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어느 날 정오무렵, 나는 해부당하는 개구리 같은 자세로 수술대 위에 누워있었다. 1cm 가량의 용종이 자궁에 자라 있었고, 난임 시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착상을 힘들게 할지도 모를 그것을 제거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옷과 속옷을 모두 벗은 다음 큰 자루 같은 환자복을 꿰어 입고, 푸른 머리망을 뒤집어쓰고, 발목에 인식표를 착용한 나는 왼쪽 팔에 링거바늘을 꽂고 산소마스크로 코와 입을 덮은 채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호사는 배꼽과 가슴 사이에 푸른 천을 수직으로 고정시켜 하체로의 시야를 차단하고, 허리 아래쪽으로 비닐을 깔고, 치과에서 본 적이 있는 -시술 부위만 드러내도록 구멍이 난- 초록색 천을 아랫도리에 덮었다. 그리고는 나의 아랫도리를 차가운 젖은 솜 같은 것으로 몇 번 문질렀으며 이어서 따뜻한 액체를 흘려보내더니 수술준비가 다 되었다며 어디론가 보고를 했다.
온전히 믿을 수 없는 다른 누군가의 손에 내 몸을 맡겨야만 한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워서인지 철제 침대가 서늘해서인지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동안의 병원 방문 동안 의료진에 대한 신뢰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던 것 같다. 간호사는 구두로 합의한 진료 예약을 시스템에 입력하지 않았고, 다음에 챙겨주기로 한 자료를 몇 번이나 잊었으며, 의사는 이전 진료에서 내가 재차 물었던 것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았고, 설명도 없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비급여 검사를 처방했으며, 시술 시 cctv 촬영에 대해 은근히 불만을 내비쳤다. 또 수술 전에는 수습생으로 보이는 간호사가 다른 간호사의 지시를 받으며 내 팔에 링거바늘을 유난히 아프게 찔러 넣어서 불안한 마음이 더 증폭되었다.
잠시 후 의사가 눈만 빼꼼 내놓은 수술복을 입고 들어와 내게 (굳이) cctv가 잘 녹화되고 있으니 나중에 확인해 보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수술자리로 갔다. ('시술 시 cctv 촬영 신청서'에는 경찰을 대동하지 않으면 열람할 수 없다는 조항과 두어 달이 지나면 자료가 폐기된다는 조항이 있었으므로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내가 그 영상을 열람할 일은 없는데, 의사는 그 사실을 몰랐던 걸까.) 곧이어 마취 담당이라고 소개한 의사가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며 내 어깨에 손을 올림과 동시에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힘없이 눈을 떴을 때 흐린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두운 실내와 주변에 둘러쳐진 커튼, 그리고 내 몸 위에 덮인 이불이었다. 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추웠고 기운이 없었다. 수술 전날 먹으라고 처방해 준 약의 부작용 때문에 밤새 복통과 설사에 시달려서 안 그래도 기운이 없었는데, 공복상태로 인한 허기에 마취기운까지 더해지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정신을 조금 차리자 심장박동을 나타내는 규칙적인 기계음이 가까이서 들려왔고, 그 소리 너머로 마취에서 덜 깨어 뭐라고 크게 웅얼거리는 목소리, 아파서 끙끙대는 소리, 환자를 살피는 간호사의 목소리, 복도를 오가는 발소리가 귀에 차례로 들어왔다.
나는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면서 천장을 보았다. 베이지색 천장에는 액체가 부드럽게 흘러가는 듯한 나뭇결무늬가 있었는데, 그 무늬를 보고 있자니 묘하게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나를 특정 짓는 물건이 발목에 채워진 인식표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 처음 보는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격리된 곳에 무력한 상태로 누워있다는 사실이 조금 무서웠다. 무사히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보다는 (시술이 잘 못 되거나, 음모나 범죄에 연루되는 등) 불길한 공상으로 생각이 자꾸만 흘러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몇 겹의 벽과 몇 개의 방을 사이에 두고 보호자 대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남편이 보고 싶었다. 큰 수술도 아니고, 그다지 위험한 수술도 아니라는데, 가랑이 사이의 불편한 감각과 아랫배의 통증은 나를 나약하게 만들고 겁을 집어먹게 만들었다.
나는 위기에 처하여 도움이 필요한 한 마리의 연약한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병원에 갈 때마다 그 비슷한 기분이 들곤 했다. 올해 초에 난임 진단을 받고 몇 달째 한 달에 몇 번씩 병원에 가는데도 긴장되고 불편한 감각이나 초조함은 좀처럼 익숙해지거나 무뎌지지 않는다. 검사를 하거나 결과를 확인할 때면 관념적인 것은 모두 사라진 채로 내가 단지 한 마리의 동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덮쳐오면서, 한 마리 동물로서의 내 가치에 대해 가늠해 보게 된다. 또 각종 수치나 영상결과들에서 드러난 특이사항이 나의 정체성으로 규정되는 것 같아 낯선 기분이 들기도 한다.
불안해하고 걱정을 하고 생각을 하는 정신적 '나'와, 몸을 움직이고 감각을 느끼는 모든 화학적이고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육체적 '나' 사이에 약간의 거리가 생겨난 것을 감지하게 됨으로써 느껴지는 괴리감이 동물적인 영역으로 나의 범위를 축소시켜서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껍데기, 즉 피부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는 귀천도 개성도 트렌드도 없다는 사실, 그 한 꺼풀이 없어지면 우리는 그저 지구 생태계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는 인간이라는 한 종으로써, 모두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사실, 을 떠올리면 내가 소중하다 못해서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지는 동시에, 유한한 생을 사는 한 생물로서 겸허한 마음이 든다.
10여 년 전 병원에 다녀온 날 써놓은 일기가 있다. 나의 병원 경험에는 '고통을 통해 생을 감각하고, 그렇게 생을 감지함으로써 죽음을 인식하게 되는, 혹은 고통을 통해 죽음을 인지하게 되고, 죽음을 감지함으로써 생을 감각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드러나는 것 같다.
따지고 보니 반토막이 된 돼지는 살해당한 거고, 가판대에 늘어놓은 생선들은 납치를 당한 거고, 야채들과 과일들도 키워짐을 당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우리는 살해된 동물을 난도질한 거고, 납치된 생선을 능멸한 거고, 대지를 유린하여 생명을 착취한 건가?....
그렇게 어떤 이의 죽음으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밖에 없는 건가.
그것들의 죽음을 원료로 풍요로워지는 나의 생명은 그것들의 죽음을 영광스럽게 해 줄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걸까.
그것들의 죽음이 내 삶의 연장보다 값어치가 없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참으로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은 식물들 밖에 없는 건가.
사랑니 치료 때문에 치과를 가는 중에 겁을 집어먹어서 그랬는지..
내가 지나쳤던 시장은
싱싱한 생명력이 아닌.. 혼탁한 죽음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만 같다..= _ =
나는 한 마리의 동물인 동시에, 삶을 고뇌하는 한 인간으로서, 현실적으로 어쨌든 껍데기를 장착하고 있으므로 남들과는 구별되는 나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며, 연약하지만 의외로 생명력이 끈질긴 몸뚱이로 살아가게 될 것을 예감한다.
무한에 가까운 광활한 시공간인 우주에서 인간이란 어차피 찰나를 살아가다 사라지는 먼지 같은 존재이지만, 더욱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은 날을 때때로 감당하면서, 더없이 구체적이고 생생하며 활기찬 삶을 간혹 열망하면서, 가끔 진실로 삶을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그리고 종종나의 삶을 위해 희생되는 생명들을 슬퍼하면서.
※ 예전에 어떤 고전문학을 읽다가 2007년의 일기와 비슷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의 제목이나 작가는 잊어버렸다.. 알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댓글 환영합니다. :)
※ 그리고 수술 이후 난임 시술을 시작하면서는 의료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만족하며 병원을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