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지 않는 벙어리.
'난 절망을 낳지 않았어.' >
사랑한다면 임신을 할 수밖에 없다. 사랑한다면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 있다면 먹을 것을 찾아 움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출산의 순간을 기대하기에, 부른 배를 부여잡고 시간을 견딘다. 출산이라는 예정된 결과가 없다면 부른 배를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생기 넘치는 아기를 원한다. 그래서 굴욕을 견딘다. 사장님이나 고객님 앞에서 절로 숙여지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시간을 견딘다. 하지만, 이렇게 고단한 시간을 인내하고 출산의 고통을 이겨 낸다 해도 건강하고 예쁜 아기를 낳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는 대개 반쯤 죽어 있거나 완전히 죽은 아기를 출산한다. 그리고는, 물에 빠진 남의 집 아이를 구하고는, 난 절망을 낳지 않았다고 울먹인다.
우리는 남의 집 아이에게서도 희망을 본다. (어른은 다른 사람이 되는 법을 모른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아이는, 나와 함께 연합하고 같이 싸워나갈 친구로 자라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준다.) 죽은 아기를 낳은 클레오는 그 슬픔을 알기에, 더더욱 반드시 물에 빠진 주인집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 헤엄도 칠 줄 모르고 아이들보다 그리 키가 큰 것도 아닌 클레오는, 물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리며 무척이나 겁이 났을 것이다.
아이들을 구해 해변으로 데리고 나온 그녀는, 아기를 낳고 싶지 않았다고 울면서 고백한다. 자신이 원치 않았기에 아기가 죽은 채로 태어난 것이라며 괴로워한다. 출산 후에는 어떤 일에도 웃지 않고 벙어리처럼 말이 없던 그녀는, 아이들이 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기 자신도 물에 빠질지 모른다는 극도의 긴장감에서 벗어나게 되자, 그동안 가슴 속에 쌓인 마음의 고통을 토해 낸다.
난 어떤 일에 울었을까. 눈물은 분명 흘렸겠지만, 소리내어 운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영화를 보다가 감정이 북받치는 경우는 종종 있다. 나처럼 절망을 출산하는 주인공들을 볼 때면, 소리내어 울지 못하고, 그저 횡격막만 꿀렁꿀렁 경련을 일으킨다. 눈물은 진물처럼 배어 나온다. 말없이 웃지 않고 버틴 시간들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난 절망을 낳고 싶지 않았어. 그래, 난 절망을 낳지 않았어...
희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 세상은, 희망으로 시간을 버텨 온 나에게 결국은 절망을 선사한다.
어떻게든 기대하던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은, 클레오처럼 절망을 낳고는 웃지 않는 벙어리가 될까 봐, 필사적으로 자기가 성취한 것을 보존한다. 성공한 자들과 연합하고는, 성취한 것은 절대 내놓지 않는 프로가 된다. 손에 꼭 쥔 프로의 타이틀은 무덤 속으로 가져 갈 부장품이 된다.
하지만 성취한 것은 지나간 일이 되고, 지나간 일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이미 성취한 프로의 타이틀은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러면 이제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해야 한다. 완전히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미래는, 일상의 작은 웃음마저도 거두어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히, 기대한 것들이 모두 이루어질 리는 없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그들도 클레오처럼 웃지 않는 벙어리가 된다. 실패를 견딘 시간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면,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되는지 모르겠다며 고통을 토로한다. 한때 성공한 자들도, 끊임없는 희망이 필수적인 이 세상에서는 결국 절망을 겪을 수밖에 없다.
<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오르고 또 오른 사다리의 끝, 공중누각에는
내려가는 계단만이 놓여 있었다. >
여행을 마친 클레오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집안 일을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건물 밖에 설치된 계단을 올라간다. 밑에서 올려다 본 계단은 위태로운 구조물처럼 보인다. 이제 나는 클레오가 언제 어디에서 무얼 하든지 불안하고 걱정이 된다. 순진한 가정부인 그녀는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아무리 계단을 튼튼하고 호화롭게 만든다 해도, 무언가를 기대하며 계단의 끝까지 올라가 보면 거기에는 결국 내려가거나 올라가는 계단만이 놓여 있을 것이다. 문제는, 힘없는 클레오에게는 항상 앙상한 계단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계단은 가파르고 부서지기 쉽다. 도처에 그녀를 밟고 올라 서려는 페르민 같은 자들도 있다.
좀더 안전한 계단을 부여 받은 자들 중에는 그녀를 동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이 그녀 대신 계단을 오를 수는 없다. 그녀의 계단을 조금이나마 보완할 수 있도록 보수 공사를 지원할 뿐이다. 사람들에게 좀더 공평한 계단이 주어지도록, 시스템 수정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러려면 일단, 안전한 계단을 오르는 자들에게, 우리 주변에는 열악한 계단을 오르는 연약한 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여기에 일조한다. 그는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또는 변화하기 전까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남아 있을 클레오들을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