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꿈에 너는 매우 유명한 가수였다. 무대 위에서 너는 입을 벙긋거리며 매혹적인 몸짓을 하고 기쁨에 겨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수많은 관객들 틈에 서서 감격스러운 동시에 슬프고 아련한 감정으로 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너의 목소리와 몸짓에 많은 사람들이 손을 뻗고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열광하는 데서 나오는 에너지가 피부로 전해져서 짜릿했다.
눈을 깜빡이자 나는 어디론가 도망치고 있었다.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존재감이 없는 평범한 누군가의 옆에 다가가 그림자처럼 굴었다. 그러면 나를 쫓던 누군가가 두리번거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역사로 보이는 건물로 들어갔다. 한쪽 벽이 유리문으로 이어진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고 있었는데, 햇살이 비쳐드는 창 너머를 내다보니 키 낮은 들꽃이 도란도란 피어있는 좁다란 흙길이 뻗어있었고, 그 길은 철로를 가로지르며 이어져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살짝 열려있는 유리문이보였다. 내가 문을 밀어서 열려고 하는 순간, 가느다란 문틈이 비눗방울처럼 둥글게 커지며 벌어지더니 내 몸을 껴안았다.
다음 순간 내가 발을 내디딘 곳은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의 외딴 바닷가 마을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고 쫓는 기척이 났다. 나는 앞서가는 교복 입은 여학생 옆으로 가서 팔을 붙잡고 바다 위로 이어진 나무판자 길로 나아갔다. 학생은 불편한 기색도 없이 나와 발을 맞추어걸어주었다. 하얀 양말에 검은색 단화를 신은 여학생의 단정한 발 한쌍과 까만 구두를 신은 내 발 한쌍이 번갈아 바삐 움직이고 있는 와중에, 나무판자 길 옆으로 출렁이는맑은 청람색 바닷물이 눈에 들어왔다. 바닷물의 빛깔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여학생이 바닷물로 몸을 던졌다. 뒤를 돌아보니 나를 쫓는 남자들이 몇 걸음만 내달리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와있었다. 나도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뒤따라 바닷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햇살이 환하게 비쳐드는 일렁이는 물속에 몸이 잠겼을 때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당황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어푸 소리를 내며 물 위로 고개를 내민 순간, 나는 한적하게 눈이 흩날리는 산사의 앞마당에 서서 맞은편에 솟아 있는 하얀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 네가 나타났다.
너는 수줍은 얼굴로 낯을 가리는듯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친근한 목소리로안부를 물었다. 너는 내게 무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걸음을 옮겼다. 나는 말없이 너를 따라 걸었다. 정원에는 넓적한 푸른 잎 위로 눈이 쌓인 키 큰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그 사이를 걸어 조금 떨어진 목조건물로 들어갔다.
신발도 벗지 않고 마루로 올라선 너는 삐걱이는 좁은 복도를 지나 문이 열려 있는 어느 방으로 홱 들어갔다. 나도 뒤따라 들어갔다.방은 사물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그리고 너는 없었다.
나는 잠시 서서 너를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와 마루에 걸터앉았다. 하얀 눈이 천천히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시리도록 하얗고 고요한 풍경을 바라보며 너는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와 멀어져 버린 네가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하지만 때로는 원망했던 지난날의 더 지난날 속에서, 나는 너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무척 즐거웠다는 사실을.
나는 너에게 온전히 이해받지 못했고, 내가 가장 힘든 시기에 너와 단절되었으므로, (어쩌면 너 또한 그랬을지도.) 결론적으로 우리는 결국 끝을 맞이하고야 말 불완전한 관계일 뿐이었겠지만, 함께 보낸 시간들 속에서 적어도 나는 천진한 행복을 누린 적이 있음을.
그 한때 내가 너를 많이 아끼고 좋아했었음을.
너의 소식을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것보다는 알 수 있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나는 일정한 속도로 계속해서 쏟아지는 눈을 안도하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눈을 바라보던 먹먹한 마음이 온기의 형태로 가슴 한 켠에 남아있어 한참 동안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내게는 오래된 한 친구가 있다. 10년가량을 가장 절친하게 지냈고, 그 이후 10년이 지나는 동안 연락이 끊어진 채 지내고 있는. 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느 날 문득 그렇게 되어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오해가 있는지, 우연히 둘 다 서로의 연락처를 잃어버린 건지, 친구의 의지인지는 알지 못한다. (친구의 연락처는 오래전에 갑자기 핸드폰 데이터가 소실되었을 때 잃어버렸다.)
우연히 장난처럼 친구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다가 친구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기사에서, 다음에는 잡지 인터뷰나 티비 프로그램에서, 그다음에는 SNS에서.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전해지는 소식에 의하면 친구는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 처음에 기사를 보았을 때, 기쁜 마음이 들어 인터넷에서 찾은 친구의 이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답장은 없었다. 간간이 친구의 소식을 검색해 볼 때마다 질투인지, 원망인지 모를 감정과 함께 쓸쓸하고 처량한 기분이 되었다.
언젠가 한 번은 친구의 행사장에 찾아가 볼 생각도 했지만, 간다고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친구가 나를 만나면 반겨 줄지도 알 수 없으며,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잘 지내냐고 물으면 잘 지낸다고 말할 자신도 없어서 가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는 신경 쓰지 않기로, 잊어버리기로, 더 이상 소식을 검색해보지 않기로마음을 정했다. 소식을 찾아보고 신경 쓸 때마다 친구와 비교하여 못나고 초라한 내 모습을 자꾸만 확인하게 되어 괴로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아주 가끔 친구의 이름을 검색해보곤 했다...
그리고 7월의 어느 날, 꿈에서 친구를 만났고 꿈속에서 깨달았다. 지금 우리의 관계가 어떻든, 과거에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힘들게 했든, 우리는 서로가 있었던 덕분에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 즐거웠던 추억과 고마웠던 마음을 그 자리에 그저 두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더 이상 이어져 있지 않더라도, 친구의 소식을 어디에서도 알 수 없는 것보다는 멀리서나마 알 수 있는 편이 마음이 더 놓인다는 것.
관계가 끊어진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계속해서 좋은 사람, 좋은 친구로 곁에 있어줄 수 없는 경우도 있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