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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파로호를 걷다

평화의 댐

by 이용만

입추(入秋)를 지나며 DMZ 따라 걷기 스무 번째 날인데 아직 무덥다. 화천(華川)에서 먼저 동트는 산이라는 해산의 해산령 표석에서부터 내리막길을 걷는다. 해산터널의 길이 1986m는 아시안 게임이 있던 해와 같다. 대붕호(大鵬湖)로 불렸던 파로호(破虜湖)도 중국 오랑캐를 격파하여 지어진 이름이었다. 화천댐으로 길이 막힌 비수구미는 신비로운 물이 빚어낸 아홉 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도 한다. 비수구미에서 파로호를 끼고돌아 평화의 댐에 올랐다.

평화의 댐 남쪽 하류

휴전 중인 현실의 안보와 해석에서 확신을 갖기 어려웠는지 1986년 댐건설논란이 무성했던 기억이 아스라했다. 해설사는 80m의 댐이 235m까지 높이와 두께를 키웠던 역사를 역대 대통령의 성대모사를 곁들이며 재미있게 풀어나갔다. 진흙과 시멘트를 버무려 만드는지 북한 상류에서 엄청난 황톳빛 토사가 쏟아져 내려왔다. 적대감속에서는 의심만 커지고 평화의 댐을 2차 3차로 증축하였다.

거대해진 평화의 댐에서 파로호를 내려다본다. 곧 휴전협정이 조인된다면서도 화천댐 공방을 벌인 막바지 전투는 그곳에서 죽는 일이었다. 중공군의 시체만 24,000구. 파로호에는 '시체반 물반'이었다는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군복무시절 민간인 통제선 안쪽의 전방 GOP근무를 위해 철원 북쪽 토교저수지를 상류에서 건너가던 때였다. 산란기의 물고기들이 여울을 올라가느라 굴곡진 좁은 상류에 쉬고 있어 철모를 벗어 물고기를 퍼 담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시 놓아주었지만 물고기들은 알을 낳으려는 일념뿐 흩어지지도 않고 상류로 가야 했다. 산란(産卵)을 위한 본능의 힘을 느꼈다. 말 그대로 '물 반 고기반'이었다. 하지만 '시체반 물반'은 듣기 거북했다. 애초에 없던 말이었다. 태초에 '시체반 물반'이란 말이 있었나? 말이 말을 모독하는 것 같았다.

곳곳에 평화적 의미를 되새기는 상징이 많았다. 세계 분쟁지역의 탄피로 만든 9,999kg 평화의 종을 타종했다. 평화의 종의 윗부분에 그려진 비둘기의 왼쪽날개가 미완성이었다. 10,000kg에서 1kg 부족한 평화가 이루어질 그날을 고대하려는 미완의 뜻이 담겨있다. '평화의 종'에 몸을 붙였다. 진동이 두개골에도 전해졌다. 눈을 감으니 전쟁터에서 스러지는 것들이 보이고 들리는 듯 전율을 느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노랫말의 비목공원으로 내려가려는 데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평화를 말하려는 인사들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여사도 반가웠다. 그녀가 평창에 왔을 때 주물로 본(本)을 뜬 가냘픈 손도 있어 손을 내밀었다. 정작 수치여사는 3년도 안되어 미얀마군부에 의해 연금 중인 게 안타까웠다. 평화는 오다가도 되돌아가는 그런 것이었다. 평화를 염원하는 많은 말속에서도 전쟁과 평화는 멈칫거리며 제 발을 내디딜 뿐인 듯싶었다.

비목에 걸려있는 철모

물(水) 문화관에서는 모형으로 만든 댐들로 팔당댐까지 물줄기가 이어졌다. 상류일수록 댐높이가 높다. 금강산댐은 북한의 댐으로 임남댐이라고도 불리는 데 평화의 댐 건설 이후 동해로 물줄기를 바꾸고 북한의 수력발전에 쓰인다. 평화의 댐 안쪽에는 물의 양도 적은 지류만 흘러들어와 밑바닥 배수구들이 보일정도이다. 며칠 전 태풍 '카눈'이 드물게 한반도를 종단하며 수직으로 지나갔어도 저수량은 많지 않다. 남한 수력발전을 위해 화천댐을 사수하고 결과로 남은 이름이 파로호였다. 파로호라는 이름으로 휴전 중임을 알리고 있고, 북쪽 금강산댐의 물줄기마저 되돌릴 수 없다. 파로호가 전설 속 대붕(大鵬)의 모습을 닮았다는 대붕호로 다시 불리기까지는 요원해 보였다. 한반도 DMZ 70년이 지났어도 기후변화만이 말없는 말을 오래도록 남기고 있었다. 무거워지는 마음에 분단의 역사를 잊으려던 스스로를 다잡고, 다가올 추운 계절에도 양구, 인제 그리고 고성을 향해 DMZ 평화누리길을 동(東) 쪽으로 걸으며 국가와 환경을 가슴깊이 담아야겠다.

평화의 댐 안쪽 상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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