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미화 Apr 10. 2024

나쓰메 소세키 《명암》

"어느 게 좋은지 비교해 보세요"

■ 나쓰메 소세키(夏目漱) 작품 가운데 가장 긴 장편소설 《명암 (明暗, めいあん》은 신경쇠약과 위궤양, 치질, 당뇨병에 시달리며 쓴 마지막 작품이다. 1916년 5월 26일부터 1916년 12월 14일까지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에 188회 연재했으나 12월 9일 작가가 사망해 미완성으로 남았다. 1917년 1월 26일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서 연재물을 엮어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소설의 줄거리는 서른 살의 회사원 쓰다 요시오와 아내 오노부를 중심으로 부모형제와 친척, 친구, 옛 연인이 등장해서 인간의 자기중심적 심리를 파헤친다. 주인공 쓰다, 쓰다의 아내 오노부, 쓰다 여동생 오히데가 미스 마플과 대담을 나눈다.   




마플 어서들 오세요. 이번 대담은 가족 구성원으로만 모였습니다

오히데 왜 이렇게 된 거죠?

마플 오히데님은 이 대담 구성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오히데 그건 아니지만 가족끼리 논쟁하는 모습을 독자가 구경하게 되잖아요.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대서 실례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마플님. 오빠와 언니도 잘 지내셨죠?

쓰다 모두 안녕하세요. 물론, 나야 잘 있지. 대담 구성이야 마플님 고유 권한이고, 각자 생각한 바를 말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오노부 어머, 초반부터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건 아니겠지요? 인사드립니다. 아가씨도 잘 지냈을 테고요

마플 모두 반갑습니다. 토론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진행자로서 최선을 다 할게요. 자, 이 중계를 들여다보는 독자 가운데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분들도 있을 텐데요. 작품 줄거리를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됩니다. 저는 줄거리 소개는 재미없어서 선호하지 않습니다만 별수 없이 이번까지는 해야겠습니다

오노부 책을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논점이 있기 마련이고 엉뚱한 말을 하게 되니까요

마플 그렇습니다. 먼저 쓰다님의 양해를 구합니다. 도쿄에 사는 쓰다님은 대학을 졸업한 서른 살의 회사원이죠. 아버지는 관료 출신으로 지금은 교토에 사십니다. 아버지의 잦은 근무지 변경으로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여동생인 오히데님과 함께 후지이 숙부님 댁에서 성장했고요. 그래서 양친보다는 숙부님과 대화를 더 편하게 여기고 있는 듯해요. 쓰다님에게는 반년 전에 결혼한 아내 오노부님이 있어요. 아직 신혼입니다. 오노부님도 교토에 거주하는 관료 출신 아버지댁이 아닌 도쿄의 오카모토 고모부님 댁에서 여학교를 나왔습니다. 《명암은 쓰다님이 병원 진료실에서 의사와 치질 수술 일정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수술비가 없어요. 회사원이기는 하지만 월급이 넉넉지 않아 아버지에게 매달 생활비를 받았는데 이번달에는 집수리에 돈이 많이 들어갔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송금해주시지 않거든요. 부부에게는 수술비 마련이 시급해요. 돈은 오노부님이 마련했지만 오노부님은 남편을 의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노부 남편이 입원한 동안 남편 친구인 고바야시님이 집에 찾아오지 않았거나 가부키 관람 후 요시카와 부인과 합석하지 않았다면 남편을 의심하는 일은 없었을까요? 에이, 지금 와서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마플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시의 여섯 가지 주요 요소를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시란 오늘날 희극, 연극, 영화, 문학을 아우르는 범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 여섯 가지 중요한 요소 가운데 '광경(opsis)'이 있어요. 생각을 증폭하도록 자극하는 아이디어는 청중이 이야기와 배경을 상상하면서 긴장된 전개를 예고합니다. 저 작은 행동이, 저 작은 발단이 앞으로 극을 이끌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요. 이를테면, 셰익스피어는 《오셀로》에서 손수건 한 장으로 아내의 정조를 오해한 어리석은 남자를 그렸고요

쓰다 《맥베스》에서는 스코틀랜드 장군 맥베스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세 마녀의 예언이 소름 끼치게 극의 전개를 주도하죠

마플 욕망을 가진 인간이라면 세 마녀의 예언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죠. 《1984》에서 조지 오웰은 빅브라더의 눈을 피해 윈스턴 스미스가 수첩을 몰래 감추게 만들죠. 독자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수첩이 큰일을 낼 것으로 짐작하게 됩니다. 이런 작은 풍경 하나가 극의 서스펜스를 높이고, 극적인 순간을 작동하는 풍경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이러한 요소를 오늘날에도 많은 소설이나 영화, 연극에서 차용합니다.  

쓰다 제가 학부시절에 1년 동안 읽은 마르셀 프루스트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생각나네요. 그 작품에서 프루스트는 스완의 연인 오데트의 드레스 앞가슴에 카틀레야를 꽂게 설정했지요. 꽃이 자주 흐트러졌다는 건 오데트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가리키거든요. 이런 섬세한 설정처럼 오노부를 만나러 온 고바야시의 툭 던지고 간 불명확한 말, 가부키 관람 후 식당에서 합석한 요시카와 부인의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노련한 표정은 오노부가 남편일을 의심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극의 전개와 결말을 예상하는데 필연적인 등장이죠. 이게 없으면 독자는 결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명암》에서도 마플님이 말한 것처럼 고바야시의 방문이나, 요시카와 부인과의 만남이 아내가 저를 의심하는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만. 결국 잘난 것도 없이 잘난 체하고, 아내에게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허세에서 보듯 저는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마플 자, 《명암》은 쓰다님의 지적처럼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마음, 이기적인 태도를 내밀하게 관찰하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저는 완곡한 자기 이기를 드러내는 주제라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소설 《덤불 속》이 더 뛰어나다고 보거든요. 극명한 대립과 어느 쪽이 진실인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끝까지 팽팽한 자기본위가 압권입니다. 단편이라서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으나 《명암》과는 다른 작가의 개입이 없다는 점에서 점수를 더 주고 싶어요. 반면에 소세키 선생은 부연설명과 원고지 매수를 늘린 듯한 불필요한 대사가 많아요. 아무래도 신문 연재소설이니까 정해진 지면을 채워야 하는 작업을 했겠지요

쓰다 아쿠타가와는 단편 작가잖아요. 소세키 선생은 장편을 즐겨 썼고요. 그러고 보니 소세키 선생 작품은 거의 신문 연재소설이군요. 이야기를 엿가락 늘이듯 늘여 나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군더더기가 많은 글쓰기를 하지 않으려면 원고 청탁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평생 돈에 시달린 선생 입장에선 힘든 문제네요. 아쿠타가와는 결국 청출어람인가요?

마플 아쿠타가와가 소세키 선생 제자였으므로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저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독자 개개인의 취향과 평가는 늘 같을 수 없을 테니까요




오히데 저는 이 작품이 근대문학인만큼 여성의 자기 존재성 자각이라는 점을 눈여겨보고 싶어요. 일본이 근대를 수용하고 사회의 많은 영역을 개혁했지만 여성의 역할이나 여성을 대하는 인식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도 전통적인 봉건시대 여성관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나 여학교까지 나왔지만 이성애적 감정에 이끌려 결혼한 게 아니라 제 미모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선택을 받은 거잖아요. 제가 선택할 여지가 없었어요. 남편은 말이 좋아 도락가이지 세상물정 모르는 한량이에요.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사치를 부리는 게 아닌데 제 미모 외에는 이렇다 할 평가를 못 받았으니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무슨 소용 있겠어요

쓰다 오, 그래서 네가 많이 참고 사는 건 아니잖아?

오히데 이제 와서 말하지만 내가 오빠에게 "교양이 없다"는 둥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어떨 거 같아요? 지금 속으론 근대 여성이라는 말뜻은 알고 있냐고 하겠죠? 늘 그런 식에요, 오빠는

쓰다 내가 그런 말을 자주 했나? 악의가 있던 건 아니고. 당시 내가 겉멋만 있어서 잘난 체하는 경향이 많았지. 상처를 주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지난 일이지만 미안하다

오히데 알았어요.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여학교를 나온 나에 비해 대학공부를 한 오빠나 자기 생각을 망설임 없이 말하고 행동한 언니에게 무의식 중에 자존심이 상했었던 것 같아요. 난 그렇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요시카와 부인이나 부모님에게 괜히 오빠와 언니의 신혼살림을 사치스럽다고 비약해서 전달하고. 여하튼 속이 꼬였던 것 같아서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 한심해

오노부 그건 너무 했어요. 남편이 사준 반지 하나에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다고 오해받았으니 제 속도 상했거든요. 대신 아가씨는 술을 좋아하는 남편을 만났지만 돈 걱정은 안 하고 또 주변에서 미모를 부러워하던 사람이었는데, 남편의 진심도 모르는 데다가 못생긴 제가 뭐가 그렇게 비교가 되겠어요

쓰다 자기 자존심만 내세우려다 보면 나와 고바야시처럼 모멸감만 주는 사이가 돼버리거든    

마플 그렇습니다. 그런데 속세의 인간은 성인군자가 아니므로 그 사소함이 상처를 만들고 의를 상하게 만듭니다. 오히데님은 미모로만 평가되는 인물이라서 저도 안타까워요. 쓰다님의 병실에서 쓰다님과 논쟁을 하는 부분에서도 자기주장이 확고했고, 비록 억지를 썼다고 했지만요. 오노부님과 나누는 논쟁에선 밀려나지 않거든요. 쓰다님이 보기에 오히데님은 이치를 따지기를 좋아하고, 오노부님은 스스로 만든 이론을 행동으로 옮기는 스타일입니다.

쓰다 오히데가 이치를 따지는 스타일이라고는 하지만 그 이치라는 게 질투예요

오히데 내가? 어떤 면에서? 단지 부모님이 생활비로 보내 준 돈으로 반지를 산 오빠네를 일러 받친 일로?

쓰다 그뿐이겠어? 잘 생각해 봐. 내가 치질 수술을 받고 입원한 병실에 찾아와서, 물론 오노부의 계략이었지만. 요시카와 부인집에는 왜 간 거야? 뭘 확인하고 말할 게 있다고? 네가 요시카와 부인과 친하지도 않았잖아. 그다음엔 후지이 숙부댁에 찾아가서 말을 흘리고. 오노부가 없는 사이에 우리 집에도 찾아왔었고. 오노부도 내가 누굴 정인으로 가슴에 두고 있는지 의심하면서 너네 집을 찾아갔다가 왔지. 다 나를 중심에 두고 빙빙 돌면서 서로 신경 소모전을 펼쳤잖아




오노부 그때 아가씨가 저에게 "아직도 더 사랑받고 싶은 거예요?"라고 말했어요. 제가 남편을 좌지우지하면서 사는 줄 오해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꺼낸 일은 잊히지 않아요

오히데 알아요. 질투였어요. 인정합니다. 저는 남편의 무관심에 시어머니의 시집살이, 가사와 육아에 부부간의 사랑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데 언니는 아직 신혼인 데다가 생활비로 알반지를 살 정도로 오빠의 전폭적인 이해를 받고 있으니 배가 아팠나 봐요. 그러나 언니도 꿋꿋하게 자기주장을 냉정하게 펼치는 분이잖아요. "대체 남편은 여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요?" 이런 질문은 당돌한 저도 생각을 못해봤어요.

마플 자, 이 부분을 제가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까 오히데님이 근대 여성의 자기 존재성 자각을 언급해 주셨어요. 오히데님은 미모에 가려져 자신의 정체성이 축소평가된 것 같아 보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람을 흔들기 좋아하는 흙탕물 같은 교활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훌륭한 조언자처럼 남의 사생활에 권위를 이용해 압박한 요시카와 부인 같은 사람도 있지만 오히데님처럼 자기 생각을 표면에 드러낸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질투란 인간의 많은 모습 가운데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요. 결과적으로 오히데님의 질투는 오노부님의 냉정한 탐구심을 더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오노부님은 오히데님보다 더 자기를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오노부 제가 남편의 숨겨 놓은 것 같은 정인의 실체를 캐보고 싶어 하고, 남편을 향한 사랑을 갈구해서 인가요?    

마플 이 작품에서 오노부님의 사랑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고모님 댁에 갔다가 사촌동생 쓰기코와 나누는 대화에서 오노부님은 남자에게 구애를 받는 수동적인 여성상을 말하는 쓰기코에게 이렇게 말하잖아요. "내가 행복한 것은 단지 내 눈으로 남편을 고를 수 있었기 때문인 거야. 누구라도 상관없어. 그저 자기가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그리고 꼭 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도록 하는 거지"

쓰다 오노부가 저에게 자기 의견을 또박또박 말하는 모습만 봐도 짐작할 일입니다. 오노부가 저를 선택했다는 말은 사실에요. 사실 저는 기요코님을 마음에서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고 결혼을 해야겠다는 적극적인 생각도 없었어요. 저는 엉겁결에 오노부와 결혼을 한 게 맞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오노부의 직선적이면서 영민한 순발력이 싫지 않았던 것 같군요

오노부 당신은 늘 내가 먼저 물어봐야 대답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것도 시니컬하게 동의하면서 온갖 토를 갖다 부치죠. 결혼도 골치 아픈 생각을 더 하기 귀찮아서 얼떨결에 한 것으로 보였어요

마플 그리고는 부인과 가정경제를 두고 은근히 신경전을 펼치죠. 가장으로서 자존심이 있는데 아버지는 수술비를 안 보내주시고, 처고모부에게 신세 지는 일도 모양새가 빠지는 일이니까 오노부님에게 느긋한 것처럼 허세를 떨고요

오노부 남편은 결혼도 제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금방 단념하고 물러났을걸요

쓰다 나를 너무 잘 아는군. 당신은 나를 관찰하기 바빠서 눈과 머리가 쉴틈이 없겠어

오노부 평소에 책임감 있고 분명한 언행이라면 그러지 않았겠지요

마플 오, 잠깐만요. 오노부님의 적극적인 현실감각은 사랑의 주체자로서 자신감이라고 보거든요. 근대여성은 봉건시대 여성이 인정받지 못한 자아가 발현됩니다. 물론 오히데님이 미모로만 존재를 인정받는 인식도 공존했지만 《명암》에서 오노부님은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랑받고 싶어요"라고 당당한 선언을 하는 신여성인 거죠. 오히데님과 비교되는 병실 논쟁은 소세키 선생이 그동안 가부장적인 시선으로 여성을 대했던 기존 작품들과 반대편에 있습니다. 소세키 선생은 생을 마치기 직전에는 이처럼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을 교정하신 것으로 짐작돼요.

오히데 그러기 위해선 저처럼 봉건을 계승한 것 같은 구시대적인 가정생활을 유지하는 저와 같은 인물이 비교대상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를 견디며 도락가인 한량 남편을 모시고 살던 당대 많은 여성들은 억압을 느끼면서도 순응했어요. 집안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게 될 이혼녀가 되지 않으려면 달리 탈출구가 없었으니까요

오노부 부부나 남매사이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학력 차이가 나듯이, 인권 존중면에서도 근대는 개화가 되었으나 성차별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데 요시카와 부인도 남편의 사회 지위에 힘을 얻었을 뿐, 이렇다 할 자기 직업은 없잖아요. 당대 여성은 남편에게 소속된 여성이었던 거예요. 지금도 자신의 능력이나 특기를 발휘하지 못하고 남편과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 인생을 마치는 여성이 적잖고요. 그래도 봉건보다는 근대가, 근대보다는 현대에 여성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노부님은 현대적 인물에 가깝다고 보는데요?




오노부 그런가요? 현대를 살아본 적 없는 근대인이 비교 대상은 봉건이므로 전근대보다는 자기 존재를 밝히는 일에 풍뎅이 한걸음만큼은 개선되었겠지요

쓰다 흠, 내 생각도 오노부는 고바야시만큼이나 근대의 수혜인 자아, 이성, 자유를 안다고 보는데. 고바야시만큼 제멋대로 사는 인간도 당시에는 특이한 유형이었으니까. 별종은 아니지만 소세키 선생은 고바야시를 통해서 뭘 말하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어. 당신은 고바야시와 긴 대화를 나눠봤으니까 알 것 같은데?

오노부 고바야시님은 가난한 처지 때문에 뻔뻔해지고 특정 인물에 구애받지 않게 된 거지 원래 성격은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래도 내가 받을 상처를 헤아려서인지 모르겠으나 기요코님 얘기는 끝까지 꺼내지 않은 것으로 보면 당신에게 했던 것처럼 아주 양심 없는 철면피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마플 고바야시님이 병실에서 쓰다님에게 조선으로 가는 여비를 마련해 달라고 찾아가서 한바탕 논쟁을 벌이면서 "나는 누구하고 싸워도 상관없는 사람이야"라고 강변하지요. 고바야시님은 잃을 게 없는 사람, 돈이나 외투를 달라고 요구하면서 굽히지 않는 사람, 자기 마음을 굴절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뻔뻔한 사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부르죠. 그런데 현실에서 고바야시님 같은 인물은 피하고 싶은 사람 1순위가 될걸요

오노부 그렇죠. 저와 대화를 나눌 때에도 진땀이 날 정도로 물고 늘어졌어요. 소세키 선생은 고바야시를 통해 자유 외에도 거짓말을 하며 본인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처럼 구는 제 남편과 비교하기 위한 인물로 창조한 것 아닐까요?

쓰다 역시 나는 이렇다 할 능력도 없으면서 비겁한 인간인가?

마플 요시카와 부인 말에 흔들려 기요코님을 만나러 온천으로 간 행위만 봐도 부정하기 어렵죠? 흐흐. 그러니까 이미 결혼한 몸으로 옛사랑을 재회해서 무슨 마음을 확인하겠다는 건가요? 기요코님 마음이 여전히 쓰다님에게서 떠나지 못했다면 오노부님과 헤어지고 기요코님과 재혼이라도 할 요량이었을까요? 기요코님은 어둠과 밝음의 경계에서 밝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마지막 기회로 등장시킨 게 아닐까요? 쓰다님은 스스로 판단이나 의지로 결정할 능력이 없거든요. 아내에게 선택받은 남자는 요시카와 부인에게도 선택받고 기요코님의 선택에 따라 명암을 결정하게 됩니다. 본인이 결정한 일이란 고바야시님에게 여비돈을 마련해 준 정도죠. 그래서 우리의 쓰다님이 못미더운 소세키 선생은 온천 여행 직전 오노부님에게 의미심장한 대사를 만들어줍니다

오노부 남편의 여행가방을 꾸리면서 미리 지어 놓은 솜옷을 건넬 때 한 말인가요?

마플 네. 오노부님은 자신의 헌 옷을 뜯어 남편의 솜옷을 지었어요. 쓰다님은 온천장에서 솜옷이 제공될 텐데 뭘 이런 걸 만들었냐고 퉁을 놨지만 가방에 넣어 갔고요. 어때요? 오노부님이 만들어준 솜옷과 온천장에서 준 솜옷 중 "어느 게 좋은지 비교해 보세요"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쓰다 소세키 선생의 복선입니다. 오노부가 자기 옷을 뜯어 만든 솜옷은 오노부에게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뜻이죠. 반면에 온천장 솜옷은 온천장에서 재회한 기요코처럼 새로 지은 옷이라 감촉이 좋죠. 아내가 만들어준 솜옷과 기요코와 재회할 수 있는 온천에서 입을 솜옷은 윤리적으로는 아내가 지어준 솜옷을 고맙게 입어야 합니다만 저는 아내에게 요양을 한다는 핑계로 혼자 기요코를 만나러 간 거잖아요. 소세키 선생은 독자에게 이게 무얼까? 유도한 거죠. 또 한 가지는 이 책 제목인 '명암'에서 보듯 '밝음과 어둠' 가운데 어느 게 좋은지 비교해 보는 겁니다. 밝음은 아내와 투닥대면서도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인생의 동반자와 삶을 공유하는 일이고, 어둠은 아내와 헤어져 옛정인인 기요코와 만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기요코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몸이에요. 기요코도 여전히 저를 마음에 정인으로 품고 있다면 어떨까 싶지만 아시다시피 기요코는 재회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제가 아내의 마음을 등지고 어둠으로 떨어질 뻔하다가 기요코의 식어버린 마음을 확인하고 다시 밝음으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마플 고바야시님과 프랑스 요리점에서 만나 돈을 줄 때 고바야시님이 한 말이 떠오르네요. "자네한테는 너무 여유가 많다고. 그 여유가 자네를 사치스럽게 만드는 거라네. 그 결과 좋아하는 것을 손에 넣자마자 곧바로 다음 것을 원하게 되지" 고바야시님은 요시카와 부인을 만난 적이 없지만 "당신은 아내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서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려고 한다"라고 한 요시카와 부인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쓰다님은 기요코님에게 선택받지 못한 남자이죠.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반면에 오노부님에게는 선택받은 남자인데 역시 왜 선택받은 건지 이유를 몰라요. 쓰다님은 직장이 있지만 뚜렷한 직책이 없는 것으로 봐서 고등유민입니다. 부친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부친과 친한 요시카와 상사 덕으로 취직을 했어요. 신혼집 마련과 생활비도 부친이 해결하고요. 하녀는 오노부님이 고모댁에서 데려온 인물이고. 학교 다닐 때 책을 읽은 것 외엔 쓰다님은 자신의 일을 해결한 게 없습니다. 내면에는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계산이 가득하고, 심지어 아내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면서도 최소한의 미안함도 안 가져요. 그래서 고바야시님은 싫어하는 것, 불편한 것은 어떡하든 피하고 좋아하는 것만 하려는 쓰다님의 유아기적 심리를 비판합니다. 현대 개념으로 치면 쓰다님은 은수저 정도는 되고, 파파보이가 되거든요. 내적성장이 덜된 상태로 결혼을 했으니 오노부님처럼 자존심이 강한 여성이 수술비를 마련하러 고모부에게 부탁하는 상황까지 내달린 거죠. 인간의 자각이란 것이 어지간한 사건 아니면 알기 쉽지 않거든요. 큰 사건을 맞닥뜨려서 뚫고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거죠

쓰다 제가 읽은 소세키 선생 작품 여러 편에서 고등유민은 단골 등장인물입니다. 《명암》을 비롯해 《춘분 지날 때까지》, 《마음》, 《풀베개》, 《행인》도 그렇습니다

마플 그리고 이 고등유민은 돈과 긴밀한 관계입니다

쓰다 그렇더군요. 소세키 선생은 질병과 돈이 빠지질 않아요. 하하. 표절시비로 논란이 된 첫 장편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구샤미 선생 제자인 간게쓰와 벼락부자 딸과의 혼인 소동이잖아요. 졸부인 가네다 집안을 안 좋게 보는 메이테이가 간게쓰에게 "가네다는 돈에 코를 처박고 있는 인간"이라고 비하합니다. "그 사람은 일개 활동지폐에 불과해. 활동지폐의 딸이라면 활동수표라고나 해야겠지"라고 도미코까지 도매금으로 욕하죠

마플 가네다는 한자로 금전(金田)이잖아요. 계획적인 작명이죠

쓰다 그렇군요. 게다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는 보험문제, 교육이 투자에 불과하다는 것, 젊은 여성이 자신의 몸값을 남자에게 비싸게 팔아넘기려는 모습에서 이미 소세키 선생이 평생 고전투구한 돈문제가 제시됩니다. 《도련님》에서도 빨간 셔츠가 학교 권력을 정하는 기준이 월급액수이고요. 학교 안에서조차 돈으로 교사의 자질이나 능력을 재단하는 세태를 풍자했어요. 삼각관계에 얽힌 피곤함에서 벗어나고자 가출해서 돈 벌 꾐을 다룬 《갱부》도 돈에 빨려 들어가는 인간을 보여줍니다

마플 단돈 20엔 차용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산시로》는 어떠세요?

쓰다 히로타 선생이나 노노미야나 둘 다 아주, 아니 왜 산시로에게! 의식주 중에서 주거에 지불할 비용인 이사비용 때문에 어머니가 보내준 25엔 가운데 20엔을 식객노릇했다는 이유로. 말이 안 돼요

마플 하하하. 그 말이 안 되는 일을 보면서 독자가 무엇을 알아차릴지가 문학을 읽는 재미겠지요

쓰다 소세키 선생은 돈 때문에 낭패를 겪는 인간을 잘 묘사했는데 애정과는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명암》에서도 저와 오노부의 애정을 금전권력 다툼으로 경쟁구도를 만들어 놓았고요. 《그 후》는 노골적으로 은행원이 나오잖아요. 공금 부정을 저질러서 해고된 지방 은행의 은행원 히라오카가 아내 미치요와 도쿄로 돌아와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간통 사건이지만 결국은 돈이 가정을 파괴하는 설정입니다

마플 진주반지냐, 종이반지냐. 관둘게요. 이런 단순한 이분법은 시들합니다. 소세키 선생은 초반에는 두 개의 대비로 작품을 썼지만 후반기로 넘어가면서는 돈에 삶을 저당 잡힌 다양한 군상을 그려냅니다. 소세키 선생 자신도 풍족한 생활을 누린 적이 없어요. 속된 말로 돈이 필요해서 글을 썼어요. 친구이자 일본 아동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즈키 미에키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고료는 당연히 받아야지. 나는 처음부터 정해 두고 원고를 쓰네"라고 고백합니다. 흔히 글 쓰는 사람이 원고료를 말하면 돈만 밝힌다고 하는데요, 글쓰기는 노동입니다.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는 일이 돈만 밝힌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시 경제권은 남자가 쥐었고, 소세키 선생은 영국 유학 중에도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돈 얘기를 많이 해요. 자녀들과 일본에서 살고있던 부인은 생활고로 고생을 많이 하죠. 소설에서처럼 친척에게 돈을 꾸러 다녔다고 합니다.

쓰다 남자들이 돈을 다투면서 여자를 상품처럼 주고받는 근대일본은 남자가 모든 경제권을 쥔 봉건과 같아요. 근대화를 주창하면서 여자들은 교육의 기회가 한정되고 이렇다 할 직업이 없었잖아요

마플 메이지 유신법은 서양의 경제, 학문, 기술을 본받자고 했지만 경제 주체는 남자들이 장악했어요. 소세키 선생은 자본과 인간의 교환가치를 문제의식 없이 수용한 근대일본을 비판한 거죠. 돈에 저당 잡히는 인격, 돈에 팔리는 신체를 다루다가 마침내 《문》에서는 비싼 노동력을 팔기 위해 학문을 연구해야 할 학업이 희생되는 모습을 그립니다. 먹고살기 위해 학교를 나와 회사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급여인간이란 급여를 대가로 자신의 시간과 인격, 노동을 사용자가 정한 기준으로 파는 인간이죠. 여기서 중요한 건 사용자, 즉 회사나 기관이 정한 기준이 노동 당사자에게 합리적이거나 이해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근대란 자본만 떨어뜨려놓고 봐도 서글프네요. 《명암》은 이렇게 돈에 지배당하는 근대 일본인을 다뤘는데요. 아내와도 돈 문제로 견주어야 하는 쓰다님은 이미 신체와 정신이 아플 수밖에 없어요. 소세키 선생은 쓰다 님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병든 근대일본인의 실태로 삼은 것으로 엿보입니다 




쓰다 치질 수술은 소세키 선생이 교묘하게 짜 맞춘 큰 얼개이군요

마플 맞습니다. 저는 《명암》이 색이 다른 굵은 두 가닥 실을 대나무 코바늘로 짠 뜨개질 같은 느낌을 받아요. 다른 색이지만 두 실이 함께 직조한 것이죠. 문자를 뜻하는 영어 텍스트(text) 원뜻은 '직조한 섬유' 라고 합니다. 뜨개질을 잘해야 품질 좋은 직물이 나오듯이 소세키 선생은 치질이라는 신체 고통과 인간의 불완전한 정신을 근대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한줄기로 엮은 것으로 추정되는군요

쓰다 그래서 의사가 수술을 결정하기 전에 그런 말을 했군요. "역시 구멍이 장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언제 어떤 변을 당하지 모르고", 인간의 정신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라는 말은 신체와 정신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장육부가 어우러져 신체를 구성했듯이 정신은 그런 신체와 동반된다는 말로 해석되는군요. 저에게 수술 방법을 설명하던 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개해서 구멍과 장을 합쳐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찢어진 양면이 유착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체 고통인 치질은 정신에 고통을 가하죠. 동양에서는 정신을 우위로 두는 철학경향이 강합니다만, 소세키 선생은 신체와 정신을 동격으로 본 것 아닐는지요. 저의 이기적이고 비겁한 행동은 정신에서 비롯된 거니까요.

마플 흠, 어떤 사람은 신체의 고통을 정신력으로, 즉 의지로 극복하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은 신체와 정신을 분리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의지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이기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자기 의지만으로는 세상을 헤치고 나가는 일에 한계가 있잖아요. 그럴 때 인간은 실의, 포기, 좌절에 빠집니다. 저는 소세키 선생이 이 작품에서 말하고 싶은 건 노자가 말한 '칙천거사(則天去私)'인 것으로 짐작합니다. 소세키 선생은 직접 쓴 則天去私((소텐쿄시(そくてんきょし)) 족자를 서재에 걸어 놓았다고 알려졌습니다. 이 글은 나를 버리고 하늘의 뜻에 따른다는 의미심장한 동양 각성의 뜻을 담았는데 어느 스님에게 보낸 편지에 심중을 나타냈습니다. “나는 쉰이 되어 비로소 내가 향해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어리석은 자입니다” 제가 미완성으로 남은 《명암》에서 쓰다님의 온천행 다음 행보를 긍정적으로 예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쓰다 나이 오십에 라는 구절은 "나이 오십 전까지는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 뿐, 왜 그렇게 짖어대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라고 한 이탁오가 연상됩니다. 쉰 살은 하늘의 명을 알게 되는 나이라고 해서 지천명(知天命)이라고 말하지요. 소세키 선생이 일본문학의 셰익스피어라고 칭송한다는 말만 들었지 이런 배경을 듣고 나니 그 칭송이 이해 갑니다

마플 이탁오가 분서(焚書)》에서 말한 '한 마리 개'는 어리석음에 난파되어 허우적대는 보통의 우리 인간 모습 아닐까요. 그 분분하고 오만한 모습을 소세키 선생은 과도한 감정 폭발 없이 침착하게 엮었습니다. 타고난 오만한 성격을 가진 쓰다님이나 질투심 때문에 오노부님을 음해하려던 오히데님, 자존심이 강해 굽힐 줄 모르던 오노부님, 자기 하고 싶은 말은 거리낌 없이 말해서 경멸을 받는 고바야시님, 자기 남편의 권위를 이용해 남의 사생활을 쥐락펴락하려던 요시카와 부인 등 저는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소세키 선생은 비하나 미움이 아닌 칙천거사에 압정을 꾹 눌러 박고 인간을 바라본 것으로 평가합니다

쓰다 그러고 보니 수술 후 의사가 제게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가까운 시일 내에 퇴원할 수 있냐고 물으니까 "상처 쪽은 아직 가만히 두지 않으면 위험하니까요" 제가 불안해서 다시 물었어요. "이게 안 나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랬더니 의사가 "다시 자릅니다. 그리고 전보다 살짝 구멍이 남습니다"라고 말했거든요. 아아, 인간은 어리석을수록 이 반복을 더 하게 되고, 그러면 구멍은 더 더 커지겠군요. 소세키 선생이 의사로 변장한 것 같은데요? 저 대사들이 신체와 정신을 한줄기로 꿰지 않습니까

마플 그런 의심이 농후합니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자기를 등장시키거든요

오노부 인간의 삶이란 게 알면 알수록 천태만상입니다. 제 남편인 쓰다님은 "근대라는 불가역적인 세계"에서 변변치 못한 불완전한 인간이 자기를 인정하고 살기 힘든 복잡한 모습을 띄었어요. 소세키 선생은 모든 등장인물을 각자 주관적인 입장으로 묘사하면서 자기 집착, 자기 올인에 빠진 어둠에서 벗어나 밝은 세계로 나아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명암은 상대적이면서 동반자라고 봅니다. 육체와 정신이 분리될 수 없고 삶은 죽음과 동반이듯이 밝음은 어둠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어둠도 밝음과 대비될 때 존재하는 거니까

쓰다 당신의 영민함은 나와 논쟁할 때처럼 변함없이 놀랍군

오노부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제 속이 편할텐데요

쓰다 응

마플 소세키 선생은 친구 스즈키 미에키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문학론을 아름다움에 종속되지 않는 문학으로 규정합니다. "문학을 생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단순히 아름다움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지. 유신 당시 왕가가 보여준 소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거라 생각하네. 잘못하면 신경쇠약에 걸리든, 미치광이가 되든, 감옥에 가든,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는 소견을 갖지 않고는 문학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네. 문학가가 느긋하게, 초연하게, 아름다움을 즐기며, 세상과 멀리 떨어진 듯 작은 천하에만 머물러 있다면 몰라도, 큰 세계로 나가면 그저 기쁨을 얻기 위해서 쓴다고만은 할 수 없네. 적극적으로 고통을 찾기 위해 써야 할 것이네"

쓰다 작가의 글쓰기도 그렇고 여타 인간도 그렇고 어둠의 세계인 고통을 거치지 않고는 밝은 세계로 진출할 수 없군요. 오노부 말대로 명과 암은 동행입니다

마플 동의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묘미겠지요. 오히데님이 조용히 자리에 계시게 해서 진행자로서 죄송합니다. 이제 긴 대담을 마칠까 하는데 하시고 싶은 말씀 전해 주십시오

오히데 저는 가족끼리 대담이라 그동안의 서운함이나 오해를 다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방향이 달라서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소세키 선생이 "고통을 찾기 위해"라는 말의 울림이 큰데 이 글은 어디에 수록됐나요?

마플 가족끼리 따로 회포를 한번 푸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라는 책입니다. 편지글 위주로 편집해서 소세키 선생의 문학론이나 사생활을 부담 없이 살펴보기에 좋습니다. 자, 그럼 이만 《명암》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긴 시간 참석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돌아가세요

쓰다 네, 시대를 뛰어넘어 인간을 조명하는 문학은 철학입니다. 감사합니다

오히데 감사합니다

오노부 모두 밝음의 세계로 잘 돌아가세요


-마플 합장(合掌)-










매거진의 이전글 나쓰메 소세키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