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절망: 동시에 그리는 현재와 미래
루이스는 자신의 딸이 어린 나이에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 미래가 얼마나 절망적인지 알게 된다.
외계인이 도착하기도 전인 영화 초반, 루이스는 이미 체념한 사람처럼 보인다. 절망보다는 희망을 좀더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라면, 루이스는 절망이 더 많은 것도, 희망이 더 많은 것도 아닌 삶을 살아온 사람처럼 보인다.
절망은 생명의 본질이 아니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삶은 위험하다. 뜻하지 않은 절망에도 견딜 수 있으려면 넉넉한 희망이 필요하다. 절망이 희망과 같은 높이로 차오르면 인간은 절박해진다. 영화상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루이스는 그런 삶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언어화할 수 없는 마음속 상태이기 때문에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예감하고 있지 않았을까. 딸의 죽음이라는 절망적 미래를 맞이하리라는 것을. 그래서 루이스는 우주복을 벗어 던질 수 있었을 것이다.
외계인이 도착한 뒤, 언어학자인 루이스는 외계인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물리학자 이언과 함께 차출된다. 루이스는 지구와는 다른 중력이 형성되어 있는 외계인의 비행선에 처음 방문하던 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나서야 선상으로 뛰어내릴 수 있었고, 외계인을 처음 본 순간에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정도로 겁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어떤 군인보다도 먼저, 본격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우주복을 벗어 던진다. 인간은 미래가 없으면 절박해진다. 용기를 발휘한다.
외계인과의 조우가 계속되면서 루이스는 딸에 대한 영상을 파편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녀가 행복했던 잠깐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나서,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는다는 사실도 보게 된다. 어쩌면 루이스는 외계인의 언어를 깨우치기 전부터 미래를 알고(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미래가 절박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내용은 언어화될 수 없었고, 따라서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영상을 보고 나서는 분명해진다. 외계인의 언어를 습득하기 전에는, 어렴풋이 알던 절망적인 미래가 환상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인지,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계인의 언어를 깨우친 다음에는 무엇이 미래인지, 미래의 속성이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딸의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계속되는 연구 끝에, 루이스는 외계인과의 의사소통에 어느 정도 성공한다. 하지만, 외계인과의 본격적인 대화가 곧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던 무렵, 외계인의 언어를 오해한 중국의 샹 장군과 그 연합국들이 외계인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려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루이스는, 외계인과의 대화에 성공함으로써 전쟁의 위기를 극복한 것을 축하하는 미래의 연회장에서 샹 장군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를 보고 듣게 되고, 현재의 샹 장군에게 이 대화를 들려주며 공격을 멈추도록 설득한다. 미래의 샹 장군은 친절하게도 루이스에게 그녀가 어떤 말로 자신을 설득했는지 이야기 해준다. 그것은 샹 장군의 부인이 남긴 유언이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유언에 해당하는 중국어 대사의 자막을 일부러 넣지 않았다. 유언은 인류가 남긴 말이며, 그 내용은 너무나 방대해서 영화상에서 짧게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통해서 미래의 속성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루이스처럼 미래를 볼 수는 없지만, 지나간 시간을 통해 축척된 언어를 통해서 미래가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있다. 미래는 절망적이다. 현재만이 희망적이며, 이는 인류가 지속해 온 그동안의 과거에 무수히 반복된 사실이다. 미래가 희망적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만 그렇다. 우리는 자손을 낳고, 죽음이라는 미래에 대항한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자손들이 영원히 번성할 것이고, 그 자손들은 우리가 남긴 작품을 길이길이 기릴 것이다. 천 년 후에는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다고 해도, 우리 마음속에서는 그렇게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희망적이라고 말한다.
영화 ‘채플린’에서는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게 된 말년의 채플린이 관중들의 기립박수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채플린은 박수를 치는 관중들의 인정을 받았고, 그만큼의 사람들을 자기화한 것이다. 이는 자기 세계가 얼마나 크게 확장했는지를 확인한 기쁨의 눈물이다.
각각의 인간은, 자신의 하찮은 능력으로 모든 인간을 자기화해야 한다는 궁극적인 목표를 지니고 태어난다. 이 목표는 마치 버리기 어려운 자존심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강하게 우리를 옥죄고 있다. 우리는 강압복이 입혀진 죄수나 정신병자처럼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능력이 목표에 비해 너무나 하찮음을 깨닫고는 마음 속에 별도의 세계를 따로 만든다. 그리고는 그 세계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현실 세계와 마음속 세계에 동시에 존재한다. 기억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마음속 세계에서 재현하거나 조작한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확장의 방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날카로운 우열의 순위를 가슴에 새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처가 지나치면 절망의 늪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 마음 속에 건설한 별도의 세계를 필요로 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에서 한 신문 기자는, 공산주의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이 일어나고 있음을 분명히 알 만한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자 할 말을 잃고 만다. 그는 신문 기자였던 만큼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자신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교육 받은 사람이며, 상대적으로 대우가 좋은 신문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우열의 지도에 자기 위치를 그렇게 표시해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육의 현장에 대해서 소신을 밝히지 않는다면,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때까지 그가 시간의 고문을 견디며 확장한 자기 세계(직업과 지위라는 기득권)도 유지하면서, 지식인이라는 우월함도 유지하려면, 현실과는 다른 마음속 세계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마음속 세계라는 것은 기억을 조작해서라도 희망을 유지하려 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라는 시간을 조작할 수는 없으므로, 지나간 시간인 과거를 조작한다. 시간의 노예는 끊임없이 확장해야 하며, 확장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절망을 피하기 위해서 기억을 조작한다. 그래서 그 기억을 바탕으로 현실보다 크게 확장된 자기 세계를 마음 속에서 누린다.
‘컨택트’는 절망적인 결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미래를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에 관한 영화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살아서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자기 세계 확장을 기원하며 자손을 낳지만, 그들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기쁨보다는 고통의 시간을 더 많이 보낼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인류 전체도 영속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보지는 못하지만 ‘알고’ 있다. 희망이라는 물살은 우리가 아무리 큰 배를 만들고 거슬러 올라가려 해도 언제나 그 배를 굴복시킬 만큼 거세게 쏟아져 내려온다. 우리가 시간의 강을 벗어나지 않는 한 이러한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루이스가 미래를 파편적으로나마 ‘볼’ 수 있게 된다는 설정이지만,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아는’ 절망적인 미래는 그와 관련된 몇몇 어휘들과 책이나 영화에서 본 이야기, 절망적인 상황을 겪고 있는 주변 사람에 대한 이미지 정도일 뿐이다. 스스로가 겪을 미래의 절망을 보고 느낄 수는 없다. 예측된 절망은 현실적이지 않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다시 희망을 품는다.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그렇게 떠내려가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거대한 폭포를 만나 곤두박질친 다음, 다시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물리학자 이언은 딸이 어린 나이에 죽게 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미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의 본성은 절망이 아닌 희망이다. 하지만, 인간 개인의 운명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다. 인간은 예측된 절망에는 희망으로 맞설 수 있지만, 관측된 절망에 대항할 수는 없다. 인간은 개인적으로는 완전한 절망인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지만, 자손을 바라보며 죽음에 대항한다. 마음속 세계에서만큼은 죽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언의 괴로움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언과 루이스는 마음속 세계에서조차 희망을 잃은 것이다. 자식은 마음속 세계에서 희망을, 미래를 보장하는 존재다. 현실 속에서 인간은 영생하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절망적 미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마음속에서는 희망을 유지할 수 있다. 인간은 마음속 세계에서만큼은 희망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이언과 루이스는 마음속에서조차 희망을 잃었고, 이것은 완전한 절망이다. 그래서 이언은 떠난다. 완전한 절망은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자신과 연합했던 자들까지도 궤멸시킬 수 있다. 그래서 이언은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외계인의 언어를 알고 있었다. 미래의 속성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지만, 이를 간직한 채로 딸을 출산하며, 딸의 죽음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루이스는 외계인의 언어처럼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그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