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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Jul 11. 2019

피아노가 있던 자리

늘 그 자리에서, 오랜 좋은 친구가 되어주길 바라며  


"엄마, 피아노 사주세요"



피아노를 배운 지 5개월쯤 된 첫째가 요즘 들어 피아노를 사 달라고 조른다.


"으응 피아노? 양손 다 잘 칠 수 있게 되면 사줄게"


이제 막 어린이 바이엘을 배우는 중인데 집에 와서 스케치북에 오선을 그어 음표를 그려 넣기도 하고, 계이름을 흥얼거리는 것이 확실히 흥미를 붙이고 즐겁게 배우고 있는 것 같다. 음악을 항상 가까이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기쁘긴 하지만 그렇다고 선뜻 피아노를 사주자니 여러 생각이 스친다.


업라이트 피아노(클래식 피아노)를 사주자니 금액이 많이 부담될뿐더러 무겁고 자리를 많이 차지할까 봐, 진동과 소리 울림이 층간소음을 유발할까 봐, 혹시나 흥미를 잃고 방치할 경우 애물단지가 될까 봐 이런저런 걱정들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디지털 피아노는 한 번도 이용해 보지 않아서 괜찮을지 잘 모르겠고 브랜드와 가격대가 천차만별이라 뭘 사면 좋을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진한 갈색의 피아노 맨 위에는 인형과 책들이 늘어져 있었고 건반 위에는 빨간 덮개가 덮여 있거나 뚜껑이 닫혀 있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아기였을 때도 피아노 앞에서 인형과 함께 건반을 딩동 거리고 있는 사진이 있는 것을 보면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구입한 악기는 아니었다.

엄마가 대학생 때 구입한 것이라고 들었다.

아마 아빠와 결혼하면서 집으로 가져온 모양인데 무겁고 오래되고, 정기적인 조율을 하면서 꼼꼼히 관리하는 편은 아니었던지라 저 왼쪽 끝 낮은음 몇 개는 소리가 잘 나지 않았던 그런 피아노였다.

그래도 나와 여동생이 자라면서 피아노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피아노 학원에 꽤 오랫동안 다녔기 때문에 악보를 안 보고 칠 줄 아는 곡도 몇 개 생겼다.

피아노 의자 뚜껑을 열면 동요곡집, 명곡집, 재즈 소품집 등이 있었고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몇 장 씩 사곤 했던 피스(8절 크기로 만들어진 1장짜리 악보, 한 장당 500원 정도 했던 것 같다)가 있었다.

긴 여름방학이면 집에서 복숭아며 수박 등을 먹고 놀다가 심심해지면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검은건반을 빠르게 치는 '고양이 왈츠', 우리 집 초인종 소리이기도 했던 '엘리제를 위하여', 재즈가 뭔지도 몰랐지만 곡이 좋아서 열심히 쳤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같은 것들이 내가 자주 쳤던 곡이다.

가끔 동생과 젓가락 행진곡 같은 연탄곡을 연주했던 기억도 난다.   

쇼팽의 연습곡집 중 '왈츠 7번'은 내가 마지막으로 준비했던 피아노 학원 연주회 곡이었는데 아마 학원을 그만두게 되면서 연주회는 못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곡을 끝까지 치지는 못하고 앞부분은 외우다시피 쳐서 지금도 건반에 손을 올리면 손이 기억하고 움직이는 것이 참 신기하다.   



https://youtu.be/cSmU9 qu-tKM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피아노 앞에 앉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입시공부에 매달리느라 집에 있는 시간도 없었지만 집에서 쉬더라도 피아노를 치기보다 차라리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면서 친정 집을 떠났다.

이후 언젠가 집에 가보니 피아노가 사라져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없는데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 뭘 잘 못 버리는 편인 우리 부모님도 정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래도 집에 피아노가 있었기 때문에 피아노 학원에 다녀와서도 따로 연습할 수 있었고 동생과 같이 연주를 하기도 하고 악보를 읽을 줄 알게 되면서 학원에서 배우지 않은 곡을 악보만 보고 쳐보기도 하는 등 음악을 듣고 즐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피아노를 사기로 했다.

많은 고민을 했지만 요즘은 과거보다도 더 층간소음 문제에 예민하므로 디지털 피아노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헤드폰을 끼고 칠 수 있으니 언제든지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아이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 선생님께 어떤 피아노를 사면 좋을지 여쭤보니, 선생님은 의외의 대답을 하셨다.



"어머니, 어떤 피아노를 사셔도 괜찮은데요,

디지털 피아노는 건반이 무거운 것으로 고르시고 가장 중요한 것은 '중고'로 구입하세요.

비싼 거 사지 마시고 꼭 '중고'로 사세요."



아마 피아노 학원을 다니며 어릴 때 잠깐 흥미를 갖고 치다가 곧 시들해지는 아이가 많아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다. 실제로 중고 피아노를 구입하기 위해 동네 기반 중고사이트나, 유명한 중고거래 카페에 가입해서 키워드를 검색해보니 디지털 피아노 매물은 심심찮게 찾을 수 있었는데 많은 물건이 '아이가 이제 안쳐서'라는 설명을 담고 있었다.


일단 어떤 디지털 피아노가 좋은지, 장단점은 무엇인지 알고 사야 했으므로 디지털 피아노 관련 인터넷 카페에 가입을 해서 추천 글을 정독했다.

이제 막 피아노를 치는 아이에게 적합한 모델이면서 선생님이 강조하셨던 건반이 무겁고(전문용어로 타건감이 좋은 것) 여러 기능이 많은 것보다 최대한 피아노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제품을 원했다.

디지털 피아노라고는 '야마하'만 알던 나였는데 그 제품 말고도 디지털 피아노의 브랜드 종류는 꽤 다양했다.

여러 사용후기를 읽고 유튜브에서 음색도 들어보고 가격을 비교해보면서 드디어 적합한 모델을 발견했다.

원하는 제품의 매물이 별로 없어 중고로 구입하는 것과 새 것을 구입하는 것이 가격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 새 것으로 구입을 결정했다.


배송된 피아노를 받아 설치하고 조심스레 건반을 눌러보았다.

디지털 피아노를 연주해보기는 처음인데 예전에 치던 일반 피아노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첫째가 피아노를 보더니 피아노 학원 가방에서 바이엘 책을 꺼내 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배운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엄마, 봐 봐"를 연발하며 서툰 손놀림으로 건반을 연신 눌러댄다.



디지털 피아노의 수명은 관리상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10년 정도라고 한다.

10년이면 첫째가 중학생, 둘째는 초등 고학년 정도가 될 텐데 전공을 하지 않는다면 어릴 적 10년 정도는 피아노를 곁에 두고 즐기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늘 그 자리에 있어 언제든 둥당거리며 즐길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 시절 피아노와 함께 한 시간이 좋은 추억이 될 수 있도록, 피아노가 있던 자리를 즐겁게 그리워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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