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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름모 Jan 04. 2024

[1/2] 다 사라져 버렸으면 하다가도 진짜 다 사라져

버리면 어쩌지 하는 마음. 11일 차

우도를 떠나는 날입니다. 저는 세화에서 산 원피스를 입었습니다. 원래 10시 30분 배를 타려고 했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서 3시 30분 배를 타기로 합니다.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는데 E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E와 C를 배웅하지 못할까 봐 거실로 나갔습니다. E는 원피스를 입은 저를 보며 [또 분위기가 다르네] 하셨습니다. 그리고 원피스 가장 윗 단추를 잠가주셨습니다. E는 20년 넘게 패션 일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엄마의 마음으로 챙겨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E가 가장 잘하는 일, 가장 잘 볼 수 있는 것을 보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아침부터 마음이 좋았습니다. M과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그녀는 같이 배를 타고 나가지 않는 걸 아쉬워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작별했습니다. 저는 양해를 구하고 조금 늦게 준비를 한 뒤 좋은 날씨의 우도를 걸으러 나갔습니다. 처음으로 보는 파란 하늘이 반가웠습니다.

파란 우도


비양도에 갔습니다. 비양도는 한국의 끝인 우도에서도 가장 끝에 있는 섬입니다.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걸어 들어갈 수 있었고 숙소에서도 2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한 바퀴를 돌고, 신년 소원 의자에도 앉았습니다. 원래 비양도가 일출 명소로 유명한데 저는 해를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여유롭게 비양도를 둘러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바다가 아름다웠고 파도가 거침없었습니다. 멍하니 바다를 보다가 등대를 만났고, 좋은 길도 만났습니다. 돌로 만들어진 연대(봉화를 올리던 곳)가 있어 그곳에 올라갔더니 전망이 참 좋았습니다. 바다가 끝도 없습니다. 너른 들판과 바다를 보니 서울에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피어올랐습니다. 이제 저에게 오늘 남은 숙제는 잘 돌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만난 것

비양도에 하나 있는 카페에 갔습니다. 한라봉 팬케익과 아이스라떼를 먹었습니다. 18500원이나 하는 값비싼 음식입니다. 한라봉 팬케익을 쳐다보며 얼마나 맛있는지 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맛있었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집으로 잘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러다 이영훈의 [돌아가자]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이영훈 씨가 그 노래를 불렀던 무대를 보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눈을 꼭 감고, 재지하게 기타를 메고, 입술을 아주 조금씩 움직이며 노래를 했습니다. 사비가 시작되면 셰이커를 조심스럽게 흔듭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완전히 매료되어 다른 영상들을 찾아 듣고 그의 앨범을 모조리 플레이리스트에 담았습니다. 오늘과 어울리는 음악을 찾다니 행운입니다. 그의 노래 중 [가만히 당신을]을 제가 오랜 시간 들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엄마랑 전화를 잠깐 해서 어제 방어 식사 이야기를 했습니다. 말하다가 또 목이 메였습니다. 2월에 예정된 친구들과의 여행 계획도 잠깐 나눴습니다. 노래를 듣고 생각을 하고 어제 일을 정리하고 시를 읽다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진짜 우도를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카페 사장님께서 제 작은 바세린을 보시고는 놀라셨습니다. 어디에 파는 거냐고 물어보시길래 한껏 설명을 드리다가 그냥 제가 다음에 올 때 사 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것들을 핑계 삼아 다시 오겠다는 말을 흘립니다. 새해 인사를 나누고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좋은 시간의 흔적


짐을 찾아 배를 타러 가려고 했는데 숙소 사장님이 제 캐리어를 실어주고 계셨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차를 타고 천진항으로 가는데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3시였습니다. 새삼 우도의 해, 정말 빠르게 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장님은 어제 일본에 지진이 났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진항에 도착해서 감사인사를 진하게 드리고 배표를 끊었습니다. 배에 올라타니 입도할 때와는 완전 딴판입니다. 실내는 물론 갑판에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노리는 새들이 하늘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겨우 자리를 찾아 노래를 들으며 지는 해를 바라봤습니다.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야겠죠.


배에서 내려 도로로 나온 뒤 택시를 타고 월정리로 갔습니다. 원래 4시에 하이엔드 리스닝바를 예약해 두었었는데, 그게 6시로 밀린 탓에 느즈막하게 우도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6시까지 2시간이 남아 카페에 갔습니다. 좋은 커피를 마시고 싶어 로스터리에 갔습니다. 코스타리카 라 미니야. 시나몬과 사과, 생강 컵노트를 보고 선택했습니다. 예쁜 잔에 내려주셨는데 쏟을까 봐 자리에 가져가는데만 2분이 걸렸습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더 좋게 로스팅하거나 내릴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S가 로스팅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가능성 있는 커피의 캐릭터를 많이 끌어내지는 못 했다고 생각되어 조금 아쉬웠습니다.

저는 해변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2023 회고를 다시 시작합니다. 긴 여정입니다. 사람들이 서핑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단한 인간들입니다. 그 카페에서 회고를 마쳤습니다. 아까 계산해 보니 16000자 정도 썼더군요. 여행기까지 포함하면 저는 여행 중에 약 50000자 정도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정리를 하고 나와서 옆에 있는 네컷사진을 찍었습니다. 벌써 4번째 사진입니다. 마음에 들었습니다. 

커피와 나


짐을 질질 끌고 오프더레코드로 향합니다. 세화에 있는 바에서 만난 분이 알려주신 하이엔드 뮤직바였습니다. 그분이 1억짜리 스피커로 노래를 틀어주는 바가 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예약했던 건데요. 입장하니 남성 2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가게 중앙에 있는 1인석에 앉았습니다. 바질파스타와 탈리스커를 주문하고 가만히 앉아있는데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들어본 적 없는 사운드였습니다. 후기가 좋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느껴보니 당황스러웠습니다. 특히 해리포터 ost 오케스트라가 나올 때는 제가 호그와트에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괜히 제 boss 헤드폰을 앞으로 어떻게 쓰면 좋을지 생각했습니다. 파스타가 나와도 느릿느릿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숟가락 포크 부딪히는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청곡을 2개 보낼 수 있는데, 저는 Guns N' Roses의 November Rain과 넬의 Still Sunset을 신청했습니다. 원래 라디오헤드나 라드뮤지엄 노래를 신청할까 고민했는데, November Rain의 기타 솔로를 너무 하이엔드 오디오로 들어보고 싶기도 했고, 한 곡은 사운드가 가장 풍부한 넬의 노래를 듣고 싶어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저는 이 경험으로 하이엔드 오디오에 관심이 생겨 나오자마자 하이엔드 오디오 박람회를 찾아보았습니다. 사장님께 오디오 가격을 여쭤보니 1억 5천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노래를 들을 때 1) 녹음할 때의 환경 2)들을 때 환경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아마 둘 다 중요하겠지만 얼마나 담느냐 보다 얼마나 잘 뱉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장님의 긍지가 매 순간 느껴지는 공간


인사를 드리고 나와 버스를 타러 갔습니다. 201번 버스가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택시를 탈까 고민했지만 버스랑 소요시간이 비슷해서 그냥 그렇게 했습니다. 눈앞에서 201번을 놓쳤지만 20분 뒤에 또 옵니다. 서울에 있을 때는 너무 바빠서 버스가 20분 남았다면 욕지거리를 내뱉기 일쑤였는데요. 제주에서 20분 뒤에 버스가 온다고 하면 그저 [와서 다행이다]라는 생각뿐입니다. 저는 계속 이렇게 살고 싶은데, 아마 돌아가면 다시 욕지거리를 하겠죠. 버스가 올 때까지 이영훈 노래를 들었습니다. 버스가 도착해서 짐칸을 여는데 종아리를 아주 세게 부딪혔습니다. 너무 아팠지만 스타킹이 찢어지지 않았으니 꽤 심하진 않을 거라 생각하며 올라탔습니다. 기사님께서는 내릴 때 짐 내린다고 꼭 말해달라 5번 정도 말씀하셨습니다. 명심하겠다고 5번 대답을 한 뒤 쉬었습니다. 버스에서 처음으로 여행 경비 계산을 해봤습니다. 많이 썼더군요. 마음이 좋았습니다. 이번 달에 휴대폰도 바꾸고 머리도 하고 여행도 와서 월급만큼 소비했더군요. 대견합니다. 행복을 살 수 있어 좋습니다. 어리석은 물고기에서 들은 것처럼 저는 행복을 야기하는 걸 살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을 때 더 좋은가 봅니다. 인정하니 편합니다.


숙소 근처 정류장에 내려 걸어가는데 칠성로 광장에서 버스킹을 합니다. 예전에 버스킹을 하던 C오빠 생각이 났습니다. 오빠가 그랬는데 허가를 안 받고 버스킹을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허가받고 안전하게 하는 거겠지 생각했습니다. 비행소년. 오랜만에 들었습니다. 거미 파트가 좋더군요. 꽤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었습니다. 저는 까딱거리며 걸음을 옮겼습니다. 오늘은 공항 근처에서 잡니다. 이전에 온 적이 있는 숙소라 수월하게 길을 찾았습니다. 체크인을 하고 입욕제를 사러 나왔습니다. 여전히 버스킹을 하고 있었습니다. 입욕제를 사고 오는 길에 프라이탁 매장이 있길래 내일 아침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동문시장에 들러 흑돼지버터구이와 맥주를 샀습니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괜히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했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광장에 경찰이 있었습니다. 버스킹 하는 사람들은 경찰과 대화를 하더니 곧 마이크를 잡고 “저희는 이제 그만해야겠습니다. 매일 저녁 저희는 여기 있습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아. 그냥 신고 들어올 때까지 하는 거였구나. 괜히 재밌었습니다. 숙소에 돌아와 씻고 욕조에 들어갔습니다. 쉬면서 맥주를 마시고 배트맨 비긴즈와 봄날은 간다를 봤습니다. 배트맨은 다 봤고, 봄날은 간다는 남겼습니다. 유지태가 그랬습니다. [너 나 사랑하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사랑은 변합니다. 사람들 사랑은 그렇던데요. 제 사랑은 근데 왜 이렇게 느리게 변할까요. 저도 빨리 변하는 마음이 갖고 싶었습니다. 흑돼지도 맥주도 다 못 먹었습니다.

배트맨 비긴즈


씻고 대충 정리를 하니 너무 졸려서 잠들었습니다. 어떻게 잘 돌아갈지 결국 생각해 내지 못 한 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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