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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호랑 Jan 10. 2019

[희망] 시리어스 맨

희망과 절망: 희망이 사라지면 어떻게 할래?

이 영화는 정말 웃기는 장면이 많다. 등장하기만 해도 웃음을 주는 인물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주인공 래리의 동생 아서가 자기 처지를 비관하며 울부짖는 장면만큼은, 정말로 슬프다.


아서는 수학적인 재능이 뛰어나지만, 일반적인 사회 활동이 어렵기 때문에 형인 래리의 집에 얹혀 산다. 그렇지만, 아서에게는 좋은 형이 있고, 건강도 허락되어 있다. 최소한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필요는 없다. 만일 아서같은 사람에게 래리같은 형이 없다면, 몸이 불편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 한다면, 특출난 재능도 없다면, 그는 아서보다 더 크게 울부짖어야 할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울부짖어야 할까. 인간은 의미가 있어야 살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금수보다 나은 존재라는 말도 있다. 우열의 지도를 밑바닥까지 살펴본다면, 거기에는 금수가 있다. 인간은 아주 오래 전 언젠가 금수와 경쟁한 적이 있다. 그래서 금수도 우열의 지도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인간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 뒤부터는 지도상에서 눈에 잘 띄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명백히 그들은 지도 위에 있고, 우열의 지도 위에 있는 이상, 비교의 대상이 된다. 비교의 대상이 있고, 그보다 우월한 마음이 들면, 의미가 생겨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금수보다 우월하다고 느낀다. (머릿속에서 언어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인간이 금수와 아무런 차이도 없다면, 그들과의 사이에 어떤 느낌이나 인식과 같은 것들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즉,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평등하고 공평한 관계 안에서 서로 간에 차이점을 발견한 다음, 여기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일단 우열을 가리고, 여기에서 의미를 찾는다. 인간은 효도르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를 먼저 궁금해한다. 식성이나 서식지의 차이를 궁금해 할 이유는 별로 없다. 효도르와 호랑이의 생물학적 분류는 학문의 영역이다. 인간은, 일단 우열을 가리려 한다.  


밑바닥의 금수 바로 위에는, 인간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또 그 위에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서도 의미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는 낮은 곳에 있는 저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3등 정도 하는 학생은 13등보다는 열심히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13등은 23등보다는 열심히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의미가 있다.


만약, 인간들 사이에 어떤 우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미라는 것을 얼마나 찾을 수 있을까. 사실, 의미는 상당 부분 우열을 가리는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우열이 드러나야만 열망이 생긴다. 더 잘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힘없는 인간은 지배하려 한다. 인간에게는 이것이 의미로 다가온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하더라도, 완전히 평등한 무리 안에서는 열망이 생기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성공한 사람은, 자기보다 덜 노력한 사람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나’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것일까. 만약, 내가 중학생 때부터 다른 학생들과 달리 놀고 싶은 것도 참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이었다면, 그러한 중학생이 되기 위해 언제부터 노력했을까. 만약 그러한 중학생이 되기 위해서 초등학생 때부터 다른 학생들과 달리 놀고 싶은 것도 참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이었다면, 그러한 초등학생이 되기 위해 언제부터 노력했을까.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엄마가 태교를 잘한 덕분일 것이다. 태교는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자면, 현재의 나는, 순전히 내가 의도한 결과로만 볼 수가 없다.


현재의 나는, 내가 기억할 수 없는 과거와 타인이 만든 것이다. 겸손의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렇게 냉정한 겸손인이 되고 나면,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진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한 다음에도 자랑할 수가 없다. 성공의 무용담을 책으로 펴낼 수 없고, 성대한 출판 기념회도 열 수 없다. 결정적으로, 모든 것(특히 노력을 통한 성취)이 우연의 결과라고 해석되므로, 삶의 의미를 더해주었던 우열의 지도가 희미해진다.


우열의 지도가 불분명해지면, 방향을 정하기 어려워진다. 무엇이 우월한지 분명히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확실한 목표 없이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녀야 한다. 되는대로 아무나 붙잡고 우열을 가려야 한다.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처럼 방황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 세계 확장의 방향이 분명할 때 방황하지 않는다. 우열의 지도를 통해 보다 우월한 것을 선택함으로써 자기 세계를 확장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이렇게 느낄 수 있으면, 언어로써 내 삶의 의미는 무엇무엇이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다.)

자기 세계가 순조롭게 확장 중에 있고, 보다 우월한(장밋빛) 미래가 보이면, 우리는 애써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성공 가도를 달리는 사업가보다는 실패한 사업가가 삶의 의미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한다. 성공 가도를 달리는 사업가는 이혼을 당하고 나서야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래리는 대학 교수이며,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건강한 사람이다. 아서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계속되리라 믿었던 결혼 생활이 무너지고 희망이 사라지면서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영화는 아버지인 래리와 아들인 대니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래리가 믿었던 미래가 무너짐에 따라 희망이 하나둘씩 사라지게 되면, 최후에 남는 미래는 대니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니의 학교로 토네이도가 들이닥치는 상황은, 과연 이마저도 가능할지를 짓궂게 묻고 있다.


래리가 속한 유태인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랍비인 마르샥은, 믿었던 미래를 되살리려는 래리의 상담 요청을 거절한다. 그는 젊은이, 즉 보다 큰 미래를 지닌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느라 너무 바쁘다. 그는 (아마도) 고심 끝에 대니가 가장 필요로 하는, 라디오와 라디오 케이스에 넣어 둔 이십 달러를 돌려준다.


백 살은 족히 되어 보이는 랍비 마르샥이 대니에게 해준 말은, 착한 아이가 되라는 당부 정도다. 그에게 이런 말을 하면 대니의 아버지인 래리에게도 도움이 된다. 대니가 (유대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포함해서) 착한 아이가 되면, 절망에 빠진 래리도 한 가지 희망 만큼은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니가 유대 경전을 유창하게 읽어 내려감으로써 성인식을 무사히 마치는 모습을 본 래리의 부인은,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 서류를 요구했던 지난날을 사과한다. 자식을 통해 부부가 화해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면, 래리는 희망적인 미래를 다시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착한 아이가 되라는 말 이전에, 이 영화의 주제가라고 할 수 있는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노래 가사를 읊어 준다. 믿었던 진실이 거짓임이 드러나고, 희망이 사라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랍비 마르샥은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가사를 살짝 수정한다. 원래 가사는 이렇다.


믿어 온 것들이 거짓임이 밝혀지고 모든 기쁨이 사라질 때


아래와 같이 바꾼다.


믿어 온 것들이 거짓임이 밝혀지고 모든 희망이 사라지면, 어떻게 할래?


마르샥은 ‘기쁨’을 ‘희망’으로 바꾸고, 원래 가사에는 없는 ‘어떻게 할래?’라는 말을 덧붙인다. 맞춤형으로 대니가 좋아하는 노래를 인용하면서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던진 것이다. 아직 어린 나이의 대니는 이런 심각한 상황에 처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막 성인식을 치뤘다. 앞으로는 이 노래 가사와 같은 상황에 수없이 내던져질 것이다.

랍비 마르샥은 그에게 필요한 말이지만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준 셈이다. 희망이 사라지면 어떻게 할지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래서 랍비 마르샥은 희망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 가사를 인용하며 희망이 사라지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질문을 던진다. 희망을 찾는 방법은 각자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이미 오래 전에 어른이 된 대니의 아버지 래리에게는 할 말이 없다.


절망이라는 강풍에, 인간이라는 깃발은, 희망이라는 깃대에 매달린 채 나부낀다. 깃대에 매달린 깃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강해지면, 깃발은 찢겨져 나간다. 깃대는 뿌리째 뽑힌다.


래리에게 닥쳐오는 절망의 순간들은, 검진 결과에 대해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는 의사의 전화로 절정에 다다른다. 의사와 통화한 후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대니가 다니는 학교 근처까지 다가온 토네이도의 강풍에 성조기가 찢어질 듯이 나부끼는 모습이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나머지 뇌물을 받고, 안심했던 종신재직권 심사 통과 여부가 불분명해 보이는 등의 문제는 고달프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포기하거나 감수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앞으로 암 투병이라도 해야 한다면? 래리는 희망 자체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토네이도는 아들인 대니의 학교에 들이닥치고 있다. 만약 사고로 대니를 잃게 된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물음은 랍비 마르샥이 대니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여기에서 끝난다. 여기서부터는 랍비 마르샥도 대책이 없다. 우리들 각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하리라고 믿었던 미래가 거짓말처럼 무너지면, 죽기 전까지, 영원히 우리를 가혹하게 짓이길 시간의 고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사실, 우리는 대처할 줄 안다. 능수능란하지는 않지만, 본능적으로 대처하는 법 정도는 안다. 지금까지 살아 온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대처해 왔다. 믿었던 미래가 무너지면, 또 다른 미래를 꿈꾸면 된다.

암 선고가 내려지고, 아내는 떠나가고, 딸은 여전히 그를 우습게 보고, 대니는 갑자기 들이닥친 토네이도에 희생된다면, 래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 언젠가 암을 이겨내리라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아내가 돌아오기를 바라거나, 다른 여자와 재혼해야 한다. 딸과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기를 기대해야 한다. 대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식을 잃은 슬픔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미래가 사라진 현재와도 같다. 받아들일 수 없는 미래를 끊임없이 강제로 현재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젊은 여자와 재혼한 다음 자식을 다시 낳든가, 손주 보기를 기대해야 한다.


래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된 것은 믿었던(당연하리라고 기대했던) 미래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기대했던 미래가 무너지면, 우리는 만신창이가 된 깃발을 실로 꿰매고, 부러진 깃대를 보수해야 한다. 공들여 바느질한 깃발을, 다시 일으켜 세운 깃대에 게양해야 한다. 그러면, 더 튼튼해진 깃발은 절망의 바람을 이겨내며 꿋꿋이 펄럭일 것이다. (깃발은 각자의 스타일로 장식되어 있고, 각자의 세계관이 빼곡히 적혀 있다. 그래서 깃발은 다채롭다.)

문제는, 정립된 스타일이 없다면, 완성된 세계관이 없다면, 한번 찢겨 너덜너덜해진 깃발을 기우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우리가 당연하리라고 기대했던 충분한 연봉, 행복한 결혼 생활, 사회적 위신, 건강한 생활 등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는 세계관이 없으면, 인간은 절망에 매몰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


넝마처럼 찢겨져 바닥에 내팽겨쳐진 깃발 쪼가리를 집어 들고 앉아 있노라면, 부러진 깃대를 다시 세우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게 된다. 그럴 때, 인간이 원래 가혹한 운명을 타고났음을 알고 있다면, 이것이 누구나 겪는 일임을 알고 있다면, 작은 희망이 절망의 시간을 견디게 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천천히 기어서라도 쓰러진 깃대를 향해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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