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쯤이었던가, 썸 타던 남자애가 나중에 결혼하면 아기는 몇 명이나 낳고 싶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런 주제에 대해서 처음 생각해 보았기 때문에 나의 대답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음, 일단 미래의 남편과 상의를 해봐야겠지만 두 가지가 떠올랐어. 들어봐, 첫 번째는 나의 유전자를 복제해서 복제인간을 만드는 거야. 나와 똑같은 DNA를 가진 아이가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랐을 때 어떻게 커가는지 보는 거지. 환경이 달라도 나와 비슷한 외모, 성격, 취향등을 가지며 지금의 나와 비슷하게 커 갈지, 아니면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커 갈지 너무 궁금해. 두 번째는 아이를 아주아주 많이 낳는 거야. 나와 남편 될 사람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능한 많은 유전적 조합에 대한 호기심이랄까. 성별, 외모, 성격, 특징이 모두 다 다른 아이들이 태어날 텐데 그 가능성들이 너무 궁금하지 않아?"
그때 그 남자애가 아마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근데 그건 자녀계획이 아니라 실험 아니야?ㅋㅋ"
내가 조금 특이한 아이였다는 사실은 일단 제쳐두고 저 말을 되짚어보면, 나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결혼 전 남편은 아이를 낳을지 말지에 대한 선택을 온전히 나에게 맡긴다고 얘기해 주었다. 지금도 남편은 아이가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다고 말하지만, 두 살 된 조카를 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면 내심 있어도 괜찮은 쪽에 가까운 것 같다.
나는 단호하게 아이를 원한다거나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한다.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다고 말하기엔 그 삶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걸 잘 알고 있고, 어떤 결정에 따른 변화를 완전히 받아들일 준비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난소는 지금도 늙어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늙어갈 것이며, 머지않아 생식기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물학적인 이유로 인해 내가 아이를 낳겠다고 선택할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몇 년 정도로 제한된다. 몇 년 후에는 고민할 여지없이 아이가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입양이라는 선택지를 고려한다면 아이를 키우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조금 늘어나겠지만, 아이와의 (체력적 금전적 등) 균형 잡힌 인생단계를 그려보자면 더 늙기 전인 지금이 고민을 하기에 적당한 때라고 여겨진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주장하기에는 이 제한된 시간이 주는 압박감이 너무나 크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니까 말이다. 지금의 나는 그다지 아이를 원하지 않지만 확실하게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심이 선 상태도 아니라서 미래의 내가 지금보다 조금 더 간절하게 아이를 원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지울 수 없다.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을 한다면 언젠가 남의 아이 혹은 남의 아이가 나오는 영상을 부럽고 처연한 마음으로 보면서 가임기를 지나쳐버린 스스로를 원망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하지만 아이를 원한다고 하기에는 (물론 임신에 성공해서 아이를 낳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 이후에 펼쳐질 내 인생의 아주 극적인 변화들과 거기에 당연히 수반되어야 할 희생과 힘듦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아이로 인해 힘들고 지치고 피로한 하루의 끝에서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살 수 있었을 또 다른 형태의 인생을 아쉬워하진 않을까 우려스럽다.
나는 계산적이게도 아이가 주는 행복과 아이로 인한 힘듦, 아이가 없을 경우의 상실감을 저울질하고 있다. 아이가 주는 행복 외에도,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나보다 다른 존재를 더 사랑하게 되는 초월적인 경험을 하며 인간으로서 한층 성숙해지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지는 개인적 장점이 있다고도 하지만, 굳이 더 성숙해져야 하나 싶은 의문이 든다. 더군다나 아이가 주는 행복에 대해서는 일말의 달콤한 환상조차 없기 때문에 솔직히 지금은 아이를 원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이 아주 조금 더 기울어 있다.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해 책을 읽고 유튜브를 찾아보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 세계로의 진입장벽은 더욱 높아지는 기분이다. 임신공포증 정도는 아니지만, 알면 알 수록 힘들고 아프고 볼품없어질 내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느낌이 들어 겁이 나기도 한다. 플러스는 없고 죄다 마이너스 투성이다. 텔레비전에서 본 어떤 사람은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이 아이를 낳은 일이라는데, 나는 요리를 해도 남이 맛있게 먹어주는 것보다 내가 맛있게 먹는 게 더 좋은 사람이라, 그 사람의 발언은 다소 뜬구름처럼 여겨진다.
두 선택지는 번복할 수 없으며 양립할 수도 없다. 각각의 전제조건이 동등하지 않은 데다 파생되는 결과를 모조리 파악하고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므로 난해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어떤 것도 미리 경험해 볼 수 없기 때문에 후회 없는 최선의 선택이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아이를 원하게 되는 삶이란 어떤 걸까.
생물이라면 자손번식의 욕구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걸까.
아이를 그다지 원하지 않는 내가 이상한 걸까.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사람들은 어떻게 천지개벽에 비유되는 변화가 동반되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사랑이 넘치는 건강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하게 되는 걸까.
그래서 그렇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나는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걸까.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시부모님의 말에 (아직은) 낳고 싶지 않다는 말을 대놓고 하지 못하는 이유는 괜한 언쟁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에 대해 어떤 확실한 태도를 갖는 것이 뭔가 곤란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것은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 비정상적인 일이고 사회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며 부모에게 불효를 저지르는 일로 비칠 수 있음을 안다. 처음에는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시부모님을 설득하려는 순진한 시도를 했었지만, 그건 어른들 손바닥 위의 얕은 수에 불과했고, 내 나이가 마흔이 가까워지자 그마저도 힘들어졌다. 그래서 최근에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잘 안된다는 식으로 잔소리를 줄이는 방법을 쓰고 있다. 새로운 방법은 효과적이었지만, 단호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못마땅해서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 친구 중 제일 면저 결혼한 A 씨 부부는 처음부터 아이를 원했고 적당한 때가 되었을 때 아이를 가져 얼마 전 돌잔치를 했다. 남편 친구 중 가장 최근에 결혼한 B 씨 부부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합의를 했고 때때로 여행을 다니는 등 둘 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든 명확한 의견을 갖고 나름대로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남편 친구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면 괜스레 부러웠다.
그러다 나이가 있으니 검사나 받아보자는 생각으로 갔던 난임병원에서, 남편과 나에게 사이좋게 문제가 조금씩 있어 자연임신이 힘들다는 진단을 받았다. 여성의 가임기라는 생물학적인 이유가 없었더라면 확신이 들 때까지 결정을 계속계속 유예하고만 싶었다. 결정을 유보한 채로 문제를 얼마간이라도 회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주해야 할 때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내가 아이를 낳기 꺼려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뭔지 알고 있다. 그건 행복한 가족에 대한 나의 믿음이 산타클로스에 대한 믿음과 비슷하다는 데 있다. 나에게 가족과 관련한 결핍은 불치병과 유사하게 기능하여 그 병을 앓지 않는 세상을 살아갈 기회를 박탈했다. 나는 그 병을 앓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건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다. 그 사실이 나를 불완전한 존재로 느껴지게 한다. 나의 결핍이 아이에게 대물려질까 두렵다. 내가 보지 못하고 겪지 못한 것들을 아이도 보지 못하고 겪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차피 나의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는 데 그칠까 봐 두렵다. 남편 또한 부모님과의 정서적 유대가 깊지 않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비슷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내 삶은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의 하루, 나의 성취, 나의 감정, 나의 기억, 나의 신념, 나의 꿈. 그런데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나서 내 삶이 누군가의 삶의 일부이고 내 삶도 누군가의 삶의 일부로 이루어져 있음을, 모든 삶이 서로 끈끈하게 엉겨 붙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처음엔 그것이 좀 쓸쓸하고 허탈한 느낌이었는데, 내 삶에 대한 경계가 애매해지고 보니 온전히 내 것이라고 우길 수 없는 것들을 하나둘 내려놓게 되고, 아무려나 상관없어지는 것들이 늘어나고, 그러다 보니 의외로 마음이 편해진 부분도 생겼다.
반면에 내 삶에 무엇을 더 들여놓을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무엇(식물, 반려동물 등)과 관계하는 동안 그 무엇이 나에게 미칠 영향과 내가 그 무엇에게 미칠 영향을 가늠해 보노라면 자신이 없어져서 결국 각자의 삶을 응원하는 일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버린다. 이러한 관점으로 아이를 고민하다 보면 늘 소박하고 초라하고 쓸쓸한 마음이 된다.
아이라는 존재는 내 삶에 어떤 변수로 작용하게 될까.
나 자신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한다는 건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그런 존재가 생긴다면, 덕분에 혹시 보지 못했고 겪지 못했던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될까.
나에게 아이는, 아이에게 나는 어떤 의미가 되어줄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치유해 줄 수도 있을까.
아이를 선택하는 삶이란 마치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여겨진다. 소용돌이 속에서 나를 송두리째 잃어버릴 것만 같다. 아직은 그렇다.
소용돌이 속에서 '나'와 '나의 가족'과 '나의 삶'이 내가 기대했거나 원하지 않았던 모습이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들을 기꺼이 사랑할 수 있을까.
여기까지의 글들은 어쩌면 그저 겁쟁이의 진지한 궤변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뿐일지도.
아이를 원한다고 해도 나에게 아이가 허락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인데, 너무 생각만 앞선 건 아닐지...
이런저런 상념이 스치는 불안한 마음으로 우물쭈물 글을 마무리지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