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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름모 Jan 05. 2024

[1/4] 그 돌멩이들

매듭

여행을 매듭지었습니다. 어제 친구를 만났는데요, 제주 잘 다녀왔냐는 물음에 [육지가 적응이 안 된다]는 웃긴 답변을 했습니다. 걷다가 힘들면 [내가 섬에서 와서 오르막이 힘들다]는 둥 그런 소리도 했습니다. 친구는 누가 보면 몇 달 살다 온 줄 알겠다, 고 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번 11박 여행은 저에게 꽤 의미가 깊습니다.

저는 25년을 살아내면서 단 한 번도 여행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풀어보면 여행이라는 게 당최 무엇인지 모르겠고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이해하는 것이 저에게는 높은 문턱이었습니다. [여행이 뭐 별 건가] 하다가도 세상의 아주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다니며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기에 대단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은 온전한 여행의 시간보다 함께 간 누군가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언제나 깁니다. 그래서 그 시간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 여행이 좋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녀와서는 꼭 함께 간 사람과의 기억이 어떠했는지 같은 것들을 스스로에게 묻곤 했습니다.


갑자기 권태감같은 걸 느낄 때면 종종 강원도나 제주도로 혼자 떠나버리곤 했습니다만 그것들도 여행이라는 느낌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저에게는 적당한 도피였습니다. 여행이라는 태그를 갖다 붙이기에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요. 분명 그 시간들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심지어 책임감 없이 도망왔다는 생각에 괴로워 했습니다. (제가 여행을 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요)


이번 여행이 지난 여행들과 달랐던 것은 이것이 정당하고 합리적인 도망이며 탈출임을 인정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여행 중 만난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여행과 도망은 꽤나 다르지 않더군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요. 그것이 고생길이거나 색다른 곳에서 무언가를 배운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도망입니다. 건강한 도피입니다.


제주에서 11박을 보내며 제가 가장 많이 만났던 것은 나의 욕망과 속내였습니다. 도망 온 곳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감출 필요 없는 곳에 오니 나를 비추는 돌멩이들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저의 기질을 다시 한번 이해하고 이렇게 생겨먹은 나를 데리고 살 방법에 대한 궁리도 했습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특히 스스로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날들이 많아졌던 것 같습니다. 나의 내면은 너무 약하고 굳은살 하나 없는 말간 날 것의 그것 같아, 살아가는 게 참 어렵다 되뇌곤 했습니다.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단단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단단해지려면 자꾸만 깨지고 다쳐야 하니까요. 도대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는 저를 계속 바라보다가도 이리도 유약한 나를 어떻게 사랑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날들을 보냈습니다. 언제나 젠가 블록을 빼는 것처럼 불안했습니다. 이런 마음은 어떤 시기를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제 삶의 전반에 걸쳐져 있습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는 태어나 처음으로 나의 유약함이 가식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꽤 강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사람, 보편적인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많은 것을 감추고 그 행동에 에너지를 지나치게 써버려서 약한 사람이라 스스로 명명한 것이죠. [적어도 나는 희생했으니, 그래서 약해졌으니 당신들은 나를 존중해 달라]는 아무도 모르는 메시지를 계속 보낸 모양입니다. 아무도 저에게 그 무엇을 희생하라 말한 적 없습니다. 적어도 성인이 되고 나서는요. 억울한 것들은 모두 미움받기 싫어하는 마음에서 피어올랐던 것 같습니다.


관련해 유년에 대한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이미 형성되어 버린 많은 것들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생겨버린 상흔들과 방어기제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평생 지니고 살아내야 하는 흔적들입니다. 억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어린 나의 발달과업과 애착형성에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은 보호자들을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언제나 그래왔듯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강하다는 증거겠지요.


잘 돌아가는 방법에 대한 고민도 했습니다. 이 여정을 마무리하고 나의 일상으로 잘 복귀하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돌아간다는 것도 나의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저는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 두고 온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잘 돌아가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이것은 제가 꽤나 제 일상을 좋아한다는 반증이겠죠. 제주에서 이영훈의 노래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다 사라져 버렸으면 하다가도, 진짜 다 사라져 버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을 돌아봅니다.


저는 잘 돌아왔습니다. 잘 돌아오는 방법 같은 건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주로 돌아다니는 정보성 글처럼 첫 째, 여행에서 찾은 것들을 일상에 대입한다. 둘째, 좋았던 기억들로 내일을 살아내 본다 등의 문장들을 쓸 수는 있겠지만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그냥 저는 잠시 갔다가 다시 온 것뿐입니다. 처음과 끝은 없습니다. 여행을 하는 중에도 제 일상이 멈춰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서 이곳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타고 또 하루하루 낡아갈 겁니다. 아. 좋은 기억에 생명이 풍화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지요.


저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나를 데리고 어떤 미래를 만들어갈지 고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여행뽕이 빠지지 않은 지금은 그렇습니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이런 마음들이 또 생각들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잘 다녀왔다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조금이나마 열린 여행의 가능성이 벌어진 채로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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