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쓴 단편소설《덤불 속(藪の中, やぶのなか)》 은 1922년 월간문학잡지 <신조(新潮)> 1월호에 처음 발표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년~1185년)를 배경으로 삼은 고전설화집 《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 こんじゃくものがたりしゅう)》 제29권에 수록한 <본조부악행(本朝付惡行)>가운데 ‘구처행단피국남 어대강산피박어제이십삼(具妻行丹波國男 於大江山被縛語第二十三)’편을 모티브로 썼다. 원작은 수도(교토)에 사는 젊은 남자가 아내와 함께 단바노쿠니(丹被國)로 가다가 오에야마(大江山) 근처에서 젊은 산적무리에게 아내가 욕을 당하고, 남자가 갖고 있던 활과 말을 산적 떼에게 빼앗긴다는 짧은 내용이다. 아쿠타가와는 이 설화에 살인사건을 추가하고 당사자와 목격자 증언을 재구성해서 16쪽짜리 짧은 분량에 진실 공방을 담았다. 검비위청(수사기관)인 청수사(清水寺, きよみずでら)에 모여 시체를 처음 발견한 나무꾼,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백한 산적 다조마루, 죽은 사무라이 아내 마사코, 사무라이 장모인 노파, 지나가던 승려, 검비위청 소속 하수인, 무녀가 불러온 사무라이 혼백의 이야기가 뒤섞여 합동진술을 펼친다. 진행자 마플은 다조마루와 나무꾼, 사무라이 아내, 검비위청 소속 하수인 호멘과 가상 대담을 나눈다.
다조마루 어허, 살다 보니 이런 교양 있는 자리에 참석하는 날이 오다니 저처럼 날강도로 살아온 밑바닥 인생도 오래 살고 볼일입니다. 초대 연락을 받고 아주 골머리가 아팠어요. 당최 내가 뭘 말할 수 있을지 여러 날 잠을 못 잤단 말입니다
마플 별말씀을요.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소설이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간 모습을 작가가 꾀를 부려 글자로 묘사한 거니까요. 거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새롭게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게 독서의 재미이고요. 먼저 인사부터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대담 진행자인 미스 마플입니다
나무꾼 네, 안녕하세요
호멘 안녕하십니까
다조마루 안녕하세요!
마사코 안녕하세요. 저도 썩 편한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마플 마사코님이나 다조마루님은 그동안 속에 담았던 말씀을 하실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오늘 대담 구성원은 진행자인 저를 제외해도 모두 네 명이군요. 시끌벅적하겠습니다. 사건 당사자인 사무라이님을 모시지 못해 아쉽습니다만 그대로 진행할게요. 이미 책소개와 더불어 내용을 짧게 요약했으므로 생략하려고 하는데 괜찮습니까? 의견 있으면 말씀하세요
다조마루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여기 모인 분들은 누가 범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저요?
마플 하하, 그건 다조마루님이 자백하셨잖아요. 범인이 쉽게 밝혀지면 작품이 재미가 있겠습니까?
나무꾼 미스터리야말로 감질나게 궁금한 겁니다
다조마루 아이참, 제가 사무라이를 죽였다고 자백했고, 살해동기도 충분한데 범인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러면 제가 검비위청에서 헛짓거리를 했다는 말에요?
마플 잠시만요, 다조마루님. 급한 성정이 여전하신데요. 이 자리는 범인을 색출한다기보다 각자 주장한 내용의 진실을 추론해 보는 자리입니다. 작가가 쓴 의도를 톺아보는 진행인데요, 범인이 굳이 궁금하다면 각자 의견을 표명하시면 되거든요. 진정하세요!
다조마루 네, 그렇긴 합니다만 저는 마사코님을 마음에 두었고, 마사코님이 그런 저를 부추겨서 사무라이님이 죽는 일이 생겼으니까요. 어쨌든 저는 나쁘게 살아온 인간말종입니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위인입죠. 더 이상 시끄럽게 굴지 않고 얌전히 있겠습니다
호멘 과연, 조용할 수 있나요?
다조마루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마플 자, 이렇게 합시다. 다조마루님은 하실 말씀 있을 실 때 손을 들어주시면 제가 호명할게요. 어떻습니까?
다조마루 다들 저를 반기지 않는 눈치 같으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플 이 작품의 주요 관점부터 다루겠습니다. 덤불 속은 살인사건이 발생한 현장입니다. 다조마루님 자백에 따르면 인근 고분에서 출토된 거울과 칼 등 보물을 산그늘 아래 덤불 속에 묻어 두었는데 싸게 팔겠다고 사무라이님을 유인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무당을 불러 사무라이님 혼백을 불러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혼령은 이 내용을 말하지 않지요. 덤불 속은 어떤 곳인가요?
호멘그곳은 거짓말, 질투, 겁탈, 욕심, 살인이 일어난 곳으로 비도덕적이고 반윤리적인 공간입니다. 이승에 지옥이 있다면 그곳이죠. 저는 다조마루님 자백이 가장 진실이라고 믿어요. 다들 자기가 범인이라고 하지만 아니 범인이 자백한 것만큼 신빙성이 큰 증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검비위청에서 일을 하는 동안 별의별 사건을 목격했지만 다들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고 우기지 자기가 범인이라고는 나서지 않더군요. 다조마루님은 말이 좋아 산적이지 살인강도짓을 하며 살아온 악인입니다. 덤불 속 사건 직전에도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쳤잖아요. 딱 봐도 배운 게 없고, 인상이며 태도, 말투가 악행만 일삼은 건달끼가 충만한 데다가 자백까지 했으니 범인이 틀림없어요. 살해 동기도 뚜렷하잖습니까. 더 캐보고 말고 할 게 없다구요
나무꾼 허허, 호멘님은 심리투사 능력까지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이거 원 무서워지네요
호멘 나무꾼님은 용의자도 아니신데 뭘 무서워하십니까. 그냥 제가 이제까지 잡은 범인들은 대개 비슷하다 그 말씀을 드리는 건데요
나무꾼 저는 호멘님처럼 선입견과 경험치만 갖고 인상으로만 단정 짓는 분은 무서워요. 억울한 피해자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아는 바로는 수사란 기본적으로 증거가 우선이고, 그다음이 정황을 따져야 한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딱 보니까 그런 것 같다, 내 직감이나 판단은 틀린 적이 없다, 통계학상 그렇다, 관상이 과학이다, 이런 식이면 예외적인 범인은 어떻게 잡을 수 있겠으며 모든 사건이 단순하진 않잖아요. 자기도 범죄자에서 방면된 처지이면서 공권력을 행사한다는 과잉 자부심을 엿볼 수 있군요.
호멘 제 말씀은요, 다조마루님이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고 자백한 일은 본인에게 득 되는 일이 없어요. 안 그래도 직전의 살인 행각으로 사형에 처해질 상황인데다가 추가범죄로 가중처벌해서 사형이 확정될 게 뻔한데 왜 자백을 했겠습니까? 자포자기한 거죠. 누가 뭐라고 해도 다 나를 범인으로 지목할 테니까 용빼는 수가 없다, 차라리 자백해서 사람을 많이 죽인 놈으로 기록에 남고 싶은 이상한 영웅심리가 아니면 이해가 안 됩니다
다조마루 호멘, 당신은 내 마음을 알아요? 나를 아냐고!
호멘 본인이 그렇다, 아니다 하면 될 걸, 자꾸 말꼬리를 물고 그래요
다조마루 나를 체포했다고 의기양양하신데 당신 말이야, 완전, 아이고 말을 말자
나무꾼 잠깐만요. 호멘님도 과거 전력이 있으니까 용의자나 범인 마음을 잘 안다는 말씀인가요? 사람 마음이 다 같을 수는 없는 건데요. 마음을 읽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어디 있다고요.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마플 그렇습니다. 호멘님도 과거에 범죄로 검비위청에 체포되었다가 석방 후에 검비위청 조력자로 활동하고 있지요. 말을 타고 도망가는 다조마루님을 체포했으니 이번에 포상을 받을 수 있겠군요. 그러나 그렇다고 범인을 겉모습으로 알아본다는 식은 본인의 이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선입견과 고정관념, 나아가 편견이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비록 다조마루님이 배움이 없고, 강도질을 할 망정, 게다가 자백했다고 해서 증거도 없이 범인으로 단정 짓는 일은 위험합니다. 이런 방식의 수사라면 나무꾼님 지적처럼 엉뚱한 피해자가 생기거든요. 사건이 올바르게 매듭짓지 못하면 나쁜 선례를 만들 수 있고, 그 나쁜 선례는 다른 사건에 계속 나쁜 수사 결과로 영향을 끼쳐서 선의의 피해자가 속출할 수 있습니다
호멘 흠, 그러면 마플님은 다조마루님이 범인이 아니라고 보시나요?
마플 저도 궁금합니다. 이번 사건에서 다조마루님의 드러난 범죄는 마사코님을 겁탈한 성범죄와 사무라이님의 말과 활을 절도한 죄입니다. 살인은 본인 자백 외에는 증거가 밝혀지지 않았거든요.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진술만 하고 있잖습니까. 저는 이 거짓말을 하는 인물들은 자신까지 속이는, 즉 자기기만의 인간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라고 작가님이 냉소적으로 비유했다고 봐요. 거짓말하는 인물을 우선 추려 볼까요? 그 가운데 누군가는 진실을 말하고 있을 겁니다만 백 프로 진실은 아닐 것 같고요. 독자는 이걸 캐보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마사코 그러면 독자는 이 작품에서 무슨 역할일지 생각해 봤어요. 이 소설에서 독자는 등장인물을 관찰하고 단죄하는 배심원이자 구경하는 관객이 아닐까요? 마치 연극무대처럼 전개가 되거든요
마플 게다가 진실을 밝히고 싶은 탐정이면서 판결을 내리는 심문관 권위를 얻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 후기에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이야기가 누가 범인인지 진실을 가릴 수 없다는 푸념들이에요
나무꾼 아쿠타가와는 "때로는 거짓말에 기대지 않으면 진실을 표현할 수도 없다"라고 했다더군요. 이 작품은 진실게임인데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조짐입니다. 각자 자기 변론에 집중하거든요. 저를 포함한 등장인물 일곱 명은 진실과 상관없이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만 진술합니다. 현대 일본에서는 '라쇼몽 효과(Rashomon Effect)', '라쇼몽 기법'이라고 합니다.
마플이 말은 아쿠타가와가 쓴 다른 단편소설《라쇼몬(羅生門)》과 《덤불 속》을 합쳐 각색한 영화 「라쇼몽」(1950.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연출)에서 유래한 것으로 압니다. 첨언하자면 구로사와는 영화 「라쇼몽」에서 원작 《라쇼몬》 내용은 버리고 장소만 동원해 《덤불 속》 내용과 합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 작품을 읽을 때 《덤불 속》과 《라쇼몬》 두 작품이 혼동됩니다. 영상 이미지가 그만큼 강렬하거든요. 어쨌든 구로사와는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구로사와 아키라 지음. AK커뮤니케이션즈)에서 이렇게 말해요. “나는 작은 숲 속에서, 즉 《덤불 속》은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만약 한 개만 이야기를 더 보탠다면 장편영화에 적합한 길이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 아쿠타가와의 이야기《라쇼몬》이 떠올랐다. 이 이야기는 《덤불 속》과 마찬가지로 헤이안 시대가 배경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화 「라쇼몽」은 내 머릿속에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마플 자, 이제 차분하게 나가볼까요? 등장인물의 행동과 말을 먼저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러면 사건 과정 윤곽이 드러나거든요. 어느 분이 먼저 말씀해 주실까요?
다조마루 저요. 다른 분 들하고 말 섞는 게 울화통이 터지니까 성질도 죽일 겸 일찍 말하고 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산적 다조마루는 악명 높은 도적입니다. 금품을 강탈하고 여성을 겁탈하기로 유명하죠. 검비위사에게 체포되면서 죽음을 각오해야 할 입장이 되었어요. 처음에는 여자만 겁탈하고 남자를 죽일 생각은 없었거든요. 산길을 가고 있는데 베일을 쓰고 말을 탄 여자와 허리춤에 칼을 찬 남자를 만났지 뭡니까. 등에 활과 활통을 멘 남자는 한눈에 봐도 사무라이였어요. 한적한 산길에 뭐 여자를 데리고 가는 남자가 다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쳐다봤는데 때마침 바람이 불어서 여자 얼굴을 가린 베일이 바람에 날리면서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와아, 보기 드문 미녀였던 겁니다. 순간, 여자를 겁탈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지 뭐예요
호멘 그게 당신이 색욕을 밝히는 망나니라서 그래요. 보통 남자라면 미녀라고 생각만 했지 남의 여자를 탐할 생각을 안 하는데
다조마루 못된 악인이라는 건 나도 알거든! 그러나 사무라이를 죽인 건 내가 여자나 밝히는 놈이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마사코님이 "살아남은 사내를 따르겠다"라고 할 때는 색욕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내가 누굽니까? 천하에 힘세고 나쁜 짓거리는 다 하고 다니는 놈인데 처음으로 나를 믿고 따르겠다는 여자가 생겼잖아요. 그땐 정말 강한 남자가 되어 마사코님 마음에 들고 싶었어요. 그리고 사무라이님과 결투를 했고, 결과는 사무라이님이 죽었어요. "모든 것은 바람 때문입니다" 그때 바람이 불지 않았으면 마사코님 베일이 벗겨지지 않았을 테고요
마사코 저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죽은 제 남편은 와카사국 소속 사무라이예요. 사무라이로서 아내가 산적에게 겁탈을 당하도록 손을 쓰지 못했어요. 무기력한 남성성이죠
나무꾼 남편분은 나무에 묶여 있어서 꼼짝 못 하고 있었다면서요?
마사코 그렇긴 하지만 처음에 다조마루님이 보물을 싸게 팔겠다고 덤불 속으로 데리고 갔을 때 따라가지 않았다면 나무에 묶이지도 않고 저도 겁탈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요. 남편의 탐욕이 불러온 화예요. 인간의 욕심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자식의 영정사진 앞에서도 사망보험금이나 유산받을 돈을 말하는 게 인간이니까요. 욕심에 눈이 멀면 상대를 존중할 줄 모르고 결국엔 자신마저 욕심의 덫에 저당잡혀 주변을 모욕으로 물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조마루님이 검비위청 진술에서 한 말은 저를 통한에 빠지게 한답니다. "어떻습니까? 욕심이라는 거 무섭지 않습니까?" 남편은 검박해야 할 사무라이 신분임에도 욕심이라는 덫에 기꺼이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가 포획당한 겁니다. 자신은 죽고, 아내인 저는 욕을 당하고요.
마플 그런데 마사코님도 남편인 사무라이님을 본인이 살해했다고 진술했잖아요
마사코 제가 산적에게 겁탈을 당해 치욕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남편은 나무에 묶여서 저를 멸시하듯 쳐다봤어요. 저를 더러운 여자로 본 그 모멸감 가득 찬 눈빛이 더 치욕스러워졌거든요
다조마루 내가 이래서 남의 말을 믿지 않아요. 마사코님,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이제 그만하시죠. 제가 댁 남편을 죽인 걸 봤으면서
마사코 저는 다조마루님에게 능욕을 당하고 살아도 모욕만 남은 인생이 될 터이니 남편과 같이 동반자살하려고 했는데, 저는 차마 죽지 못하고 남편만 죽였어요. 평생을 거짓말과 나쁜 짓만 하고 살아온 다조마루님과 남편 외에는 다른 남자를 모르고 순종하며 살아온 저, 둘 중에 누구 말이 믿음이 가나요?
나무꾼 저는 다조마루님 진술이 자기 합리화에 강한 남성성을 결합한 변명으로 들리고요. 마사코님의 진술은 어쩔 수 없이 남편을 죽인 여자의 참회로 이미지 전략을 짠 것처럼 보입니다
마플남편만 죽이고 본인은 죽지 못한, 불쌍하게 살아남은 여자 이미지이다?
나무꾼 그렇습니다
마플사무라이님 혼령 얘기는 다조마루님이나 마사코님 진술과는 대치되는데요. 영매가 혼령을 대리해 전한 마사코님 남편의 고백은 자신은 명색이 칼을 사용하는 사무라이인데 신체가 억류되어 아내가 산적에게 겁탈을 당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만 봐야 했습니다. 무기력한 자신에게 실망했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다조마루님 진술에 따르면 겁탈을 당한 아내가 산적에게 남편을 죽여 달라고 하면서 산적과 함께 떠나려고 했기에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한다고 했어요. 남성성이 부정당한 거죠. 정의와 용기를 상징하는 사무라이 존재감 상실은 죽음과 같지 않을까요. 칼을 달라고 요청해서 “그래서 자살했다”고 합니다
나무꾼 저는 이게 이해가 안 가는 게 묶여 있는 상태에서 아무리 작은 칼이라도 그렇지 자기 가슴을 깊숙이 찌르는 게 가능한가요?
호멘 작은 칼이라도 사무라이 칼은 매우 예리해요. 묶여 있어도 손에 쥐어 주면 죽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마플 현대에는 과학수사가 있어서 손의 각도와 물리적 세기, 칼날의 절삭도, 두께, 칼의 재질, 상처의 깊이와 방향, 혈흔 자국, 혈액량 등 세밀한 수사가 가능하지만 봉건중세 시대에는 한계가 있었겠지요. 자, 등장인물의 진술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다조마루님, 마사코님, 사무라이님은 진실만을 얘기했을까요? 사무라이님은 혼령이 대리등장해서 진술할 때 보물 얘기는 전혀 안 합니다. 보물을 탐해서 비정상적인 거래를 청한 일은 청렴한 사무라이 명예를 의심받을 게 분명하거든요
나무꾼 어지간한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은 안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패가 심하고, 산적 떼가 활개 치는 헤이안 시대라고 해도 사무라이가 어찌 그런 욕심을 부렸을까요
마사코 남편의 명예를 욕하고 싶진 않아요. 저희 어머니가 검비위청에 찾아와서 제 남편의 명예를 지키려 애쓴 증언은 사실에요. 자기 욕심 때문에 일어난 범죄인데 저를 몸과 정신이 더럽혀진 여자처럼 바라본 그 비겁한 눈빛은 부정할 수 없지만요. 저는 버림받은 피해자라고요
마플 그러면 여기까지 진술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다조마루님은 이 소설에서 강한 남성성을 과시하려는 욕구가 보입니다. 직전의 살인 사건 용의자라고 호멘님은 단정하시지만 그건 알 수 없고요. "여자의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를 보며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떠돌이 생활에 길들여진 다조마루님이 가정에 정착하실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다조마루 왜 못합니까? 한번 나쁜 놈이면 계속 나쁜 놈으로 살란 법이 있나요?
마플 그게 아닙니다. 다조마루님은 마사코님의 고백을 듣고 갑자기 로맨티시스트가 되어 마치 사랑하는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는 남자처럼 사무라이님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정말 가장이 되어 마사코님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본인에게 있다고 생각하세요? 늘 그렇듯이 즉흥적인 감정이고, 즉흥적인 결정이죠. 우발적 범죄를 저지른 행실로 보면 다조마루님은 체포가 되어 본인의 이력을 과시하는 큰 범죄자로 이름을 떨치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요? 만약에 검비위사에게 체포되지 않았다면 마사코님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다조마루 살인자라도 어차피 저 같은 놈은 양심이 없으니 폼이 나는 남자도 나쁘지 않겠지요
나무꾼 제가 다조마루님 진술에서 어이가 없었던 건 검비위사에게 자기 범죄를 다른 범죄와 비교한 진술입니다. "나는 죽일 때 허리에 찬 칼을 쓰지만 당신들은 칼을 쓰지 않고 권력으로 죽이고, 돈으로 죽이고, 여차하면 위해주는 척하는 말만으로도 죽이죠. 그러면 피는 흐르지 않고, 사내는 멀쩡하게 살아 있지. 하지만 그래도 죽인 겁니다. 죄의 깊이를 생각해 보면 당신들이 더 나쁜지 내가 더 나쁜지, 어느 쪽이 더 나쁜지 알 수 없지요(비웃는 듯한 웃음)"
다조마루 이게 뭐가 이해 안 된다는 겁니까?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사람을 죽이는 비열한 짓거리들이 수두룩한 세상에서 칼로 사람을 죽였다고 더 나쁜 놈으로 몰아세워도 됩니까? 힘 있고 가진 놈들, 간드러지게 계집애처럼 간교한 놈들의 혓바닥이 더 무섭지 않아요? 그건 사람을 말려 죽이는 거잖아요!
나무꾼 이런 식의 단순한 비교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까지 기정사실화 할 수 있다고요.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일은 권력층이나 돈으로 죽이나, 말로 죽이나, 칼로 죽이나 똑같이 나쁜 짓입니다
마플 허수아비논법인 듯싶습니다. 흐흐. 마사코님은 왜 다조마루님과 다르게 남편을 자신이 죽였다고 하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이건 가설인데요. 남편을 죽일 수밖에 없던 당대 여성의 불평등한 위치, 즉 외간남자에게 강간을 당한 여성은 남편의 손에 죽거나 자살을 하거나, 적어도 사회에서는 손가락질을 받는 시대였으니까요. 그래서 마사코님은 사무라이인 남편의 명예도 지키고 자신은 나쁜 일로 피해자가 되었으니까 행위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계산은 아니었을까요? 마사코님 어머니가 검비위청에 나타나서 죽은 사위를 애도하고 딸의 불쌍한 신세를 하소연하는 모습과 일치합니다. 이러면 사람들 마음이 약해지죠. 마사코님이 수치스러운 이유는 겁탈이 아니라 남편에게 정신적으로 정숙한 아내임이 부정당했다는 것에 있지 않나요?.
마사코 다조마루님의 자백만큼이나 제 자백을 아무도 안 믿는군요
마플 죄송하지만 마사코님과 마사코님 어머니는 사건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동정심만 유발해서 본인의 알리바이를 만들고, 사건의 본질을 덮으려는 거라고 봐요. 정직한 증언자이지만 승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무상, 제행무상을 읊는 일 외에는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종교를 패러디한 인물이죠
호멘 이래서 증인채택이 중요합니다. 노파나 승려는 사건을 은폐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보지만 자기들 생각만 진술하면 사건 해결이 요원해요
마플 그렇죠. 나무꾼님 얘기를 하고 싶어요. 마지막 목격자로서 다조마루님, 마사코님의 거짓말을 증언했거든요. 본인은 정직한 증언을 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나무꾼 여태 제가 하는 말을 경청하는 듯하더니 저를 의심하는군요. 저는 그 남자를 죽이지 않았어요. 그날도 여느 날처럼 삼나무를 베러 산에 갔다가 덤불 속에서 죽은 남자를 발견하고 놀라서 얼른 관청에 신고했을 뿐입니다
다조마루 이보세요! 그 칼 말에요. 아이참, 답답해서. 마플님이 정리해 주세요. 왜 다들 저를 노려보는 건지
마플 그러니까 그 칼 말에요. 다조마루님이나 마사코님은 사무라이님까지 모두 가슴에 작은 칼을 박아 넣었다고 진술했는데 나무꾼님은 칼은 못 보고 사무라이님을 포박했던 밧줄과 여성의 빗이 떨어져 있다고 증언했습니다.“피는 이미 멈춰 있었습니다. 상처도 말라 있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핵심인 피와 물건을 단정해 증언하면서 칼에 대한 말은 없어요
나무꾼 칼은 못 봤습니다
다조마루 당신 말이야 이제껏 아주 점잖은 척했지만 난 당신 같은 부류를 안다고. 나무꾼 주제에 칼이 왜 필요했겠냐 하면 나무 팔아서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냐고. 근데 사무라이 가슴에 꽂혀 있던 작은 칼은 꽤 비싼 칼이거든. 그걸 팔면 목돈을 만질 수도 있지. 난 이해해. 착한 일과 착한 사람은 연관 없어요. 남보기에 정직해 보이는 것 같아도 사람에게는 복잡한 덤불 속 같은 속내가 있으니까. 그 칼 팔아서 애들 맛있는 거 사다 줬어? 아니면 마누라 옷이라도 샀나? 뭐 어차피 사무라이는 죽었고, 마사코님은 도망갔는데 어때. 그 칼은 최초 발견자인 당신이 슬쩍한다고 해서 티가 나는 것도 아니고
나무꾼 비약이 심합니다
마플아쿠타가와는 《덤불 속》에서 다조마루님을 해설사로 분장시켰어요. 눈치 빠른 독자는 짐작하듯이 자기 편의적이지만 발단과 전개를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소설은 이야기(story)로 인물 ‧ 사건 ‧ 배경으로 구성되었죠. 다조마루님은 이야기를 말해주는(telling) 역할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주도해서 독자에게 중계하는 역할이에요. 다조마루님이 전하는 메시지는 한 가지입니다. 사건의 모든 과정에서 자기는 솔직하며 통이 큰 남성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과시이자 자기 정당성 획득이죠. 극형에 처해달라고 말할 때는 더 이상 남성성을 과시할 수 없으므로 존재감이 사라집니다만
다조마루 어쨌든 저는 최후 진술은 의연했습니다
마플 나무꾼님은 끝까지 그 칼의 행방을 부정할 것 같으니까 이 소설에서 처음 아는 단어를 말하고 싶습니다. 중유(中有)입니다. 아시는 분은 설명 부탁드려요
마사코 제 의도가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 설명해도 될까요. ‘중유(中有)’는 「무녀의 입을 빌린 혼백의 이야기」에서 두 번 언급합니다. “나는 중유를 헤매고 있으면서도 아내의 그 대답이 생각날 때마다 어김없이 불붙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나는 그로써 영원히 중유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제 남편의 혼백이 말하는 거죠. ‘중유’란 사람이 죽고 나서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49일을 뜻해요. 흔히 49재라고 부릅니다
호멘 그뿐만 아니라 중유는 일본에서 체념과 비슷한 뜻으로 쓰입니다
마플 체념이라고 하시니까 박경리 산문집 《일본산고》(마로니에북스. 2013)가 생각납니다. 책에 따르면 “체념에는 최소한도의 타협이 있다. 운명에 순종하며 살아남으려는, 체념한 대상에서 방향을 바꾸려는 계산이 있다”라고 합니다. 박경리 선생은 이 산문집에서 체념이 일본인 정서가 된 이유를 ‘정적(靜的)인 우울’로 해석해요. 조선민족은 통곡과 절규로 감정을 폭발하며 현실에 뜨겁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낙천적이며 동적(動的)”이라는 거예요. 반면에 일본민족은 “분출되기보다 안으로, 안으로 밀어 넣으며 슬픔을 구속”하기에 체념으로 현실에 굴복하는 게 다르다는 것이라고 하지요. 《덤불 속》에서 아쿠타가와는 사무라이 혼령 고백을 통해 부부 사이 모럴이 무너진 상태에서 죽음을 ‘중유’로 표현했습니다. 신뢰가 사라진 인간관계에서 “불붙는 듯한 분노”를 느꼈음에도 현실을 깨치고 나아가는 대신 자존감을 잃은 상실감에 젖어 죽음으로 방향을 돌립니다. 아쿠타가와가 보기에 현실에서 인간의 이기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므로 지옥도 극락도 아닌 바람 부는 중유의 세계를 영원히 떠돌 것으로 생각한 것 같아요. 따라서 아쿠타가와가 말한 ‘중유’란 49일이 아닌 ‘영원한’으로 해석됩니다. 아쿠타가와는 이 소설에서 인간의 자기모순과 서양 근대 기준 체계인 합리성을 독자에게 질문하는 것으로 짐작합니다. 선과 악을 이분한 봉건중세 도덕관에서 벗어나 독자에게 다층적 물음을 던지고 있어요. 사실과 진실은 어떻게 다른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거죠. 수사 일지와 같은 이 소설은 근대문학에서 등장한 파격적인 작품으로 고대설화집이 원석이라면 살인사건을 추가해서 옥석으로 만들었죠. 소설의 전통 전개방식인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무시되고, 희곡 양식을 차용한 고백 소설이며, 진실은 무엇인가와 같은 당위보다 세속에 복무하는 인간에게 덤불 속 의미를 가리킵니다
나무꾼 인간은 자기모순과 자기 정당성을 왕복합니다
마플 이걸 인정할 때에만 인간은 자기모순을 조금이라도 탈피하지 않을까요? 대개 사람은 이걸 인정하기 힘들어하죠. 이 자기인정, 자기극복을 통해서만이 인간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게 아닐런지요. 그건 그렇고 한국에서도 이 작품과 비슷한 작품이 있는데 소개하겠습니다. 김남천(1911~1953)은 소설《장날》(「문장」. 1939.6) 말미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한 편을 개천용지개(芥川龍之介)의 靈에 받히는 것은 내의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유학한 조선 문인들은 서양문학을 수혈해 재편성된 일본 근대문학을 만났거든요. 귀국 후에는 일본 근대문학 풍조를 모방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한국 근대문학을 재편성했습니다
마사코 조선보단 일본이 먼저 근대화를 수혈받았으니까요
마플 네. 1927년 아쿠타가와 자살은 조선 문학계에서도 이슈가 되었다고 합니다. 김동인, 이상, 박태원은 아쿠타가와 문학에 영향을 받은 작가입니다. 그 가운데 김남천이 쓴 《장날》은 《덤불 속》을 패러디한 작품이에요. 김남천은 중학생 때부터 아쿠타가와에게 반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개천(芥川)에게 활짝 홀려 돌아갈 때 그가 자살을 하였다. 작가를 이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숭배해 보긴 전무후무다.”라고 고백하죠. 《덤불 속》에서 드러난 사실은 두 가지입니다. 사무라이가 죽었고, 사무라이 아내가 산적에게 겁탈을 당했습니다. 아쿠타가와는 사무라이 살해를 기반으로 소설을 끌고 나가지만 아무도 진실을 알 수 없는 일로 맺습니다. 반면에 김남천의 《장날》은 시골 장날 농민이 소를 팔러 장에 왔다가 살해되면서 발단이 됩니다. 일제강점기가 배경인 《장날》에서 김남천은 식민지조선 농촌 몰락을 밀도 높게 스케치했어요. 《덤불 속》과 《장날》은 발단과 자기 변론에서 보듯 같은 모션을 취하지만 가리키는 지점은 다릅니다.
《덤불 속》은 진실을 알 수 없는 미제사건으로 만들지만 《장날》은 진실은 알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남겨요. 김남천은 한국에서 살해 장소로 적당한 장소로 장터를 주목했습니다. 특정한 날 인파가 몰리면서 북적되는 장터는 물건과 사람이 뒤엉키는 장소이죠. 덩치가 큰 소를 거래하면 뭉칫돈이 오가므로 돈을 노린 살해가 가능합니다. 아쿠타가와가 고전설화집에서 모티브를 따와 《덤불 속》 얼개를 짰듯이 김남천은 1930년대 조선농회 개편을 《장날》에 개입시켰어요. 1926년부터 1933년까지 일제는 조선의 농‧축협조직 206곳을 해체해서 단일화했습니다. 만주침략 병참기지인 조선에서 농촌 물자를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수작이었죠. 두 작품의 무늬는 달라도 접점은 ‘불안’이예요. 《장날》에서 살해된 농민 서두성이 농민 정체성을 잃는 불안과 아쿠타가와가 친구 기쿠치 간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막연한 불안”은 급변하는 근대에 승선하지 못하는 우울한 색채입니다
나무꾼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방황하는 한 우리는 불안에서 해방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우울하군요
마플 자, 긴 대담을 마칠까 합니다. 범인은 누구인가, 가설을 세우고 추리하다 보면 범인이 잡히는 다른 소설과 다르게 《덤불 속》은 덤불 속을 보여주는 듯하면서 보여주지 않습니다. 제목처럼 야부노나카(やぶのなか(藪の中))입니다. 당사자의 얘기가 엇갈려 진상(眞相)을 알 수 없습니다. 진실은 잘 안 보이는 그 너머에 있으므로 그 덤불 속에 스스로 유인되지 않아야 하는데 살다 보면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자기 가슴 깊숙한 덤불 속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는 일이 자기기만에 흠뻑 젖은 번란한 세속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해 모두 마음을 담대하면서도 검박하게 가꾸면서 잘 지냈으면 합니다. 더 하실 말씀들이 없다면 이번 대담은 이상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