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나에게 꼭 필요한, 귀한 것이었음을 아는 지금은 그 시절이 참 고맙다.
덕분에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또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조금씩 천천히 알아갈 수 있었고
그 와중에 만났던 많은 사람들 덕분에 값진 배움을 얻었으며
또한 바로 그때 그곳이 아니었으면 평생 마주치지 못했을 순간들을 경험하는 행운도 얻었다.
조각도처럼 나를 비껴간 그 시간들은 때로는 고통을 수반했지만
결국 남들과 구별되는 나다운 모습으로 나를 조각해 놓았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20대를 지나왔다고 해서 30대에 접어든 내가
그때에 비해 엄청나게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나무가 자라면서 1년마다 나이테를 그어내듯 20대와 30대를 구분 짓는 계기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서른이라는 숫자를 내 나름대로 기념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른 맞이 여행은
나의 꿈과 미래가 나의 의지대로 실현될 수 있음을 실증하는 하나의 커다란 의미로서
앞으로 내가 살아낼 시간들을 위한 사소한, 조금은 (많이) 사치스러운 세레머니라 할 수 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처음 서호주를 본 이후로,
나는 막연히 그 천연의 바다에서 이제껏 내가 만나지 못했던-
한 번도 누군가에 의해 길들여진 적이 없는 펄떡이는 푸른 심장을 가진-
나를 건져내 올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낯선 땅에서 조우하게 될 모든 것들- 예를 들면 그곳의 열기, 향기, 소리, 빛깔,
분위기 등등-을 여과시킨 나의 영혼이 좀 더 깊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또한 그 이후에 낯선 나와 조우하게 될지도 모를 순간까지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어쩌면 고래상어, 혹등고래들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올지도 모르겠지만
여행 이후에 또 다른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더욱 나다운 내가 되어있기를 소망한다.
- 2015.02.08. 신나지만 조금은 두렵고, 설레지만 조금은 막막한.. 떠나기 5일 전 밤에. -
나는 생긴 대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당당하게 살 거고
누군가를 위해 살지도 누군가에 의해 살지도 않을 것이므로
지금을 마음껏 누리면서 기뻐하면서 지낼 거야.
나는 지금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좋아.
너와 사랑한 기억을 가진 나
호주의 붉은 땅을 밟고, 빛나는 바다를 안고, 열대의 뜨거운 바람을 지나온 나
아픈 만큼 충분히 성숙해 가고 있는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진 나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나
그리고 미래 또한 행복할 거라고 말할 수 있는 나는.
여기,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아프고 힘들고 흔들릴지라도 나다운 선택을 하면서 나를 사랑하며
지금을 새눈스럽게 살아갈 것이므로 :)
- 2015.07.17. -
그리고 10년 후 2024년 2월,
'오키나와 베이비'를 소망하며 남편과 함께 오키나와 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약하고 난 이후, 의사로부터 '자연임신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4월 말, 우리 부부는 예정대로 여행을 떠났다.
4년 전 신혼여행 이후 처음으로 떠나는 해외여행이라 우리는 매우 들떠 있었다. 나는 오키나와의 반짝이는 에메랄드 빛 바다를 실컷 볼 생각에, 남편은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고 올 생각에 밤잠을 설치고 찌뿌둥한 몸으로 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비행기 탑승을 앞두고 컨디션이 안 좋아질 것만 같은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고, 오키나와는 흐린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으며, 우리나라와 반대인 주행차선으로 인해 운전에 난항을 겪으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고, 낯선 환경에 던져진 배고픈 우리는 점점 더 날이 서고 예민해져 갔다.
내 컨디션은 좋았다가 나빴다 했으나 대체로 나빴고, 4박 5일 동안 우기가 아님에도 우기 같았던 날씨 (수평선 위에서 번쩍이던 화려한 천둥번개, 물을 들이붓는 수준으로 퍼붓던 섬나라의 스콜, 잔잔하게 흩날리던 안개비 등)로 인해,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바다'를 거의(5분도 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바다 스케줄 (민나섬 방문을 포함한 스노클링 투어)을 포기해야 했고, 그렇게 어긋난 스케줄 때문에 남편이 가장 기대했던 '맛있는 음식'도 제대로 찾아서 먹지 못했다. 빠듯한 스케줄 탓에 츄라우미 수족관에서는 돌고래쇼를 놓쳤고, 길을 잃어 늦게 도착한 동물원에서는 일본어를 제대로 읽지 않은 탓에 바다 다음으로 보고 싶었던 카피바라도 만나지 못했으며, 그나마 계획하고 방문했던 몇몇 장소는 기대에 못 미쳐 시간이 아깝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나이가 들고 운동이 부족해 떨어진 체력과, 날씨나 상황 등의 변수를 고려하지 못한 빡빡한 스케줄에 쫓기듯 다니느라 숙소에 도착하면 지쳐 쓰러져서 잠을 자기 바빴고 (오키나와 베이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피곤한 상태로 자꾸 틀어지는 일정을 조율하면서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마다 우리가 서로 이렇게나 다른 사람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한마디로 망한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른 집에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서야 비로소 잡고 있던 긴장의 끈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오른쪽 차선으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집과 가까워짐을 느끼며 우리에겐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돌아오기 위해서 떠난다는 누군가의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푹 자고, 짐을 정리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장을 보는 동안 여흥은 재빠르게 가라앉고 일상이 주는 안도감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러다 문득 냉동실 문을 열었을 때 면세점에서 사 온 망고맛 초콜릿을 발견하거나, 출출해서 간식을 찾다가 선반에 놓아둔 오키나와 특산품 과자 친스코에 시선이 닿거나, 책상 서랍을 열다가 옆면에 붙여놓은 고래상어 마그네틱과 조우할 때면 우리가 오키나와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되곤 했다.
그래도 친스코 과자를 한입 베어 물고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달콤함을 음미하다 보면 이번 여행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달콤함과 함께 스며들었다. 당시에는 감기기운과 더불어 갑자기 증가한 활동량으로 인해 누적된 피로감과, 흐리고 비가 오는 날씨로 인한 습하고 끈끈한 공기, 또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이 주는 불안함때문에 좋은 것을 온전히 좋다고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할 만큼의 여유도 생겼다.
동물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네오파크 동물원에서는 왕관 같은 머리장식이 있는 목이 긴 새가 내게로 다가와 말을 거는 듯했고, 공작새 곁을 스치듯 걸었으며, 토닥토닥 비가 오던 아침에 우리 둘 밖에 없었던 비세후쿠기길에서는 촉촉하고 청량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은빛 바다와 고즈넉한 숲 사이에 놓인 신비롭고 이국적인 풍경 속을 누볐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도착한 나키진 성터에서는 비가 멎고 안개가 내려앉은 옛 성터의 몽환적인 풍경을 내려다보며 싱그러운 바람을 쐬었고, 민나섬에 가는 대신에 방문한 다이세키린잔에서는 다른 세계로 이어질 것만 같은 울창한 아열대 숲과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흙내음 가득한트래킹 길을 걸으며 신성한 숲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으며,껍데기가 뾰족하거나 껍데기에 까슬까슬털이 난 달팽이, 식물원 온실에서만 보던 관엽 식물들, 잎이 매우 커다란 나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꽃송이 등 처음 보는 생물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다. 밥을 먹으러 우연히 들렀던 헤도 곶에서는 여유로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레스토랑에서 의외로 맛있는 식사를 했고, 주름지고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가 절벽을 이루어 드넓은 바다와 맞닿은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며 커다란 해방감을 느꼈다. 또 츄라우미 수족관에서 만난 고래상어는 생각보다 더 경이로웠다.
생각해 보면, 찰나였지만 눈앞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외부와 경계가 없어진 나 자신이 그곳 공기와 하나 되는 기분이 들었던 순간도 있었고, 계속해서 쫓기고 뭔가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아주 깊은 잠을 잤으며,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긴 했지만, 문득문득 파도처럼 스르륵 다가와 내 마음을 툭 건드는 남편의 배려에 서로가 있음이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로만 잔뜩 채워진 흐린 날의 섬 여행으로부터,
여행에는 성공이나 실패가 없다는 사실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마주한 기쁨이야 말로 더욱 반짝이고
낯선 곳에서 겪는 생애 최초의 경험들은 나를 성장시키고 풍요롭게 하며
갑자기 닥친 불행 속에서야말로 소중한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는 사실을,
여행과 삶은 기억 그 자체로 소중한 시간들임을배웠다.
남국의 섬 한가운데서 나는 한뼘 자라났다.
되돌아보면 나의 30대는 오키나와 여행과 닮아있었다.
원하는 것이 비교적 분명했으나 변수가 많았고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았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보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았고, 내가 선택을 한다기보다는, 내게 주어진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가장 높은 확률로 내게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내가 잃게 될 것을 잃으면서 살게 된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이것을 원했지만 내게 주어진 것은 대체로 저것이어서 속상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 과정에서 나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며, 나중에 돌아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져 저것의 선택지가 결국 내게 더 이로웠음을, 나빠보였던 것들도 지금을 위해 일어났어야만 하는 일이었음을, 결국 더 나아지기 위해 나쁜 시절들을 돌아온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덕분에 좋게 말하면 인생을 낙관하게 되었고, 나쁘게 말하면 포기를 배우고 패배에 익숙해졌거나, 또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스스로를 위무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인생을 조금 더 살아오는 동안 얻게 된 지혜'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작동된방어기제' 중 어느 쪽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이제 이것 대신 움켜쥔 저것을 납득하고 긍정하며 잃은 것들을 크게 아쉬워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이를 활용하여 길을 잃은 데다 자기 확신도 부족한 지금을, 더 나아지기 위해 돌아가고 있을 것이 분명한 이 시절을 잘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낯선 곳에서 온전히 느껴보는 나 자신의 감각과 그 과정에서 획득한 기억들이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
그 이후의 시간들을 살아내는 데 있어 내가 나로서 살 수 있도록, 필요한 순간에 내가 나를 잘 지탱할 수 있도록 하는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을 믿는다.
앞으로의 또 다른 10년을 잘- 살아내기를, 막연한 기대가 아닌 선명한 직관으로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