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묘호랑 Feb 17. 2019

[희망] 버드 박스

절망이 빛처럼 쏟아져 내릴 때

절망은 안락하다. 하지만, 희망은 움직여야 한다. 희망은 고달프고 애처롭다. 오로지, 더 큰 세계를 이루었다는 만족감을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한다.

미치광이들은 가장 아래에 있다. 죄수에게는 출소일이 다가온다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광인에게는 정상임을 입증하기 전까지는 자유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없다. 광인이 정상인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과도 같다. 한 명의 사람은 알 수 없는 과거가 축적되어 만들어진다.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광인 역시 다른 사람이 되는 법을 모른다. 우리 정상인들에게,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입증하라는 지상 과제가 주어진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있을까?
그래서 광인들에게는 이 세상이 절망적이다. 광인들에게는 탈출구가 없다.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자기 자신의 길로, 유일하게 알고 있는 자신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은 광인들에게 희망을 제시하지 않기에, 그들은 절망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광인들도 자기 세계 확장을 위해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마치 어둠에 정복 당한 것처럼 태양이 절망의 빛을 뿜어 내자, 세상은 그들의 것이 된다. 그들은 온 세상을 향해 절망의 빛을 쏟아 붓는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기에,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정상인들에게 절망 가득한 아름다움을 직접 보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희망이 없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완전한 절망에 휩싸여 파멸의 길을 향해 쫓겨 간다. 인간은 이제 눈을 가린 채 희망을 찾아야 한다. 안대를 뚫고 들어오는 희미한 빛, 즉 절망의 희미한 윤곽까지는 견딜 수 있지만, 안대를 벗으면 명확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는 절망의 빛은 삶을 포기하게 만든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절망의 빛으로부터 피신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으로 숨어 들어 온 미치광이 개리는 출산의 날을 기다린다. 아이는 인류가 존재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다. 만약 백 년 후에 인류가 멸절할 것으로 예상된다면, 우리는 튼튼한 박물관을 지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 세상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가 모조리 사라지더라도, 미래 그 자체인 아이라는 존재는 인류가 존속해야 할 마지막 이유를 선물한다. 아이는 머릿속에 있는 어떤 개념이나 논리가 만들어 낸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고 만질 수 있는 미래는 무시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이가 있는 한 인류는 지속하고 번영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런 미래를 완전히 빼앗는 것은, 인간에게 절망의 폭탄을 투여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개리는 출산일을 기다린다.

어쩌면, 사람들을 홀려 자살하게 만드는 절망의 빛은, 개개인에게 죽는 날까지 일어나는 모든 절망의 순간들을 낱낱이 한꺼번에 보여줬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십 년 전의 내가, 현재의 내가 느끼는 좌절을 고스란히 느껴 볼 기회를 얻는다면 어떨까. 마치, 신경치료를 기다리는 치과 환자와도 같은 기분에 휩싸일 것이다. 아니, 그보다 훨씬 견디기 어려운 기분일 것이다. 십 년 후에도 이런 끔찍한 고통을 다시 한 번 ‘반드시’ 겪으리라는 사실을, 십 년 동안 알고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평생의 절망을 한꺼번에 본다면, 알게 된다면, 그 순간 시간의 지속은 지옥이 된다. 그래서 절망의 빛을 바라본 인간은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끊어 버린다.

인간이라면 관측된 절망을 이겨 낼 수가 없다. 그런데, 인간은 관측까지도 아닌, 예측된 희망조차도 이겨 내지 못한다. 약간의 희망만 있어도 온갖 고난을 극복하며 미래를 개척한다. 그래서 맬러리는 눈을 가린 채 절망의 빛을 뚫고 돌진한다. 그녀의 의지는 보고 만질 수 있는, 아이들이라는 미래에서 힘을 얻는다.

(인간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보이면, 온 우주를 집어 삼킬 듯이 욕망한다. 그 욕망의 크기 만큼이나 절망도 거대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것이 삶의 원동력이기에 욕망을 멈출 수가 없다.)

절망은 많은 것을 가진 자에게도 찾아 온다. 오히려 충분한 희망이 주어지지 않은 자들은, 더 많이 가지려 하지 않았기에, 부유한 자들을 거꾸러뜨리는 절망의 빛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맬러리가 당도한 안식처는 욕망의 지옥에서 벗어나 있는 곳이었다. 빛이 절망에 오염되기 전, 평화로운 시대였을 당시, 시각 장애인들은 맬러리가 연합하려는 대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화가였다. 더더욱 그들과는 가깝게 지낼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열의 지도상에서 맬러리보다 아래에 있다. 보다 우월한 것을 택함으로써 자기 세계를 확장해야 할 그녀에게는 그들과 연합해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제, 맬러리보다 열등했던 시각 장애인들은, 빛에 취약해진 그녀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 그녀는 뒤바뀐 지도에 당황한다. 그래서 겸연쩍은 미소를 짓는다. 우열의 지도는 다시 그려진다. 이제 그녀는 그들과 연합해야 한다. 그들과 힘을 합쳐 절망의 빛을 몰아 내야 한다.


그런데, 절망의 빛이 사라지고 예전의 평화가 다시 찾아 오면, 잔인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우열의 지도에도 다시 변화가 일어난다. 맬러리는 다시 우월한 자가 될 것이고, 보다 확장된 세계를 차지할 목적으로, 동등한 자들과 연합하기 위해 그들을 떠날 것이다. 이로써 연합은 파기된다.
어쩌면, 평화가 다시 찾아 온다는 사실은 맬러리의 입장에서만 그렇다. 시각 장애인들에게는 세상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갑자기, 자신들과 연합하려 했던 적이 없는 자들이 절망의 빛에 쫓겨 도움을 요청하러 몰려 들었다가 이내 떠나갔다는 사실 외에는, 변한 것이 없다.  

이전 19화 [희망] 시리어스 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