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생각해 보면, 최초의 원인은 나 그리고 내가 겪게 될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내린 나의 선택이다. 내가 기대했던 핑크빛 미래로 이르기 위해 적당하다고 판단한 조건들은 애초에 잘 못 전제되었다.
다른 돈벌이 수단 없이 비싼 학비를 내는 대학원 생활을 영위할 형편이 못 되었던 나는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조건만 보고 적당한 학교와 적당한 선생을 선택했다. 나는 내가 적당한 학교와 적당한 선생, 적당한 연구분야를 견디지 못하는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불안과 의문이 문득문득 고개를 들 때마다 커다란 수고를 들여 진로 변경에 성공했다는 달콤한 성취감으로 부정적인 생각들을 마취시켰다.
제일 어렵다고 여겨진 관문을 통과했으니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해 버린 사소한? 어리석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내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아니, 그 위기는 뒤통수가 아니라 정면에서 돌진하고 있었는데 내가 눈을 감고 있었던 건지도....
한동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길을 잃고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었다. 갈증이 나고 가슴이 타는데 머리가 멍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쓰라린 시간이었다.
지금은 그 선택과 꿈이 나와 맞지 않았고, 우주에 대한 미련을 남김없이 털어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또 나의 비겁함도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꿈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여겼으나 돈 때문에 불편해지지 않을 선택을 했고,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알을 깨고 나오기보다 적당한 수준에 머무르며 적당한 결과를 얻는 것에 만족하는 안일함을 택했으며,
나의 이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여 내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으려 했다.
자의든 타의든 내 손으로 끊어낸 길을 속상해 해 봐야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고, 그 길을 이어 가기 위한 다른 방안도 강구해 보았지만 기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나의 시도는 거기까지가 최선이었다.
결국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 그러니까 나의 불완전함으로 인한 선택의 결말이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이었다는 결론에 닿고 보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브런치 북 <별소녀는 자라서 무엇이 되었나>를 엮어내며 과거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동안 재난처럼 닥친 실패 앞에서 스스로를 긍정하게 되었으며, 글을 쓰고 싶었던 꿈을 다시 펼쳐보기로 마음을 정했지만, 그래도 '그 일'과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감정까지는 털어내지 못했다. '그 일'을 떠올리면 화가 치밀고 억울함이 차올랐다. 진정한 의미로 '그 일'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어느 날 내 손에 들어온 한 권의 책 덕분이었다. 책이나 그림 등에서 얻는 감상이나 영감은 결국 자신과 닿아있어, 스스로를 비추고 실체를 깨닫게 한다. 작품을 통해 내가 나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또 그것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 알게 되며, 더불어 나의 한계, 나의 밑바닥, 혹은 나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나의 속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미처 매듭짓지 못한 문제와 맞닿아 있는 책을 정말로 우연히 만났고, 덕분에 다시 한번 '그 일'과 제대로 마주한 후에 비로소 마음을 잘 정리할 수 있었다.
흙을 일구다 흙으로 돌아간 부모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인 문학과 문학을 가르치는 일을 끝까지 하다가 자신의 일부인 책으로 학교에 남게 된 스토너,
무지에 의해 잘못된 선택을 내리기도 하고, 선택의 결과로 시련이나 절망을 겪게 되지만 그 모든 것들을 그저 견디며 받아들였던 스토너,
그 와중에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자신이 꿈꿨던 삶의 조각을 갖게 되기도 하고, 우연한 기회에 운명 같은 사랑도 했지만 평생 고독하고 고독하고 또 고독한삶을 살았던 스토너,
어쨌든 누가 뭐래도 자신을 위한 자신에 의한 선택들 덕분에 더 넓고 새로운 세상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고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스토너,
의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 보여 동질감을 느끼는 동시에, 나보다 의연하게 견디고 견디는 모습에서 모종의 위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