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쯤 싸이월드에서 유행했던 100문 100답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친구의 애인이 강동원이 아닌 이상, 친구를 잃을 일은 없다!"
그러나 3년 전에 방영했던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을 얼마 전에 뒤늦게 보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친구의 애인이 저 정도로 생기면 불륜도 집착도 개연성이 생길 수 있겠어...." -ㅂ -
드라마는 한 마디로 불륜 이야기였다. 저마다의 사정을 제쳐두고 사실관계만 요약하자면, 부잣집 유부녀와 결혼을 앞둔 가난한 미대생의 불륜으로 인해 유부녀의 가정과 결혼 예정이던 커플의 관계가 틀어지고 망가져, 당사자들의 삶이 다 같이 불행해지는 이야기다. 나는 불륜녀(정희주-고현정 배우)를 보며 '어머, 부자 남편 덕에 잘 먹고 잘 사는 유부녀가 저러면 안 되지! 남편하고 애들은 무슨 죄래.', 불륜남(서우재-김재영 배우)을 보며 '아니, 아무리 잘생겨도 그렇지, 결혼을 앞둔 남자가 저렇게 행동하면 쓰나!', 불륜남의 예비신부(구해원-신현빈 배우)를 보며 '아이구, 아무리 억울해도 저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어쩌려고 저런대~. 아휴 참.' 하는 식으로 훈수를 두는 아줌마처럼 혼잣말을 읊조리며 드라마를 시청했다. 드라마는 불륜남(서우재)이 죽고, 불륜녀(정희주)가 가진 것을 다 잃으며 씁쓸하게 끝이 났다. 드라마가 수작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은은한듯 짙은 여운이 일주일이 지나도록 오래 이어졌다. 여운의 정체와 이유가 분명하지 않아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찝찝함을 덜어내기 위해 다른 것을 하면서도 계속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그 드라마를 붙들고 곱씹으며 얽힌 실타래 같은 여운을 풀어내려 애썼다.
유부녀의 입장에서 불륜을 했거나, 불륜을 시작할 뻔한 위기가 있었거나, 곁눈질하여 마음에 품었던 대상이 있어서 그 사실을 혼자 몰래 감추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드라마를 떠올릴 때면 이따금씩 가슴이 콩콩 뛰었다. 왜?라는 질문에 스스로도 시원하게 대답할 수 없어 멍해지곤 했다. 20년 전 문답에서도 대답했듯 현재의 나에게도 불륜이 개연성을 가지고 발생하려면 드라마 속 불륜남 역할을 맡은 배우 정도의 외모나 매력 정도는 가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ㅅ -) (드라마 속 불륜남은 젊은 데다가 매우 훤칠하고 매혹적인 목소리를 가졌다.) 현실적으로 그런 사람이 돈도 없고 외모도 뛰어나지 않은 마흔살 아줌마에게 호감을 가질 리 만무하므로 내로남불이라 칭하게 될 사건이 생길 여지 자체가 나에겐 없다. 내 쪽에서도 결혼 전이나 결혼 직후에는 '결혼했는데 다른 사람이 좋아지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가끔 뜬구름 잡는 수준으로 해본 적이 있지만, 결혼을 해서 몇 년을 반려자와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아보니 알겠다. 뭐랄까,한 사람을 이토록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일, 그 사람의 전부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일, 은 연애시절의 사랑과는 좀 다르다. 친구, 연인, 가족, 동지, 전우?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감정으로 단단히 엮인 두 사람이 점점 한 덩어리가 되어가는 느낌이랄까. 이 사람이 기쁘면 나도 기쁘고, 이 사람이 아프면 나도 아픈, 어느 정도의 경계는 존재하지만 점점 제2의 나와 같은 존재로 변모해 가는 사람을 어떻게 아프게 할 수가,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호기심이 많고 사람을 관찰하는 버릇이 다소 있는 편이지만, 사사로운 호기심으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만큼 분별력이 없진 않다고 자신한다.
그토록 불륜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면, 나는 왜 드라마가 그토록 신경이 쓰였는가?
나는 드라마가 전하는 본질적인 메시지가 '불륜과 복수' 같은 자극적인 단어로 감싸져 있다고 느꼈다.단편적인 단서만으로 속에 감춰진 알맹이를 읽어낼 수 없어 답답했는데, 그 지점이 호기심을 자극해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알맹이를 들여다보기 위해 드라마라서 그렇다, 라는 두루뭉술한 이유를 제쳐두고 주인공들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다 보면 '왜'라는 물음의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이유를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인공의 행동이나 드라마의 결말에 대한 해석을 두고 이리저리 고민을 하며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찾아 읽었다. 주인공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식으로 갈래를 지고 뻗어나가는 상상 속에서 더 나은 결말을 그려보기도 했다. 또, 마음에 남은 묘한 불편함을 가만가만 더듬어 보기도 했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신뢰를 앗아감으로써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불륜남녀의 최후는 통렬하다 못해 너무하다 싶을 만큼 가혹해서 나쁜 짓을 했지만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장 가까웠던 두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예비신부는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너무나 집요하고 끈질기게 복수를 시도해서 미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러한 전개는 드라마의 매력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내 마음 속의 불편함을 키우기도 했다. 가해자가 피해자처럼 여겨져 가엽고, 피해자가 가해자처럼 여겨져 얄미운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혼란스러워 불편한 건지, 아니면 드라마에 감정이입을 너무 과하게 하는 바람에 비극에 전염되어 슬픈 감정을 불편함의 형태로 앓고 있는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질주하는 주인공들을 헤아리는 일이, 그런 그들을 보는 내 마음을 이해하는 작업이 몹시 심란했다
서우재와 정희주는 어째서 가장 사랑하는(했던?) 사람에게 상처 주는 선택을 했던 걸까? (사랑이라서?)
정희주는 그런 엄청난 선택이 감춰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사랑 앞에 판단력이 흐려졌을까?)
서우재는 왜 그렇게 정희주에게 집착했던 걸까? (너무 사랑해서?)
구해원은 왜 자기를 진창에 빠뜨리면서까지 정희주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는 걸까? 왜 서우재에게는 복수하려고 하지 않는 거지? (사랑했기 때문에? 아직도 사랑하기 때문에?)
정희주는 왜 남편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사랑해서 지켜주고 싶었으므로?)
서우재는 왜? 구해원은 왜? 정희주는 왜?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모든 물음의 답이 사랑으로 설명되고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이 참 모순적이었다. 본인과 상대의 인생을 진창으로 끌어내리는 이유도 사랑이었고,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기억이 처참해지는 이유도 사랑이었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이유도 사랑이었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이유도 사랑이었다. 드라마는 '사랑'이라는 이유를 갖다 대면 모든 게 납득되는 비극을 제시함으로써 사랑의 위험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드라마를 부여잡고 나름대로 끈덕지게 고민한 결과, 사랑과 욕망이 뒤얽힌 듯 보였던 이야기는 대물림되는 결핍과 부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식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로도 풀이될 수 있다는 나름의 답을 얻었다. 그 결핍들이 맞닿아 또 다른 결핍과 비극을 생성해 내는 이야기라는 해석이 도출되자 내내 거슬렸던 여운이 납득되고 의문들이 명쾌하게 해결되었다. 불륜이라는 행위 이면에 주인공들을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근본적인 원인, 주인공들의 성장과정과 닿아있는 불온한 정서 저변에 깔린 상처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어 비극으로 치닫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게 되자 묘하게 거슬리던 여운이 깊은 울림으로 변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결핍에 허덕이며, 부모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과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사명처럼 붙들고 살지만 결국 부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주인공들의 서사가 나에게 덧씌워져 가슴이 울렁거렸다.
창작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창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것을 보는 사람이 살아온 환경이나 세월이 반영된다. 그래서 창작물을 여과시키고 남은 감상은 그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닮아있다. 내가 주인공들의 서사를 이토록 깊게 사유하고 그들의 상처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건, 나 또한 비슷한 상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내가 잘 아는 상처이기 때문일 수도, 나의 불안정한 가정환경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일 수도, 나 또한 그 굴레에서 아직 놓여나지 못한 채임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복합적인 생각이 들었다.
희주는 가난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신을 두고 도망쳐버린 엄마를 원망하며 살았다. 그러다 부자인 남편을 만나 불행했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무언가를 꿈꿔봤자 어차피 가지지 못할 걸 알았으므로 그런 마음을 품어보지 못한 채 살아온 희주에게 갖고 싶은 무언가가 처음 생겼을 때, 그것을 가지는 대가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라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하는 희주의 모습이 그토록 싫어했던 엄마의 뻔뻔함을 닮아 있다. 희주는 자신의 엄마와는 달리 도망에서 돌아왔지만, 자신의 엄마처럼 자식에게 자기를 두고 집을 나가버린 엄마로 기억되는 운명을 맞는다.
우재는 아집으로 인해 출세의 길에서 벗어나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천재 조각가의 아들로 자랐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아집을 경멸하며 다른 이의 인정에 갈증을 느끼는 우재는 어쩌면 그래서 희주를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부자 남편을 둔 여유가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여자,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남자가 선택한 여자인 희주는, 세상이 보증한 괜찮은 여자로 보이기도 하므로 그래서 탐이 났을지도. 하지만 그 욕망은 또 다른 형태의 아집이자 집착이 되어 결국 아버지처럼 자신을 집어삼키는 결말로 이어지고 만다.
해원은 아빠를 알지 못한 채 열여덟 살의 엄마에게서 버려져 외할아버지에게 맡겨진다. 해원의 엄마는 속아도 속아도 사람을 믿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버려지고 버려져도 다시 사랑을 한다. 해원은 엄마처럼 살지 않으려고 한 사람에게 사랑받고 뿌리내리는 삶에 집착한다. 하지만 정착을 위한 갈망이 스스로를 불행의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는다는 점에서, 해원의 집착과 엄마의 집착은 본질적으로 같다. 결국 잘못된 상대를 선택하고야 마는 해원의 어리석음, 잘못된 상대라는 걸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해원의 미련함은 엄마를 꼭 닮았다.
'너를 닮은 사람'이란 제목에서 '너'는 그런 식으로 대를 이어 닮은 운명을 물려주고야 마는 부모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드라마는 너를 닮은 사람들(자식)이 너(부모)를 답습하며 살아가는 비극을 슬픈 마음으로 그려낸 작품이 아닐까.
강물에 발을 첨벙거리며 다슬기나 개구리를 잡고, 이웃 친구네 사과밭에서 기르던 토끼에게 풀을 먹이고, 옆집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따겠다고 장대를 휘두르던 평화로운 유년시절 추억의 틈새로, 동생의 유치원 운동회날 아침에 아빠가 밥상을 엎었다던가, 샛노란 개나리 덤불 앞에서 아빠가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던가, 어느 여름 밤에 칼을 챙겨 외출했던 아빠가 팔인가 다리에 피를 흘리며 돌아왔다던가 하는 일들이 떠오른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나는 긴장해서 얼어붙은 채 마음을 졸이고 숨을 참으며 그런 순간들을 지켜보고 있다. 그때부터 내게 달라붙은 불안은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되어,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도 내 몸의 일부로 존재했다. 마흔살이 된 나는 아직도 불안해지면 손톱을 뜯곤 한다. 그런 기억들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은 그 버릇이 전부는 아닐테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때 부모는 자신의 유전자로 빚어진 육체에영혼의 형태로 깃드나보다. 누군가는 부모와 닮은 삶을 사는 것이 선택의 문제라고 하겠지만, 내 생각에 그건 어느 정도 숙명인 듯 하다. 결국 자식은 부모와 비슷하지만 조금 새로울 뿐인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부모의 분신에 지나지 않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조금 슬프고 허무해진다.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개체로서 자립할 능력을 갖추는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꽤 오랜 기간동안 부모 역할을 하는 누군가에게 길러져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은 확실히 좀 번거로운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번거로운 구석이 대를 이어갈수록 인간을 더 나은 삶의 형태로 진보하게 만든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있어 자손번식이란, 개체수를 유지하기 위한 생물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삭막한 우주에 희망을 피워내어 기적을 만들어내기 위한 범우주적이자 인류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여담이지만 이렇게 쓰고보니, 아기를 낳는 것이 우주적으로 아주 중요한 일처럼 여겨져 가임기의 여성으로서 비장한 마음이 든다.;) 비약이 심할지도 모르지만 자신보다 자식이 더 행복하기를 바라는 일반적인 부모의 마음을 생각하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물론 그 바람이 당연히 전제되지 않을 수도 있고, 그 바람의 결과가 늘 성공적이기만 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암튼 대를 거듭하는 동안 해소되거나 혹은 곪아가며 쌓여온 부모의 결핍들은 기어코 후손의 무의식에 새겨지고 말겠지만, 언젠가는 희망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