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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새눈 Oct 22. 2024

콩가루 집안 장녀의 고백

생존전략으로써의 콩가루 집안의 비애




우리 집은 흔히 말하는 콩가루 집안이었다. 콩가루 집안이라고 하면 이미 파탄난 가정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가족에게 콩가루 집안은 생존 전략 같은 것이었다. 엄마와 나, 그리고 동생은 폭군인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끈끈하게 연대했다. 피해자이자 피식자였던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한 덩어리인 채 오랫동안 살았다. 그러다 내가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그 작전은 시작되었다. 나는 대학을 가느라 집을 떠났고, 1년 후엔 엄마가 아빠를 (몰래) 떠났고, 그다음 1년 후엔 동생이 대학을 가느라 고향을 떠났다. 우리는 아빠로부터 뿐만 아니라 서로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빠로 인한 불행은 나머지 가족을 연료로 해서 타오르는 불길 같았다. 그 불길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최대한 멀리 가야 했고, 최대한 흩어져야 했으며, 최대한 연결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야 했다. 가까이 있어도 서로를 지켜줄 수 없고 그저 함께 연소될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납득했다. 우리는 서로 멀어지기로 합의하고 불행했던 과거를 정표처럼 나누어 가짐으로써 완벽한 공모자가 되었다.


나는 멀리, 점점 더 멀리 갔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처음엔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 노선의 종착역이 있는 도시로 갔고, 그다음엔 의도적으로 비행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섬으로 갔다. 여차했을 때 아빠가 당장 오기 힘든 곳, 혹시라도 아빠가 오게 된다면 그동안 내가 어딘가로 숨거나 대책을 마련할 시간이 생기는 곳으로.





한 때 서로를 이어주던 다리 같았던 물리적 거리는 이제 우리 사이의 경계를 두텁게 만들어 모두를 섬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어차피 성인이 되면 자식들은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을 하게 된다지만, 서로를 위한다는 명목아래 서로를 계속해서 떠나보내며 도망치듯 살아온 20년을 과연 흔한 의미의 독립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그건 말하자면 퇴로를 차단해 버리고 계속해서 도망치는 피난민의 삶에 가깝지 않을까. 함께 남긴 사진도 거의 없는 채로 휘발되어 사라진 그 시간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으로만 여겼던 그 거리가 우리에게 미칠 수 있는 또 다른 영향을 그때의 우리는 알지 못했다. 지금 우리는 그 거리에 너무 익숙해져 렸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떨어져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어졌음에도 우리는 함께 살지 않는다. 자기만의 영역을 넓혀가며 저마다의 삶을 꾸려갔던 거의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각자의 삶이 섞일 여지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언젠가 우리는 아빠 없이 모여서 살 날을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을 긋던 마음으로 그려보곤 했었다. 그럴 수 있는 날이 십여 년 만에 찾아왔지만 이제 서로를 지킬 필요가 없어진 우리는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찾듯 그 영역을 혼자서 지키며 산다.


언제부터였을까.

나의 가족이 이렇게 멀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조금씩 덜 사랑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된 것은.

매일 살을 부대끼고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면 아무리 가족이라도 소중함이나 친밀함의 농도가 조금씩 옅어지게 되어버리는 걸까.

같이 살지 않은지 20년쯤 되면 이 정도의 거리, 이 정도의 느슨한 유대가 당연한 걸까.

같이 있을 때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고 느껴도 헤어지는 모습이 안쓰럽고 애처롭다면 그건 사랑일까.

함께했던 대부분의 시간이 불행했다고 해도 그 불행을 기꺼이 함께 견뎌왔다면 그건 사랑일까.

지나가버린 기억들이 아파서, 때로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미어져도 애써 웃어 보일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일까.

무엇이든 줄 수 있는 당연함도 사랑일까.

혹 의무감이나 부채감은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반찬으로 차려진 밥상이, 내가 좋아했던 과일이 놓인 접시가, 뭐라도 하나 더 먹이고 싶어 하는 바쁜 손짓이, 가끔 꿈을 꾸는 듯이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갈색 눈동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의 행동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열 달 동안 뱃속에 품었던 시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어린 시절의 나를 기르고 가르쳤던 시간, 나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시간들 속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내 곁을 지던 존재가 이제 와서 나를 사랑하지 않을 리 없다.


때때로 나 대신 아빠의 화를 감당하고도 그 사실을 숨겨주던 과묵함이, 핀잔을 하면서도 결코 밀어내지 않던 옆자리가, 잘 가라고 말하며 아쉬움을 감추던 미소가, 뜬금없이 내가 필요했던 물건을 건네며 나를 놀래키던 장난스런 표정이, 나를 아끼는 이의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다. 내가 나만을 신경 쓰며 살아오는 동안 온 인생을 내 곁에서 보내며, 내가 보지 않을 때에도 때때로 나를 돌아봐주었을 존재가 이제 와서 나를 싫어할 리 없다.


그렇다. 생각해 보면 변한 건 나였다. 혼자 편하자고 멀리 도망간 것도, 내 앞가림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소원해지기 시작한 것도, 힘든 건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으려 성을 쌓듯 살아온 것도, 마음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들의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려 한 것도 나였다. 그들과의 연대가 느슨해졌다느니 그들의 사랑이 변했다느니 가타부타할 자격이 나에겐 없다. 설령 그들의 사랑이 진짜로 변했다고 해도 나는 토를 달아선 안 된다.


내가 조금만 더 책임감 있고 희생적인 인간이었다면 그들에게 무언가 도움 되는 일들을 더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내 몸과 마음이 불편한 것이 싫어서, 나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 거라고 감히 생각하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다른 이를 내버려 두는 무정한 사람이 되는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을 하면서, 내가 인정머리가 없고 이기적이며 무능력한 사람임을 책망했던 것 같지만 금세 잊었다. 나라도 나를 챙겨야만 하는 혹독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챙기기 벅찬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단단히 부여잡고 자기 몫을 해내며 다른 이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도 모두에게도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각자도생, 그 방법이 모두가 안정적인 미래를 꾸려갈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생각과 행동들이 무책임해 보일 수 있음을 안다. K-장녀라면 자신의 무엇을 포기하더라도 가족을 돕고 헌신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옛 말에 첫째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데 서울로 대학을 가서 취업도 한참 늦었던 나는 오히려 살림 밑천을 거덜내고 말았다. 나는 받기만 하고 돌려주지 못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동생이 자리를 잡도록 내가 지원을 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동생에게 상처로만 남은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조금 덜 겪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스스로가 가장 중요해서 나 밖에 몰랐던 나의 생각과 행동들을, 나를 그렇게 빚어낸 비극 탓이라고 둘러댄다면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책임하다는 질책을 피할 수 없을까.





고백하자면 불행의 근원은 아빠였지만, 아빠를 둘러싼 모든 것,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불편했다. 엄마와 동생은 나의 불행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함께 있을 때 아빠를 떠올리게 되고 아빠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그로 인한 긴장감이 즐거움에 들러붙어 조건반사처럼 기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함께 있어도 때로는 어색했고, 때로는 부담스러웠다.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을 견디다 보니 정체성에 금이 가고, 아빠를 미워하면서도 아빠를 쥐어짜 생활할 수 밖에 없었던 시절을 살아내며 자존감이 부서졌으며,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최악의 인연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온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버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한 원인을 따지는 건 크게 의미가 없었다. 어쨌든 나를 두렵게 만들고 힘들게 하는 건 폐허가 된 세상 그 자체였으니까.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나는 그저 스스로를 끔찍해하고 미워하며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멀리, 더 멀리, 필요 이상으로 더 멀리 갔던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드는 것도 싫고, 그런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는 나도 싫으니까, 나를 아는 사람도 나를 방해할 사람도 없는 외딴곳에서, 무엇에도 속하지 않는 오로지 한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으로 살고 싶었다. 꼭 한 번이라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다. 내가 무언가 싫어하고, 좋아하고, 잘하고, 못하는 것들이, 내 고유의 특성이라기보다 그럴 수밖에 없는 뿌리 깊은 개연성을 가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싫었다. 나의 그런 점들이 내가 사랑했던 친구나 연인들이 나를 밀어내고 외면하되어버리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 나를 참 슬프게 만들었다. 그 모든 것이 총체적인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의지와 나에게 부여된 서사를 부정하여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여 내내 나를 괴롭혔다.


실상 나를 이루고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그 개연성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바라보는 눈빛, 누군가를 부르는 손짓, 음식을 씹는 습관, 전화를 받는 방식 등 사소한 것들조차 그 개연성에 묶여있다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의 선택은 내 손에 달렸으므로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달라지는 건 미래지 내가 아니다. 그 미래 속에서도 나는 스스로에 대한 냉소를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끝내 자기혐오를 벗어던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불행을 관통해 온 이후, 각자의 삶에 충실했던 20년 동안에 서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낱낱이 알지 못한다. 우리는 조금씩 변했고, 서로를 조금씩 잊었다.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서로가 잘 아는 우리는 20년 전 모습에 멈춰있다. 이제 떨어져 살았던 시간이 같이 살았던 시간을 넘어서게 된 우리는, 하다 보니 멀어져 버린 아이러니 속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과거는 어쩌면 최선이었다.

그렇다면 그 시간들을 꿋꿋이 견디며 마련한 지금도 우리의 최선인 걸까.

아직 살아보지 못한 미래에는 내가 짐작하지 못하는 어떤 시절들이 더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점점 더 멀어져 각자의 궤도를 도는 유사한 속성을 지닌 외로운 별들이 되어버리는 걸까.

아니면, 다시 서로를 끌어당겨 새로운 별들을 탄생시킬 수 있는 은하로 거듭날  있을까.







커버사진은 허블사이트에서 가져온 NGC5257(좌) 과 NGC5258(우) 이미지로, 서로 상호작용 하고 있는 두 개의 은하다.

과학적 사실을 제쳐두고 보면, 두 은하는 가까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멀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모습이 왠지 나의 가족과 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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