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차
아침에 눈을 떴는데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 오늘은 전기자전거를 빌려 타고 우도를 한 바퀴 돌 작정이었습니다. 배가 뜨지 않아서 다른 객실 손님들도 제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배가 뜨지 않으면 우도의 많은 식당과 카페는 문을 열지 않기 때문에 낭패입니다. 걱정이 좀 되어서 숙소에 남아있을지 나갈지 고민을 했습니다. 숙소 직원분께 여쭤보니 ‘카페 살레’라는 곳은 풍랑주의보에도 영업을 곧잘 하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왕 우도까지 왔는데 섬 투어를 날씨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조식으로 준비된 뿔소라장과 계란밥을 먹으며 나가겠노라 다짐했습니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었습니다. 허풍 조금 보태면 가만히 있어도 뒤로 밀릴 정도였어요. 전기자전거를 빌리고 바라클라바와 장갑을 단단히 꼈습니다. 전기자전거가 아니었다면 저는 다닐 수 없었을 겁니다. 조금만 발을 굴러도 앞으로 쭉쭉 나가 주는 그 동력 덕분에 저는 오늘 하루를 잘 보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자전거를 5단으로 놓아도 바람 때문에 앞으로 잘 가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달려 도착한 카페는 꽤 아기자기 했습니다. 하고수동 해변 앞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도 땅콩 캐러멜 케이크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또 제주에서 읽네요. 3년 전에도 제주에서 읽었었는데. 그때부터 저의 마음속 어딘가에는 항상 능동적 사랑의 실천이라는 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보다는 한 걸음 나아간 것 같기도 하고요.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두 시간 정도 머물다가 나와서 혼자 네컷사진을 찍었습니다. 꽤 씩씩하게 나와서 맘에 들었습니다. 이제 또 목적지가 사라졌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아서 밥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먹기로 했습니다. 숙소 스텝분이 알려주신 햄버거 가게에 가기로 마음먹습니다. 전기자전거에 올라타서 쏜애플의 노래를 들으며 해안도로를 달렸습니다. 시원했습니다. 파도가 거셌습니다. 거센 파도의 우도에 제가 올라타고 있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진심으로 좋았습니다. 날이 좋은 우도보다 이런 우도를 볼 수 있어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가는 길에 예쁜 풍경들이 있어 중간중간 멈춰 섰습니다. 망원경이 있어서 가지고 놀았습니다.
곧 햄버거 가게에 도착했습니다. ‘하하호호’라는 가게였는데 생각보다 트렌디해서 놀랐습니다. 친절한 직원분과 귀여운 고양이와 여고 앞 떡볶이집 같은 느낌의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페인트칠을 하다 오셨다고 직원분 얼굴에는 검은 페인트 자국이 있었습니다. 저는 멋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흑돼지 마늘버거와 우도땅콩쉐이크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아리랑 놀았는데요, 아리는 정말 예쁘고 순한 야옹이였습니다. 냐아 하는 소리를 내는데 그것도 참 사랑스럽더군요.
버거가 나왔습니다. 바람을 뚫고 온 제게 고생했다고 프렌치프라이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제가 심심할까 봐 계속 말도 걸어주시고, 오늘처럼 휴무가 많은 날에 열 것 같은 식당의 이름과 번호를 메모해 주셨습니다. 사진도 찍어주시고 이것저것 너무 챙겨주셔서 감사하고 기분 좋은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컵홀더에 메모를 적어 압정으로 벽에 고정하는 문화가 있길래 ‘2023 잘 정리하고 더 자주 웃는 2024로 나는 간다’고 썼습니다. 아까 찍은 네컷사진도 함께 붙였습니다. 언젠가 다시 온다면 오늘의 저를 대견해할 거예요. 저는 언제나 지난 저를 애틋하게 생각하거든요. 하하호호 옆에는 책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잘 안 여는데 오늘 열었다고 꼭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랑 어울린다고도 해주셨어요. 감사한 마음을 안고 나왔습니다.
책방은 아주 좋았습니다. 이리도 바람 불고 추운 우도에서 발견한 모닥불 같은 느낌이었어요. 사장님의 큐레이션이나 구비해 놓으신 책들이 모두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ㅂ들을 위하여]라는 에세이를 샀습니다. ㅂ으로 시작하는 친구에게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또 잘 모르겠네요.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고. 책과 2024 일력을 샀습니다. 커피를 판매하시길래 과테말라 게이샤를 따뜻하게 한 잔 마셨습니다. 앉아서 그 에세이를 좀 읽었는데 술술 읽혀서 좋더군요. 그렇지만 제 친구 'ㅂ'가 이 책을 받게 된다면 코웃음 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안 줄까 고민 중이에요.
원래 일몰을 보려고 했는데 구름이 많아서 일몰 보기가 힘들 것 같다고 도민 3명 피셜로 들은 상태라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전기자전거를 타고 우도를 한 바퀴 돌았어요. 예쁘고, 사람도 없고. 좋았습니다. 숙소에 돌아오니 부침개를 부쳐먹자고 하시더군요. 스텝분들이 [형부]라고 부르시는 사장님께서 김치전과 파전을 아주 예쁘고 맛있게 부쳐주셨습니다.
막걸리도 마셨습니다. 우도 땅콩 막걸리. 두부 김치도 해주셨어요. 땅콩 두부였습니다. 땅콩에 질식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만 해도 땅콩 케이크, 땅콩 버거, 땅콩 쉐이크, 땅콩 막걸리… 글 쓰는 지금은 땅콩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어요. 땅콩 인간이 되고 있습니다! 아. 막걸리 안주로 그냥 땅콩도 먹었네요. 띵콩땅콩…
10명 남짓되는 여성들과 모여 막걸리를 마시고 대화를 하고 마피아 게임도 했어요. 11시 50분쯤부터는 모여 함께 카운트다운을 하고 새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소원도 빌고 돌아가며 덕담도 했습니다. B언니에게도 전화해서 새해 인사를 했습니다. 언니가 있어서 좋다는 둥 그냥 평소처럼 마음을 전했는데 언니가 훌쩍이기 시작했습니다. 언니는 외롭다고 했습니다. 언니를 외롭지 않게 해 줄 수는 없지만 내가 곁에 있다는 걸 전하는 건 할 수 있었습니다. 언니와 함께 제주에 오고 싶었습니다. 언니와 전화를 마치고 N에게 전화했습니다. N에게도 짧은 새해 인사만을 전하려고 했으나 전화가 길어져 새벽 4시까지 통화하고 말았습니다.
전화가 끝나니 들었던 생각은 ‘소모적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의외입니다. 저는 N와 대화할 때 차오르는 느낌을 받거나 혹은 N이 차올라지는 게 느껴져 좋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처음으로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별적 형상이 본질인지 본질이 아닌지 / 헤겔과 분석철학 / 심리철학 / 감정을 온도처럼 측정하는 방법에 대한 것 / 감정을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면 시와 소설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 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소모적이더군요. 왜였을까요? 전화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가 담배를 두 개 피우며 계속 소모라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저는 N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어렵다는 말을 또 쓰고 싶어지네요. 어렵다는 건 남탓이래요.
이렇게 2023이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