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톨리츠가 말하는 미적 태도는 감상자가 지각하는 대상 자체가 예술 작품이든 아니든, 그것을 ‘무관심적’이면서 ‘공감적’으로 ‘관조’하는 태도이다.
그가 말하는 미적 태도에서의 ‘무관심적’이라는 것은 대상에 대해 관심이 없는 ‘비관심적’과는 다르다. 무관심적이라는 것은 대상을 사용하거나 조작하여, 무엇을 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대상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관심적이라는 것은 대상에 대해 어떤 이해관계를 떠나, 보이고 느껴지는 대로 관심을 가지고 본다는 것이다.(중략)
그리고 ‘공감적’이라는 것은, 감상자가 대상에 반응할 때 대상 자체의 조건에 의해 대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감상자는 자신을 대상과 분리시키는 신념이나 편견과 같은 반응은 억제해야 한다.(중략)
‘관조’란 단순한 응시가 아니라 감상자가 대상에 적극적으로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관조는 활동과 함께 일어나기도 하는데, … 대상에 적극적으로 주목하며 활동하는 것이 관조가 의미하는 바의 전부는 아니다. … 식별력을 갖추고 관조한다면 더욱 풍부한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이것만은 …]
*감각 기관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함. 또는 그런 작용. 그 작용의 결과로 지각체가 형성된다. ( )
*‘그것이 없음’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 )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 )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봄. ( )
*‘아님’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 )
*기계 따위를 일정한 방식에 따라 다루어 움직임. 작업 따위를 잘 처리하여 행함. ( )
*서로 이해가 걸려 있는 관계. ( )
*자극에 대응하여 어떤 현상이 일어남. 또는 그 현상. ( )
*어떤 일을 이루게 하거나 이루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상태나 요소. ( )
*일정한 조건에 맞는 것을 골라 가지다. 어떤 일에 대한 방책으로 어떤 행동을 하거나 일정한 태도를 가지다. ( )
*굳게 믿는 마음. ( )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 ( )
*눈길을 모아 한 곳을 똑바로 바라봄. ( )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핌. 또는 그 시선. ( )
*분별하여 알아봄. ( )
미적 태도는 감상자가 지각하는 대상 자체가 예술 작품이든 아니든, 그것을 ‘무관심적’이면서 ‘공감적’으로 ‘관조’하는 태도이다.
철수 쌤이 어렸을 때 재미있어 열심인 것이 있었다. ‘스무고개’이다. 스무 번까지 질문을 하면서 문제의 답을 알아맞히는 놀이이다. 그런데 나중에 논리학을 공부하면서 놀란 것이, 철수 쌤이 논리학의 ‘논’자도 몰랐던 어렸을 때부터 스무고개라는 놀이를 통해 논리학을 공부했다는 것이다. 아마 그 어렵다는 논리학을 그래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스무고개 덕이었으리라. 그래서 철수 쌤은 아들과 딸이 어렸을 때 그 놀이를 같이 많이 했다. 책이나 학원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 스무고개가 철수 쌤이 지금까지 입이 닳도록 말한 판정도와 관련 있다는 것을 아는가?
스무고개에서 첫 번째 질문은 인간의 상위 개념이고, 이후 각각의 질문은 인간이 갖고 있는 특성이다. 답을 맞히는 데 결정적인 마지막 질문은 인간의 본질(종차)이다.
어떤가? 스무고개에서 첫 번째 질문은 인간의 상위 개념이고, 이후 각각의 질문은 인간이 갖고 있는 특성이다. 답을 맞히는 데 결정적인 마지막 질문은 인간의 본질(종차)이다.
지문의 ‘스톨리츠가 말하는 미적 태도’를 정답으로 하는 스무고개를 만들어 판정도와 같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태도가 스톨리츠의 미적 태도가 되기 위해서는 무관심적, 공감적, 관조이라는 조건에 부합해야 하며, 예술 작품 여부는 조건이 되지 않는다.
위 스무고개와 판정도에서 ‘예술작품이야?’와 ‘예술 작품이 아니야?’는 다른 나머지 질문과 다르다. 또한 ‘무관심적’, ‘공감적’, ‘관조’가 동시에 만족해야 하는 조건이다.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기에 다음에 추후 살펴 보겠다.
‘무관심적’이라는 것은 … ‘비관심적’과는 다르다. 무관심적이라는 것은 … 무엇을 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대상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의의 의미에서 ‘그 개념과 등위(等位)의 개념에서 구별하는 일’에 대해 알고 있으면 국어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개념을 이해시킬 때 지문에서 많이 쓰는 방법을 눈치챌 것이다. 비교와 대조가 바로 그것이다. 등위의 개념들 사이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개념을 설명하는 글은 그런 내용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지문에서도 ‘무관심’과 ‘비관심’이 언급돼 있는데, 이 둘은 등위의 개념이다. 일상생활에서는 ‘그것이 없음’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무(無)-’나 ‘아님’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비(非)-’가 별 차이 없기에 둘을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이나, 학문(이론)에서는 좀더 세밀한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글쓴이가 특수한 개념을 담아 구별한다. 따라서 두 접두사의 사전적 의미를 생각지 말고 글쓴이의 개념을 생각하며 글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구별이 '별걸 다 따지네.' 하며 학문(이론)에 거부감을 들게 만들지만, 학자들은 그렇게 하니 국어 성적 향상을 위해서는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둘은 ‘태도’에 속하지만 ‘관심이 없다’는 것과 ‘무엇을 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대상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이때 ‘무엇을 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대상을 바라보지 않는다’를 ‘관심이 있다’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다음과 같이 둘 사이의 차이점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는 구별하지 않는 것이 학문 이론을 설명할 때는 구별할 때가 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좀더 설명이 필요하므로 추후 살펴 보겠으나, 여기에서는 이해하기 쉽도록 아래와 같이 벤다이어그램과 판정도를 그려 보았으니, 일단은 개념들의 관계만 파악하도록 하자.
등위 관계에 있는 개념들은 벤다이어그램이나 판정도를 통해 확인하는 습관을 갖자.
‘관심이 있으면서 취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지문에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여 물음표로 표시했다. 이는 설명이 좀더 필요한 내용이라 추후 다시 살펴 보겠다.
‘공감적’…은, … 대상 자체의 조건에 의해 대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취하는 … 자신을 대상과 분리시키는 … 반응은 억제
‘A는 취하고 B는 억제하다’라는 문장을 음미해 보자. 그 경우 A와 B는 반대의 의미를 갖게 된다.
지문에 ‘‘공감적이’이라는 것은 … 대상 자체의 조건에 의해 대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 자신을 대상과 분리시키는 … 반응은 억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문에서 ‘반응’을 ‘대상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같은 말로 쓰고 있음을 감안하면, ‘반응’에는 두 가지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대상 자체의 조건에 의한 반응’과 ‘자신을 대상과 분리시키는 … 반응’이 그것인데, 문장 구조상 그 둘은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철수 샘은 그 둘을 ‘자신을 대상과 일치시키는 반응’, ‘대상 외의 조건에 의한 반응’으로 바꿔 이해하기도 한다.
한편 ‘A와 같은 B’라는 문장 구조는 A가 B의 하위 개념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신념’, ‘편견’을 ‘자신을 대상과 분리시키는 … 반응’의 사례로 이해해야 한다. 지문에서는 ‘공감적’이라는 것을 ‘대상 자체의 조건에 의해 반응’하는 것이고 했다. 이를 철수 샘은 아래의 계층 구조로 이해한다.
‘A는 취하고 B는 억제하다’에서 A와 B는 반대의 의미임을, ‘A와 같은 B’는 A가 B의 하위 개념임을 나타낸다.
‘관조’란 … 응시가 아니라 … 적극적으로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 적극적으로 주목하…는 것이 관조…의 전부는 아니다. … 식별력을 갖추고 관조한다.
개념을 자세히 설명한다는 건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A는 B가 아니라 C이다’ ‘A는 B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문장 구조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며 지문을 읽어보자. 그러면 다시 등위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문에서 ‘관조’가 ‘적극적으로 주목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의미는 ‘단순한 응시’와 구별된다. ‘단순한 응시’가 ‘적극적인 주목’과 등위의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관조⋯의 전부’가 ‘적극적으로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적극적으로 주목하⋯는 것’에는 ‘관조’와 등위의 개념이 있다는 뜻이다. 뒤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그 차이는 ‘식별력’의 유무다. 식별력이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지문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아래에 있는 벤다이어그램으로 이해해보자.
‘A는 B가 아니라 C이다’ ‘A는 B의 전부가 아니다’는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문장이다.
이를 고려하면 ‘관조는 식별력을 갖추고 적극적으로 주목하며 보는 것이다’라는 정의를 할 수 있다. 즉 관조는 ‘보는 것’에 속하고, ‘식별력을 갖추고 적극적으로 주목함’이라는 종차를 갖고 있는 개념인 것이다.
<철수 쌤의 슬기로운 국어 공부 I>에서 구조와 구성 요소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구조와 구성 요소를 생각하는 사고법을 분석이라 한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
위 문장에는 ‘사람’이 두 번 나뉘었다. 하나는 ‘남자, 여자’로 나뉘고, 다른 하나는 ‘정신, 육체’로 나뉘었다. 그런데 이 둘의 나누는 방식은 다르다. 남자와 여자로 나눈 것은 사람의 ‘종류’를 나눈 것이고, 정신과 육체로 나눈 것은 사람의 ‘구성 요소’를 나눈 것이다. 앞의 것을 분류한다고 하고, 뒤의 것을 분석한다고 한다.(분류와 분석에 대해서는 추후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을 것이다.)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읽을 필요가 있음을 이해하자.
지문에서 스톨로츠의 미적 태도는 무관심, 공감, 관조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스톨로치의 미적 태도를 구조로, 무관심, 공감, 관조를 구성요소로 보고 분석한 것이다. 그 구성요소들에 대해 또 다시 자세히 설명하는 글들이 지문에 많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개념을 자세하게 설명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따라서 지문을 읽으며 스무고개를 즐기듯 개념을 분석적으로 이해하는 훈련을 많이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