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있은 후 모든 감상들에 '그 일'이 스며들게 되었고, '그 일'이 얼룩진 생각들은 자신 혹은 누군가를 책망하고 싶은 마음이 되어버려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분출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화가 되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나를 짓누르는 무력감이 되었다. 그런 기분에 휩싸이고 그런 기분을 물리치려고 애쓰는 일이 반복될수록 나는 피로해지고 우울해졌다. 그래서 되도록 '그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었으며 그런 의도는 얼마간 성공적이었다.
▪︎'그 일'이란, 더 나은 경력과 더불어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했으나 이런저런 사정들로 인해 한 학기 만에 자퇴한 일을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거의 1년 만에책이 읽고싶어진 나는도서관에서 <스토너>라는 소설을 빌렸다.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지만 책에 몰입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소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과 자신의 선택을 충실히 감당하는 한 남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배경이 대학교인 데다가 선택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주인공이 겪는 소외감과 고독의 부분들이 나의 기억과 많이 겹쳤기 때문에 '그 일'을 떠올리지 않으래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다 고른 책이 하필이면 나의 의도적 회피를 향한 노력을 단번에 무너뜨리고 작년 이맘때의 나를 정면으로 마주 보게 했다. 나는 불편하고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책 읽기를 도중에 그만둘 수 없었다. 주인공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낀 나는 그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꼭 알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눌어붙은 찌꺼기처럼 남아있다가 다시 떠오른 그 기억을 다시 한번 마주하고 나니,구석으로 치워놓고 모른 척한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곱씹어보기로 했다.
나는 소설에서, 그리고 작년 이맘때 그곳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혹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비겁해지거나 비열해진다'는 것을 목격했다.
최선이라 믿었던 선택, 큰 결심을 하고서 거머쥐리라 결심했던 꿈, 내 남은 시간을 가장 알뜰하게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미래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 절박한 마음을 품고 겁먹은 얼굴을 한 나에게, 학교와 사람들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민낯을 드러냈다.
대학원과 학계의 틀에 갇히지 않은 나의 자유분방한 혹은 멋모르는 생각- (입학 한 학기 만에) 세부전공과 지도교수를 변경하고 싶은 의사를 내비친 것-은 그들 나름의 해석과 입장에서 비롯된 방어기제를 발동시켰다.내가 꾀하려고 하는 변화는 그들의 지위, 평판, 미래, 혹은 자존심과 이득에 위협이 되었을 테고, 결국 나는 모든 것을 잃는 선택을 하도록 내몰리기에 이르렀다.이론적으로는 종이 한장에 사이좋게 사인만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원만하게 이뤄질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관련된 이들 나름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나는 서툰 것이 많고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지도가 필요한 학생이고 약자였다. 대학원에서 학교 시스템, 선생과 제자 관계가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가운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실마리는약간의 너그러움 또는이해였을텐데,내 문제는 거창하고 표면적인 이유들에 휘둘려 그저 짓밟히고 말았다.
누군가는 핑계를 대며 나의 자질을 의심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며 나의 부족함을 지적했다.그 사이에서 나는 내가 애초에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원망하게 되었고, 내가 어쩔 수 없이 선택했으나 자랑스럽게 여겼던 경력들이 보잘것없이 취급되는 것을 목격하며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려 자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은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며, 교수는 후학을 양성하겠다는 순수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이미 다들 아는 사실을 나만 늦게 깨달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나의 순진함이 그저 다른 사람들을 곤란하게 했을지도.
시간이 지나고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나니, 한때 친했던 친구가 했던 말 하나가 내 머릿속을 스쳤다.그 말은 이상하게도 내가 어떤 선택을 하거나 선택에 대한 결과를 되돌아볼 때마다어김없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