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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새눈 Aug 24. 2024

허무를 비춘 달빛

한 줄기 달빛이 내게 보여준 희망



대학원에 진학했다가 자퇴를 한 후, 다른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 머물게 된 이후로 나의 생활은 단조로워졌다. 규칙적으로 하는 일은 하루 두 번의 식사를 준비하고 정리하는 일과 집안일, 주기적으로 하는 일은 필요할 때 남편의 일을 돕는 것 (상품 포장 혹은 포토샵 작업). 그 외에는 마음이 내킬 때 책을 읽거나 핸드폰으로 영상을 본다. 병원에 가거나, 남편과 저녁에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가는 것 외에는 집 밖을 나가는 일도 좀처럼 없다.


생활이 단조로워진 이후로 밤에 잠들기가 어려워졌다. 하루의 끝에서 또 한 페이지의 공백으로 남겨진 하루를 마주하는 일이 괴로웠다. 아침이면 새것 같은 오늘이 밀려왔다가, 밤이 되면 아직 새것인 채로 오늘이 빠져나갔다. 무언가 잡아야 한다는 본능으로 손을 뻗지만 허우적댈 뿐인 모양새로 시간이 밀려들고 새어나가는 바닷가에 서있는 듯했다.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와 무언가를 하지 않아야 할 필요가 모두 없다고 느꼈다. 그저 서서히 어딘지 모를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라고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납득했을 뿐이다.


일찍 자야 할 필요

일찍 일어나야 할 필요

무언가를 찾아야 할 필요

무언가를 생각해야 할 필요

무언가를 원할 필요.


때때로 발목에서 찰랑대던 물이 훅 하고 차올라 나를 수면 아래로 밀어 넣을 것 같은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때때로 시간의 파도가 나를 조금씩 침식하여 결국 내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파도를 잡아야 하는데, 오늘을 멋지게 낚아채야 하는데.' 와 같은 아쉬운 생각도 언젠가부터는 들지 않았다. 그렇게 매일 밤 빈손으로 허무를 움켜쥔 채 잠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샤워를 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불 꺼진 침실에 들어서는데 환한 빛 한줄기가 먼저 잠든 남편의 몸 위에 드리우고, 그 아래로 선명한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평온하고 고요한 풍경, 빛과 어둠의 절묘한 조화, 익숙한 공간이 던져주는 새로움에 취해 잠시 넋을 놓고 방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빛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저 불빛은 뭐지? 가로등 불빛인가? 아니지, 여기는 20층이니 가로등 불빛일리가 없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창문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보름에 가까워가는 둥근 달이 떠있었다.


달빛의 밝음에 새삼 놀라며 기분이 산뜻해졌다. 햇빛을 쬐듯 은은한 달빛을 오래도록 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잠든 남편의 얼굴이 달빛에 물들어 괜히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침대로 걸어가 몸을 뉘었다. 한참을 눈을 뜬 채 누워 있었다. 달이 움직이며 방 안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기껏 들뜨고 밝아진 마음이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눈을 깜박이며 어두워진 허공을 응시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어둠 위로 어슴푸레 사물들이 떠올랐고, 금방 선연해졌다. 새삼스럽게 깜짝 놀랐다. 눈이 어둠에 적응한 것뿐일 텐데, 마치 어떤 깨달음을 얻은 듯, 내가 어떤 능력을 얻게 된 듯한 기분이 들어 힘이 솟았다. 그날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잠이 들었다.




가끔, 뿌듯함을 안고 잠이 들었던 '그 밤'을 떠올린다. 아직도 잠들기 어려운 밤들을 보내고 있지만, 한 줄기 달빛이 내게 보여준 희망을 곱씹으며 가만히 안도한다.



어둠이 내렸을지라도, 어둠 덕분에 새로운 아름다움을 마주하게 되기도 해.

시간을 잘 견뎌 어둠에 적응이 되면,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제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내가 보아야 할 것들은 아마도 사라지지 않고 제자리에서 나를 기다려 줄 거야.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결국 해가 떠올라 빛 속에서 그것들을 다시 만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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