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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새눈 Aug 09. 2023

행복한 지구 (세계평화 아님)



 하나밖에 없는 꿈을 접으면서 인생의 첫 번째 위기를 맞이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았던 대학생활의 끝이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 영원히 암흑 속에 갇히게 될 것처럼 생각되었다. 내가 꿈꿨던 단 하나의 가능성, 미래가 송두리째 뽑혀 나간 자리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이 생겼다. 커다란 공허가 찾아왔다. 밤하늘을 보아도 더 이상 별이 아니라 어둠만을 찾아보게 되었다. 천문학 밖에 모르고 살았고 그 외의 것들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서 천문학을 제외한 세상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결국 천문학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 셈이지만.

(사실 지금도 내가 관심을 갖는 것 외에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나는 상식이 부족한 편이다.)


이제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뭐가 하고 싶지?....


  늦은 봄, 기죽어 다니는 내가 안쓰러웠던 건지, 시간이 많아 보였던 건지, 아니면 그날 시간이 되는 사람이 나 밖에 없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동아리 선배 하나가 공짜 티켓이 생겼다며 뮤지컬을 같이 보러 가자고 했다. (대학교에 가서도 천체관측 동아리에 가입했다. 별무리,라는 동아리였는데 관측보다는 친목도모 활동을 주로 했기 때문에 술무리라고 불리었으며 선후배 간 사이가 좋았다.) 공연이라고는 초등학교 때 사촌언니의 손을 잡고 누더기를 입은 주인공들이 나오는 연극을 본 게 전부였던 나는 큰 기대 없이 콧바람을 쏘이러 나갔다.


  충무아트홀에서 상연했던 그 뮤지컬의 이름은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판 뉴욕 뒷골목 버전으로 만든 것이었다. 나는 배우들의 화려하고도 멋진 몸짓과 빼어나고 매끄러운 목소리에 압도당한 채로 2시간 반 정도를 홀려 있었다. 바싹 마른 내 영혼에 물이 오른 기분이랄까, 오랜만에 내가 다시 싱싱하게 피어난 기분이 들었다. 격렬한 감동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마치 새로운 인간 종족을 목격한 듯했다. 그들의 열정과 노력에 박수를 아낄 수가 없었다. 거기서 처음 본 남자 주인공 배우의 고운 목소리(와 얼굴)에 반해서 그 후 그 배우가 하는 다른 공연을 두세 번 따로 보러 가기도 했다. (그 배우는 지금 탤런트가 되어서 티브이에서도 볼 수 있다! ^^ ) 그중 하나인 '뮤지컬 화장을 고치고'를 보고 와서 적은 일기는 다음과 같다.



  배우들의 몸짓과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음악.. 그리고 그곳에 함께 있던 사람들의 숨소리와 웃음소리, 박수소리까지... 그 공간이 우주의 또 다른 시공간으로 떼 내어져, 마치 모두가 이 세상에서 잠시 분리된 채, 같은 즐거움을 누리는 마법에 걸린 듯했던 시간! 아늑했고, 즐거웠다. 앞에서 두 번째 줄이라 무대와 가까웠기 때문일까.. 공연이 더욱 생생했던 것 같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세계란...+ㅁ+ 암튼,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막연한 마음으로 여름을 맞이했다. 그즈음 태양은 희망을 태우며 떠올라 찬란하게 나를 죄어왔다. 맑은 절망의 나날들이었다. 나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싸이월드를 들락거리면서 빈둥거렸다.


  그 당시 싸이월드에는 (정확한 단어가 기억나지 않는다. 버킷 리스트 비슷한 거였던 것 같은데.. 암튼) 약간 도전적인 과제들로 구성된 리스트 중에서 한 것과 하지 못한 것을 색깔로 구분하여 표시한 것을 게시물로 올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자기가 해 본 것을 자랑하는 용도였던 것 같다. 좋아했던(좋아하다가 차였던) 남자애의 싸이월드에서 그 리스트를 보았고 내가 못해본 것을 잔뜩 해본 그 아이의 리스트를 보자 괜히 부럽고 샘이 났다. 여행.. 운동.. 음주가무… 스크롤을 죽죽 내리다가 멈췄다.


‘ 1년에 책 100권 읽기.. 는 안 했네?’


 나는 이미 한 달에 평균 다섯 권 정도의 책을 읽고 있었으므로 방학 때 부지런히 읽으면 연말까지는 100권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아이가 못해본 그것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목표에 왜 그렇게 강렬하게 사로잡혔는지 모르겠다. 암튼 나는 고시원에 틀어박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시간을 들여 책을 읽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감상이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까워서 독후감도 꼬박꼬박 썼다. 모르는 단어들은 표시해 놓았다가 뜻을 찾아서 같이 적어 놓기도 했다. 책을 읽다 보니 책에 빠져들어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을 수 있었고, 책을 읽는 것이 더 좋아졌다. 책 속에서 발견하는 은근하고 다정한, 그러나 때때로 나를 압도하는 감동이 참 좋았다.  그렇게 한 계절이 지나갔다.




  마지막 학기. 나는 요전에 보았던 뮤지컬에 여운이 남아 공연과 관련된 교양수업을 하나 신청했다. 그 강의에서는 고대 연극부터 뮤지컬에 이르는 다양한 종류의 공연에 대해서 배웠는데,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바비 맥퍼린의 공연과 뮤지컬 미스사이공이다. 수업시간에 공연 DVD를 감상하면서 나는 그런 류(스토리, 율동, 음악)의 감동에 심취했다.


  바비 맥퍼린 씨는 편안한 옷차림과 어깨 위로 늘어진 짙은 레게머리를 하고서 맨발로 무대 위에 올라 스스로 하나의, 아니 온갖 악기가 되어 음악을 들려주었다. 눈을 감고 그의 음악을 듣다 보면 아프리카의 드넓은 평원에 서 있는 듯했다. 비가 오는 와중에도 비를 맞으며 은은한 미소로 공연을 즐기고 있던 관객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던 기억이 있다. (DVD를 보고 썼던 감상문이 남아 있어서 기억이 떠올랐다.)


  미스사이공 DVD에는 초연을 올리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주인공을 캐스팅하는 과정부터 담겨 있었는데, 필리핀에서 앳된 얼굴의 ‘레아 살롱가’가 오디션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난다. 그녀의 목소리는 내가 그때까지 들어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그때 들었던 미스 사이공의 넘버 ‘sun and moon’ 은 지금도 좋아하는 뮤지컬 넘버 중 하나이다. (뮤지컬 넘버는 뮤지컬에서 사용되는 노래나 음악을 말한다.) 뮤지컬 넘버는 오페라 또는 가요와는 비슷한 듯 다르면서 감미롭기도 하고 웅장하기도 해서 새로운 감동이 있었다. 뮤지컬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신비로운 빛이 새어 나오는 문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문을 열고 빛 너머로 나아가면 앨리스가 되어 환상의 나라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공연에 대해서 너무 몰랐기 때문이었겠지만, 나날이 새롭게 밀려드는 문화적 충격에 나는 약간 패닉상태에 빠진 채로 수업이 끝난 강의실을 빠져나오곤 했다. 별과 우주 이외에 나를 그렇게 흔들어 놓은 것은 처음이었다.


  한줄기 희망이 비쳐 들어왔다고 느꼈다. 기쁨과 감동이 충만한 세계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내가 느꼈던 벅찬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이 무척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기분을 같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행복한 지구. 나는 나의 바람을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용맹한 무식자의 마음으로 한줄기 빛을 따라가 보기로 정했다.


  그리고 12월 31일, 100권째 책의 책장을 덮으며 나는 나의 호랑이(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던 원대한 꿈)를 잘 떠나보낼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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