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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름모 Jan 04. 2024

[1/3] 육지로

12일 차

………어쩌지.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저는 11시 4분에 눈을 떴습니다. 11시 체크아웃인데요. 깜짝 놀랐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과감하게 씻는 건 스킵하고 짐을 쌉니다. 11시 10분에 프론트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10분만 기다려달라고 말씀드린 뒤 캐리어를 부랴부랴 정리했습니다. 빠진 게 없는지 확인하고 가장 편한 옷을 입은 뒤 신발을 신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청소하러 오신 분께 인사를 드리고 퇴실했습니다. 짐을 프론트에 맡기고 프라이탁으로 출발합니다. 만약 썩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다면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돈은 원래 이렇게 현실 감각 없어질 때 써야 하는 겁니다. 그냥 제가 하는 말입니다. 가는 길에 E언니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 몇 시 비행기야?] 그러게요. 몇 시 비행기더라. 4시쯤이었던 것 같은데, 생각하며 탑승권을 확인했습니다. 2시 10분, 탑승 마감 1시 50분입니다. 제가 이렇게 예매했다고요? 당연하지요. 그럼 다른 사람이 했겠습니까? 갑자기 타임 어택이 시작되어 바쁘게 걸음을 옮겼습니다. E언니가 가능하면 공항에 데려다준다고 했었는데, 제가 일찍 말하지 않아(사실 나도 몰랐음) 언니 운동 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볼 수 없었습니다. 언니에게 고맙다고 전했습니다.


프라이탁을 슬렁슬렁 둘러보았는데 썩 마음에 드는 게 없었습니다. 라씨와 하와이파이브오를 중심으로 둘러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제가 제주 여행 내내 들고 다닌 2만 원짜리 가방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애착이 생겼나 봅니다. 올해 9월부터 프라이탁을 가지고 싶어 드릉댔으면서 웃깁니다. 괜히 제이미도 보고 롤링도 보다가 나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라떼를 한 잔 마셔야겠다 싶어서 숙소 옆 로스터리 카페에 갔습니다.


스트롱홀드가 있더군요. 예전에 S와 사귀고 있을 때 대흥역에 있는 카페에 자주 갔었는데, 그곳에 스트롱홀드가 있었습니다. 걔가 스트롱홀드로 로스팅하는 걸 뒤에서 보곤 했습니다. 전 주로 걔를 바라보기보다는 숙취를 해결하는 데에 언제나 집중하고 있었고요. 여하튼 그런 생각을 하다가 라떼와 치즈 케이크를 주문했습니다. 오늘 아침 겸 점심은 이렇게 해결합니다. 카페에 앉아 이영훈의 노래를 연거푸 듣습니다. 저는 특히 노래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일주일 내내 듣습니다. 노래를 들으며 무어를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아마 그냥 가사를 한 글자 한 글자 곱씹고 어떤 악기가 그 음악에 들어있는지 파악하고 하나하나에 집중해 보고 그랬을 겁니다. 치즈 케이크와 함께 나온 딸기를 계속 으깼습니다. 택시를 타야 할 시간이 20분 남았습니다. 문득 N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5일 차 즈음 산 그림엽서(라고 하지만 사실 인화한 사진) 뒤에 제트스트림으로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서울에 돌아가서 써도 되지만, 그냥 아직 제주에 몸 담고 있을 때 쓰고 싶었어요. 안녕하세요, 잘 계시죠?로 시작한 편지는 건강합시다.로 줄여졌습니다. 2024년 1월 3일, 제주 칠성로에서. 별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냥 나는 휴가를 잘 보냈다. 제주에서 좋은 것들을 많이 찾았다. 당신의 2024가 좋은 날들로 구성되기를 바란다. 고맙다 따위의 이야기들입니다. 그 편지를 노트에 잘 끼워두고 길을 나섰습니다.


프론트에서 짐을 찾고 택시를 탔습니다. 공항에 도착해서 바로 수속하고 보안검색을 마쳤습니다. 면세점이 눈앞에 있길래 3년 전, L에게 주려고 지갑을 샀던 게 기억이 났습니다. 그 애에게 주려고 꽤 좋은 지갑을 샀었는데 주지 못했어요. 헤어졌다거나 그랬던 건 아닌데 그냥 안 줬습니다, 제가. 저는 이런 비하인드를 숨기고 아빠에게 그 지갑을 드렸습니다. 아빠는 적어도 평생 이 이야기를 몰라야 합니다. 담배를 살까 하다가 레종이 안 보여서 그냥 지나치고 위스키를 구경했습니다. 보모어10 다크 앤 인텐스가 8만 원대로 판매되고 있어 구매했습니다. 저에게는 꽤 큰돈입니다. 라프로익10을 10만 원에 사서 작년 내내 먹었으니 꽤 좋은 소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J오빠가 저에게 나는 10년 산은 안 먹는다고 했던 게 기억나네요. 흥. 그러던가. 탑승 마감 시간이 다가와서 빠르게 계산을 한 뒤 10번 탑승구로 향했습니다.


꾸깃꾸깃 타기가 싫어 어제 모바일 체크인하며 통로 자리를 선택했습니다. 10C였던 것 같아요. 자리에 앉아 도착할 때까지 계속 노래를 들었습니다. 김영훈 목소리요. 조금 졸기도 하고 멍 때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니 김포에 금방 도착했습니다. 9호선 급행을 타고 오는 길에 저의 안부를 물어준 친구들에게 돌아왔다는 연락을 했습니다. 저는 그 연락에 무조건 “육지로 돌아왔다”는 말을 했습니다. 꽤나 제주 사람이 되고 싶었나 봅니다. 지하철 안에서 급격하게 서울에 왔다는 현실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뚫린 구멍에서 무언가가 새는 느낌이 들어 긴급하게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저는 [잘 될 거야][잘 돌아왔어][환영해] 등의 키워드를 담고 있는 노래를 무자비하게 찾아 듣기 시작했습니다. 노사연의 [잘 될 거야]를 들었더니 조금 마음이 놓였습니다. 신논현역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집에 왔습니다. 엘리베이터 없는 5층에 사는 게 이럴 때는 정말 방해가 됩니다.


집에 돌아와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고 이것저것을 정리하다가 보모어를 한 잔 마셨습니다. 매웠습니다. 이전에 타이밍에서 보모어를 마셨을 때는 부드러웠던 것 같은데, 무언가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이 김에 오늘 타이밍에 가서 보모어를 마시고 뭐가 다른지 확인해 볼까요? 그것도 꽤 좋은 방법인 것 같네요.


그러다 잠들었습니다.

여행은 이렇게 끝났습니다만 제가 돌아온 게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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