서랍장으로 구성된 화장대들이 독서실 책상처럼 빼곡히 들어차 있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을 지나 반대편 출입문으로 나가면 퍼레이드에 쓰이는 소품이나 의상, 구두 등을 수납하는 공간이 있으며, 거기를 돌아나가면 퍼레이드에 쓰이는 구조물이나 차량 등이 대기하는 공간이 있었다. 나는 너구리 캐릭터가 그려진 하얀색 둥근 이름표와 하얀 블라우스, 와인색 줄무늬 리본, 와인색 재킷, 베이지색 무릎치마로 구성된 유니폼을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 일하고 있는 연기자들,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미 출근해서 분장을 마친 얼굴로 각자 화장대에 새초롬하게 앉아 있던 예쁜 여자 연기자들, 또 거울을 보며 안무 연습을 하거나 분장을 하고 있던 개성 있는 남자 연기자들, 그리고 정장 차림의 공연 감독님 몇 분, 의상실 이모, 분장실 언니 둘, 나와 동갑이었던 여자 아르바이트생 하나와 또래 남자 아르바이트생 몇 명.


   나는 공연팀 연기자들의 근태를 관리하거나 간단한 심부름을 하는 사무보조 업무, 유니폼을 입고 무대 및 거리공연을 가이드하거나, 무대 뒤에서 연기자들의 환복을 도와주는 등의 공연 보조 업무, 그리고 간단한 역할을 맡아 퍼레이드를 하는 보조 연기자 업무를 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최근에는 방송 스태프 경험자나 무용 및 연극영화학과 전공자로 자격제한이 있는 것 같다.)




   출근해서 처음 본 퍼레이드에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생각했던 퍼레이드와는 너무너무너무너무 달랐다.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행진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없었다. 퍼레이드는 의상과 화장이 더욱 화려했고 걷는 것에 더해 신나는 율동이 가미되어 있었으며 관객들과의 호흡도 필요했다. 퍼레이드는 보기에 아주 멋있고 무척 재밌었지만 내가 퍼레이드를 하는 입장이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일이었다. 면접 때 들었던 질문이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얌전해 보이는데, 할 수 있겠어요?..... 할 수 있겠어요?......... 겠어요.?.....'


  아무것도 모른 채 명랑하고 자신 있게 대답했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라 자책하며 볼에 바람을 힘껏 넣었다.


'아.... 망했다. 어떡하지..?'



 

  일주일쯤 지나서 내가 처음으로 맡은 역할은 저녁 퍼레이드에서 '뮤지션'이었다. 이동차량 위에 탑처럼 세워져 있는 야자수 이파리 모형이 달린 오두막에서 한 쌍의 양철북을 치는. 오두막에 올라가 있으므로 퍼레이드 주제곡에 맞춰 안무를 할 필요는 없고 북만 신나게 잘 치면 되는, 어. 렵. 지.  않. 은. 역할이라고 했다.


   딱 한 번 퍼레이드 때 다른 연기자가 그 역할을 하는 모습을 따라다니며 구경한 후, 그 연기자에게 드럼 스틱을 잡는 법이랄지 북을 치는 팁 같은 것을 간단히 배우고 바로 퍼레이드에 투입되었다. 양철북은 가죽면 없이 원통형의 움푹 파인 철체 모형만 있었기 때문에 북을 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스틱을 쥔 손과 손목에 힘을 더 많이 주어 흔들어야 했다. 나는 배운 대로 스틱을 몇 번 흔들어보고 퍼레이드를 하기 위한 몸단장에 들어갔다.


   퍼레이드에 등장하는 모든 역할은 각각 콘셉트가 있고, 그에 따라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이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화장하는 법이며 머리 묶는 법, 옷을 입는 법도 다 배워야 했다. 화장은 무대공연특수분장을 주로 한다는 분장팀 언니가 내 얼굴에 시연하면서 하나씩 알려주었다. 누군가 내 얼굴에 화장을 해 준 것이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이어서 뭔가 대접받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다. 눈을 감은 얼굴에 스치는 붓의 감각에 마음이 설레어왔다.


   언니는 써야 하는 브러시 종류와 화장품 종류, 화장품을 바르는 순서, 방법 등을 상냥한 말투로 알려주었다. 먼저 손등에 파운데이션을 덜어서 스펀지에 먹인 다음 그 스펀지를 얼굴 전체에 두드려 펴 바른다. 그리고 아이쉐도우 팔레트에서 화이트에 가까운 핑크를 엄지손가락 굵기 정도 되는 납작한 브러시에 골고루 묻혀 두어 번 털어낸 다음 눈두덩과 눈 아래쪽에 넓게 펴 바르고, 좀 더 진한  두 가지 핑크 색을 섞어서 눈꼬리 쪽에서 눈앞머리 쪽으로 쓸듯이, 위아래로 발라 그러데이션을 준다. 그다음 가장 진한 핫핑크 아이쉐도우를 아이홀 쪽에 살짝 터치하듯 쓸어준다. 그러면 꽃잎으로 물든 듯하면서 고양이 눈을 연상시키는 모양새가 된다. 그다음  얇은 붓펜 같은 작은 브러시로 블랙 아이라인을 끝이 치켜 올라가도록 꼬리를 빼서 두껍게 그려준다. 그리고 2센티는 될 것 같은 가짜 속눈썹 끝에 하얀 풀을 얇게 발라 후후 불어 살짝 말린 후 속눈썹 위에 올려 고정시킨다. 그다음은 크고 둥근 브러시에 핑크오렌지색 블러셔를 묻혀 광대를 감싸듯이 넓게 둥글리며 바르고, 은빛이 도는 자주색 립스틱을 바른다. 마지막으로 파란색과 빨간색 아이 쉐도우를 얇고 둥근 브러시에 발라 양 볼에 한 줄씩 한 줄씩 위아래로 나란히 그린다. 


   화장은 매우 화려해서 가만히 있어도 활짝 웃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화장을 하면 예뻐질 줄 알았는데 화장이 끝난 얼굴을 보았을 때 예쁘다기보다는 인상이 강하고 화려해서 내 얼굴 같지가 않았고,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이 무겁고 불편해서 눈을 빨리 여러 번 깜빡이게 되었다. 머리는 양갈래로 땋아 형광 주황색, 형광 연두색 머리끈으로 묶었다. 마치 인디언 소녀 같았다.


  그다음은 의상. 의상은 반짝이는 비늘 같은 소재로 여러 형광색이 줄무늬 패턴을 이루고 있어 알록달록 했는데 옷 표면에 작은 전구가 수놓듯이 달려 있었다. 의상은 속에 받쳐 입는 하얀 티셔츠, 긴팔 상의와 나팔바지, 어깨를 감싸는 짧은 망토 비슷한 것, 꼭대기에 술이 달린 세로로 길쭉한 모자가 한 세트였고, 상의 안쪽으로 등 부분에 건전지를 넣으면 전구에 반짝반짝 불이 들어왔다. 의상을 갈아입고 나서는 다들 불이 나간 전구를 갈아 끼웠다. 손이 안 닿는 곳은 서로서로 원숭이 털을 골라주듯이 전구를 골라서 갈아 끼워 주었다.


  준비 완료.


   내가 탑승할 오두막 차량은 키가 커서 놀이공원 실내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하기 전에는 오두막 지붕 부분이 접힌 형태였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오두막에 오른 다음 오두막 난간을 붙잡고 앉아 몸을 숙이고 있다가, 차량이 문을 통과하면 세워지는 오두막과 함께 일어섰다.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차량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시야에 사람들이 들어왔다. 높은 곳에 서서 수많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니 심박수가 급격히 높아졌다. 높은 곳이 무섭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서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져서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드럼스틱을 놓칠 뻔했다. 아래에 퍼레이드를 감독하며 걷고 있던 C 감독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무전기를 들지 않은 손으로 엄지와 검지를 반복해서 붙였다가 펼치면서 웃으라는 사인을 보냈다.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울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웃었다) 나는 내가 보았던 그 연기자(그분은 한국무용을 전공했다고 들었는데 작은 체구에도 에너지가 넘치고 절도 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를 떠올리며 그분을 나름대로 따라 하려고 애썼다. 심장이 계속해서 쿵쾅거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음악에 맞추어 (박자에 잘 맞추지는 못했던 것 같다) 스틱으로 북을 치는 시늉을 하면서, 엉덩이를 좌우로 힘차게 흔들고, 가끔은 임팩트 있게 한쪽으로 엉덩이를 밀치기도 했으며,  팔을 한쪽으로 뻗기도 했다가, 고개도 박력 있게 도리도리 흔들었다. 고개를 과격하게 흔들었더니 모자가 헐렁했던지 길쭉한 모자가 얼굴 앞 쪽으로 쏟아졌다. 나는 당황해서 동작을 멈추고 엉거주춤 모자를 고쳐 썼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니 모자가 자꾸만 앞으로 쏟아질 것처럼 흔들려서 목을 뻣뻣하게 세웠다. 긴장해서 머릿속이 하얀 가운데 속으로 다음 동작을 계산 하면서 몸을 삐걱삐걱 흔들다.


지금쯤 허리를 비틀면서 한쪽다리를 짚고 서서 스틱끼리 맞부딪쳐 소리를 내야지.

이제 오른쪽 다리를 흔들자.

이제 양쪽 다리를 번갈아 가면서 흔들자.

다리만 너무 흔들었으니 이제 엉덩이를 좀 흔들어야지.


휴.


   정신없이 퍼레이드를 마치고 여전히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차량에서 내려오니 N 감독님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분은 나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난감한 듯 머리를 몇 번 긁으시더니 한숨을 한번 쉬고 나의 눈을 맞추며 애써 웃는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새눈.... 몸치구나? 잘할 수 있다고 해서 잘할 줄 알았더니? (면접을 봤던 그분이었다.) 아니네? 내가 새눈을 보면서 마음이 아주 조마조마했어. 음.. 솔직하게 말할게. 까놓고 말하면 망했다 싶었어... 그래, 오늘 새눈의 역할은 망했어. 솔직히 그만시켜야 하나 하는 생각도 잠깐 했는데 어쨌든 할 사람이 없고, 어차피 차량 위에 있으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너무 잘하지 않아도 되니까 너무 엉망만 아니게 해 줘. 원래 하던 연기자를 너무 따라 하려고 하지 말고 새눈 나름대로 새눈에게 어울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면 좋겠어. 오늘 한 것처럼 에너지가 넘치는 것은 새눈에게 안 어울려. 좀 더 부드럽게 하면 좋을 것 같아. 다른 연기자가 하는 걸 한 번만 더 보고 하는 것으로 하자. 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감이 올 거야. 그리고 아까 보니 모자가 흘러내리던데 안에다 헤어밴드 하고서 써야겠다. 암튼 파이팅! 잘해보자. 고민해 봐. “


 N 감독님은 주먹을 쥔 손을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어쩌지....’


   나는 터덜터덜 걸어가 드럼 스틱과 모자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의상을 갈아입었다. 행거에 걸어놓은 전구 달린 의상을 보고 있자니, 마치 전장에 입고 나가는 갑옷 같아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중압감이 밀려왔다.


  화장을 지우려고 화장대에 앉았다. 그제야 스틱을 쥔 부분의 손바닥 살이 빨갛게 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긴장을 해서 요령 없이 힘만 쓰면서 흔든 탓이었다. 배급받은 클렌징크림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여러 가지 색이 섞여 흙탕물 색이 되었는데 마치 내 마음 색깔 같았다. 티슈로 흙탕물 색 크림을 닦아내니 아직 달아오른 채인 붉은 볼이 드러났다.  고단한 하루였다.




   다음날은 무대공연 가이드를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A 감독님이 나에게 손짓을 했다.


 "새눈, 무대 공연 가이드 할 때 그렇게 가만히 서있기만 하면 어떻게 해? 공연 도중에 특수효과가 나올 때 애들이 그 앞에 못 오도록 해야지. 아까 애들 뛰어다던데 애들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래? 또 연기자들이 공연 도중에 객석 통로 쪽으로 내려오니까 공연 시작 전에 통로 쪽에는 사람들이 앉지 못하게 정리해 주고, 사람들이 무대 앞쪽으로 몰려들려고 하면 그것도 막아주고 그런 일을 해야지. 연기자가 편하게 연기할 수 있게 관람객들이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게 하는 게 가이드의 역할이야. 다음부터 주의하자."


 “네, 알겠습니다.”


 나는 주눅이 들어 대답했다.


 '그래, 이제 잘하면 되지 뭐. 몰랐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은 거리공연 도중에 어떤 남성 관객이 갑자기 여자 연기자 쪽으로 튀어나왔는데,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내가 대처를 못하고 남자 연기자 한분이 임기응변을 발휘해 상황을 모면하였다. 그 일로 놀란 여자 연기자가 나에게 눈을 흘기며 볼멘소리를 했다.


 “ 아까 공연하는데 갑자기 나한테 달려들려고 하는 남자 못 봤어? 그런 사람들을 네가 재빨리 막아 줘야지. 그게 네 역할이라고! 그렇게 느리게 움직이면 어떡해. 위험할 뻔했잖아!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A 오빠 아니었으면 어떡할 뻔했어? 무슨 일 생겼으면 어떡할 뻔했냐고!”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주의하겠습니다.”




 또 얼마 후에는 퍼레이드 시작 전에 시간 맞춰 내려온 K 감독님이 나를 보고 깜짝 놀라서 물었다.


"새눈, 너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오늘 퍼레이드 안 해?"


"네.. 안 하던데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감독님은 다급한 걸음으로 스케줄 표가 붙어 있는 게시판으로 향했다. 나도 뒤이어 따라갔다. 스케줄 표에는 뮤지션 역에 내 사진이 떡하니 붙어 있었다.


“안 하긴 뭘 안 해. 여기 너 있잖아.”  


감독님의 언성이 높아졌다. 매일 게시판에 퍼레이드 역할 분담 스케줄표가 붙는데, 그날따라 스케줄표를 잘 못 확인하는 실수를 해버렸다. 퍼레이드 시작이 임박했던 시점이라 준비하기엔 늦었고, 대신할 사람도 없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발을 동동 굴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독님을 애처롭게 쳐다봤다.


"아.. 어떡하죠? 감독님?"


 “어쩔 수 없지. 아휴. 쉬고 있어.”


"죄송합니다..."


 감독님은 한숨을 내쉬며 나갔다. 멀리서 오두막 차가 왜 비었냐고 묻는 다른 감독님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두막 차량은 뮤지션을 태우지 않은 채로 출발했다. 사무실 앞에서 조명이 반짝이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휑한 오두막 차량의 뒷모습을 난처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서있던 나에게 K 감독님은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퍼레이드가 끝나길 기다렸다. 퍼레이드가 끝날 때쯤 다시 사무실 앞에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며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더니 N 감독님이 호탕하지만 허탈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새눈! 그거 알아? 이렇게 사람 빈 채로 퍼레이드 나간 건 처음이야!”



  나는 느리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이렇게 서툰 사람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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