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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새눈 Oct 15. 2024

마흔 해를 산다는 것

이토록 서툴고 불완전한 마흔



빨리 마흔이 되고 싶었다. 나는 인생이 마흔 이전과 마흔 이후의 삶으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망망한 꿈을 좇아 20대를 표류하고, 고배를 마시며 생의 파도를 타는 30대를 보내고 나면, 한 인간으로서 무르익은 완전한 어른의 영역, 확실한 것들만 잔뜩 지닌 인생의 황금기가 도래하리라 믿었다.


마흔, 이라는 나이를 기준으로 삼은데 마땅한 근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스무 살에 마흔이라는 나이는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내가 살아온 세월과 맞먹는 스무 해를 다시 보내야만 맞이할 수 있을 나이 마흔, 막연히 그 때라면 당시의 내가 꿈꾸던 모든 일들이 이루어져 있을 것 같았다. 서른 살에 마흔이라는 나이는 예측가능한 시나리오상에 존재하는 확률론적 시공간처럼 여겨졌다. '열 번의 1년'이라는 통제가 가능한 자원을 잘게 쪼개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수정해 나간다면 개정된 버전의 미래로 확실하게 나아갈 수 있겠다는 나름의 계산이 서 있었다.


30대를 절반 하고도 조금 더 지나던 어느 날, 예정에 없던 심경의 변화들이 한 방울씩 모여 앞으로의 인생 방향을 송두리째 틀어버릴 거센 물줄기로 바뀌었을 때만 해도 단순히 나의 황금기가 몇 년 더 늦춰질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마침내 마흔이 되었을 때, 내가 가졌던 마흔에 대한 기대가 터무니없는 환상에 불과했으며, 크나큰 오산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 마음의 흐름을 따랐기 때문에 벌어진 특정한 사건이라기보다 잠재된 나와 세상이 결합하여 빚어낸 결정론적인 결과에 가까웠다.


마흔의 삶은 착실하게 그려온 밑그림에 다채로운 채색이 더해져 더욱 풍성하고 깊은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형태이기를 바랐다.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들이 조금의 낭비도 없이 적재적소에 녹아들어 밑그림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함으로써 꽃이 만발하기 시작하는 정원 같은 풍경이기를 바랐다. 안정적인 커리어를 가지고, 사회적 개인적으로 성숙하며, 물질적 정신적으로 안정된 상태이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경력이 단절되고, 경제적으로 불안정하며, 인간적으로 성숙하지도 정서적으로 편안하지도 않다. 경로에서 완전히 벗어나버린 열외자가 된 것 같다. 애초에 그려놓은 밑그림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고, 내가 길러낸 것은 고작 열등감에 불과하다.


나이에 알맞은 것들을 획득해야만 제대로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관습의 기준에서 보자면 나는 늘 조금씩 느린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런 평가가 나를 조급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저 스스로를 조금 늦게 피어나는 꽃이라 생각했고, 남들은 질러가는 길을 빙빙 돌아가면서 획득한 스토리도 오히려 나를 나답게 만들어 남들과 구분 지어준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흔을 맞이한 후,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 늦게 피어날 '꽃'이 아니라 더 이상 피어날 무언가를 가지지 못한 초라하고 비정형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껏 나에게 해가 가고 나이를 먹는 일은, 그저 어제가 가고 오늘이 오는 일의 연장선이었다. 1년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시간에 인간이 인위적으로 매겨놓은 눈금일 뿐이고,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어떤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으므로 나이라는 숫자가 늘어가는 일이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일도 유난스럽게 느껴지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마흔은 이상하게 뭔가 달랐다. 인생의 또 다른 단계로 나아가는 변곡점에서 도약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버릴까 조바심이 나고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마흔은 그림자처럼 환영처럼 내 삶에 드리워졌다. 마흔을 너무 기다려온 탓인지 몇 해째 마흔으로 사는 기분이었다. 오래된 직업(기상 연구원)과 오래된 꿈(천문학자)을 완전히 버리게 된 것은 마흔이 짙게 드리워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흔 이전의 시간들을 열심히 살았으므로 마흔에는 그에 따르는 보상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 그 보상이 내가 원하는 모습의 삶이어야 한다는 강박, 인생의 액기스라 여기는 마흔 이후의 시절에 더 이상 후회나 미련이 없어야만 한다는 집착이 그동안 가질 수 없었던 결단력과 추진력을 발동시켰다.


그래서 '나를 갉아먹는다고 여기는 일을 계속해봤자 마흔 이후에는 이직이나 재취업도 힘들 테니 더 늦기 전에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의외로 흔쾌히 오래된 꿈을 다시 붙잡을 수 있었다. 또, 늦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오래된 꿈을 향해 첫 발을 내디뎠으나 잘 못 끼워진 단추 같은 선택으로 인해 궁지에 몰리게 되었을 때도, 그 선택을 되돌리기에 이미 너무 늦어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을 때도, 오히려 쉽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 마흔이라는 나이를 들이대면 신기하게도 무언가를 하기에 이르거나 늦다는 판단이 수월해졌다. 그저 갖다 대기 편한 핑계였을지도 모르지만, 무언가를 깔끔히 포기하거나 자신감 있게 밀어붙이기에 마흔이라는 나이는 매우 알맞은 계기가 되어주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을 줄 알았던 마흔에 가지고 있던 것들을 되레 다 잃은 상태가 되었다. 오랫동안 그려왔던 나의 이상을 떠나보내고는 한참 공허를 앓았다. 누름돌처럼 나를 압박하고 괴롭히던 것들이 사라지니 그 자리가 오래 눌린 탓인지 어딘가 푹 꺼지고 비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알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생긴 듯했다. 조금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그제야 막혔던 곳이 트여서 바람이 통하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있게 된 것 같기도 했다.


이만큼 살아오면서 체득한 유일한 진실은, 뻔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것은 변해간다는 것이다. 그토록 좋아했던 대상을 증오하게 되기도 하고, 갈망하던 것을 더 이상 갈망하지 않게 되기도 하고, 중요했던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기도 하고, 잊고 싶지 않았던 일을 잊기도 하고, 굳건하리라 믿었던 관계가 깨어지기도 하고, 절대 일어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일들이 현실이 되기도 하며, 가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들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못마땅하고 삶의 의욕을 잃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삶에 흥미를 더해주며 모험을 걸어볼 용기와 희망을 주기도 한다.


완전한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풍요의 시절을 보낼 거라고 기대했던 마흔에 길을 잃고 가진 것도 잃으며 나는 깨달았다. 완전한 어른이 되는 특정한 임계점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마흔 살의 내가 가져야만 하는 건 물질적 풍요나 사회적 성취가 아니라 오롯이 존재하는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진부한 얘기지만, 미혹되지 않는 나이라 하여 마흔을 불혹이라 부른다는데, 그 의미를 마흔이 되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나를 지켜내며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는 것.


전혀 미혹되지 않는 수준은 아니지만, 의도치 않게 다른 모든 수식어를 제외한 나 자신으로, 가장 나다운 나로 살고 있는 지금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음을 느낀다. 100%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가진 게 없는 상태의 나 자신일지라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는 게 아닐까.





마흔을 열망하고 의식한 덕분에 더 이상 무언가 놓쳐버렸다는 상실감 없이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남들보다 일찍 마흔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남들보다 조금 더 정성 들여 마흔을 준비했나 보다.


제대로 여물지 못한 부실한 뿌리에 매달리는 나무가 되는 대신에 단단한 지반에 튼튼하고 아름다운 성을 쌓아 올릴 것이다. 빛나기 위해 무엇을 가지려 하지 않고, 생의 모든 순간들을 빛나는 눈동자에 담고자 할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무엇이든 품을 수 있고 무엇이든 길러낼 수 있는 씨앗의 상태로 다시 여물어가고자 한다.


여전히 흔들리고 주저하며, 이토록 서툴고 불완전한 마흔을 살아내는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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